아프가니스탄 ─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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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프가니스탄은 “더 이상 석기 시대로 되돌릴 것도 없는” 나라가 됐다. 20년 넘게 계속된 내전으로 전국은 황폐해졌고, 카불을 비롯한 여러 도시는 돌무더기만 남아 있는 폐허나 다름없다. 인구의 85퍼센트가 농업에 의존하고 있는 사회에서 그나마 몇 안 되던 옥토조차 황무지로 변한 지 오래다. 경제는 완전히 붕괴했다. 거의 4백만 명의 난민이 파키스탄·이란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고, 문맹률은 거의 65퍼센트에 이른다. 아프가니스탄의 보건 위생은 세계 최악이다. 평균 수명은 남성이 43세, 여성이 43.5세에 불과하다. 5세 이하 유아 사망률은 세계 4위고, 산모 사망률은 세계 2위다. 1996∼1998년에 이미 인구의 70퍼센트가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었다. 온갖 질병들이 창궐하지만 적절한 치료 시설이 없어 말라리아에 감염된 어린이는 닷새를 넘기지 못하고 죽어 간다.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은 150년 넘게 계속된 제국주의 열강의 개입과 점령이 낳은 결과다.
근대적 의미의 아프가니스탄 국가는 남부 파슈툰족 족장들이 아흐마드를 샤(국왕)로 옹립한 1747년에 수립됐다. 그는 칸다하르·헤라트·카불을 통치하면서 비옥한 평야 지대인 페샤와르와 신드, 목초지가 풍부한 카슈미르 계곡에서 획득한 공물을 족장들에게 나눠 주는 방식으로 그들의 충성을 확보했다. 그 대가로 족장들은 아흐마드 샤에게 충성을 바치면서도 자기 지역에서는 사실상 독자적인 지배자로 군림했다. 그런데 인도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과 남진정책을 추구하던 제정 러시아가 19세기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서로 충돌했다. 러시아는 옥수스 강 북쪽의 영토를 점령했고, 영국은 ‘듀런드 선’을 그어 파슈툰족 공동체를 둘로 나누었다. 이 두 제국이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선을 획정했다. 영국령 인도 주재 총독 커즌 경은 1898년에 아프가니스탄과 그 인접국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 나라들은 장기판의 졸이나 다름없다. 그 장기판 위에서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게임이 진행되고 있다.”그렇게 진행된 게임은 세 차례에 걸친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이어졌다. 제1차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벌어질 때까지만 해도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는 국민적 정체성 같은 것이 없었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종족과 언어는 국민 국가라는 고유한 의식을 창출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다.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아프가니스탄인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던 것은 바로 공통의 종교적 기반, 즉 이슬람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르면서 ‘이교도’의 침입에 맞선 이슬람의 ‘성전’(聖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그럼에도 결국 1905년에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했다. 그러다가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력이 느슨해진 틈을 타 1919년에 영국에서 독립했다.
냉전
20세기 후반의 냉전기에는 미국과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충돌했다. 1933년에 왕좌에 오른 무함마드 자이르 샤는 자기 사촌 무함마드 다우드에게 쫓겨나기까지 무려 40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했다. 1973년에 무함마드 다우드는 국왕의 외유를 틈타 좌익 파르캄당의 지원을 받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공화국을 선포한 뒤 스스로 대통령이 됐다. 파르캄당은 1977년에 역시 좌파인 칼크당과 연합하여 아프가니스탄인민민주당(PDPA)을 결성했다.
1978년 이번에는 PDPA가 쿠데타를 일으켜 다우드를 살해하고 정권을 잡았다. 소련의 지령을 충실히 따르는 무함마드 타라키가 ‘혁명평의회’를 구성하고 독재 정권을 구축했다.
그러나 집권당의 두 정파가 분열하고, 정적 숙청과 토지개혁에 대한 반발이 겹치면서 정치적으로 더욱 불안정해졌다. 이 때부터 무자헤딘의 저항이 시작됐다. 1979년 초 인접국 이란에서 일어난 혁명에 질겁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마저 소련에 넘어갈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미국은 비밀리에 무자헤딘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979년 9월에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타라키가 암살당하고 아민 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정정은 여전히 불안했고 반란이 더욱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그 해 12월에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아민을 제거하고 바브라크 카르말을 통치자로 내세웠다. 미국은 ‘이교도’의 침입에 맞서 ‘성전’을 부르짖는 무자헤딘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카터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비밀 작전을 수행하라고 지시했다. 파키스탄의 군 정보기관인 ISI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던 CIA(미국 중앙정보국)는 1980∼85년에 36개 이슬람 국가에서 수천 명의 자원병을 모집하여 전사로 훈련시켰다. 오사마 빈 라덴도 이 ‘아랍계 아프가니스탄인들’ 중 한 명이었다. 이 전사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알 카에다 조직에 합류했고 전에 자기들을 후원했던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에 맞서 싸우게 된다. 1980년대에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싸우고 있는 자유의 전사들의 저항은 우리가 이 나라[미국]에서 견지하고 있는 이상, 즉 자유와 독립이라는 이상이 결코 꺾일 수 없다는 사실을 세계 만방에 보여 주는 사례다.”
무자헤딘
1980년부터 1992년까지 무자헤딘은 미국과 그 동맹국으로부터 1백억 달러 이상의 원조를 받았다. 1986년에 CIA 국장 윌리엄 케이시는 아프가니스탄에 미국의 군사 고문을 파견하여 “자유의 전사들”을 훈련시켜야 한다고 의회를 설득했다. 무자헤딘은 미국의 양대 정당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공화당 상원의원 오린 해치는 “자유의 전사들”이 “단호함과 두둑한 배짱”을 갖고 있다고 칭찬했다. 민주당 상원의원 빌 브래들리는 무자헤딘을 “아프가니스탄 국민을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CIA와 펜타곤(미국 국방부)은 파키스탄의 이슬람 학교와 아프가니스탄의 군사 기지를 잇는 연결망을 구축하고 무자헤딘을 훈련시켰다. 미국이 무자헤딘에게 제공한 스팅어 미사일은 전황을 소련에 불리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됐다. 한편, 소련도 무자헤딘을 진압하기 위해 450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최대 11만여 명의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조차 무자헤딘의 끈질긴 게릴라전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소련군은 대도시 지역을 장악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그 밖의 지역은 거의 통제할 수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소련판 베트남’이 됐다. 소련군은 결국 1989년 2월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10년 전쟁 동안 자그마치 아프가니스탄인 1백만 명이 죽었고, 6백만 명이 해외로 떠났으며, 2백만 명은 국내 난민 신세가 됐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기 전에 꼭두각시 정권을 세워 두었다. 1989년 3월 이후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소련의 무기 공급이 재개되면서 곧 끝날 듯하던 내전은 다시 격화됐다.
1992년 3월에 압둘 라시드 도스툼 장군 휘하의 우즈베크계 민병대가 정부를 배반하고 아메드 샤 마수드가 이끄는 타지크계 무자헤딘 게릴라에 합류했다. 이들은 연합해 북부의 요충지인 마자르 이 샤리프를 함락시키고 카불로 진격했다. 드디어 그 해 4월 무자헤딘은 카불을 함락시키고 나지불라 정권을 타도했다. 온건파의 지도자인 부르하누딘 랍바니가 새 대통령이 됐고, 굴부딘 헤크마티야르가 총리, 마수드가 국방장관이 됐다. 그러나 무자헤딘 정권도 아프가니스탄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는 없었다. 반소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느슨한 연합체였던 무자헤딘은 미국과 파키스탄과 사우디아라비아뿐 아니라 러시아, 이란, 인도, 인접 중앙 아시아의 공화국 등 여러 나라와 이런 저런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제 이들 각국은 아프가니스탄에 자국의 이익에 맞는 정권을 세우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
이란의 지원을 받던 마수드가 가장 먼저 카불에 입성하여 파슈툰 족의 지지를 받고 있던 헤크마티야르의 카불 진입을 불허했다. 그러자 헤크마티야르는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아 카불을 폭격하여 폐허로 만들고 1주일 동안 2만 5천 명을 죽였다. 냉전기에 소련에 대항하는 전쟁을 위해서 막대한 무기와 자금으로 무자헤딘을 지원했던 미국은 정작 그 피해를 복구하고 새로운 사회 기반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경제 지원에는 한푼도 쓰지 않았다.
탈레반
1994년이 되자 아프가니스탄 국가는 사실상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대안 세력으로 탈레반이 떠올랐다.
탈레반은 이전에 파키스탄 내 아프가니스탄 난민촌에서 무자헤딘을 교육시키고 훈련시켰던 바로 그 이슬람 학교(‘마드라사스’)에서 30명의 학생으로 출발했다. 파키스탄의 ISI는 미국의 무기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금을 지원받아 탈레반을 양성했다. 또, 억압적이기로 유명한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에서 지극히 편협하고 금욕적인 이슬람 근본주의의 한 종파인 와하비즘을 수입하여 가르쳤다. 탈레반은 부정부패 타파, 내전 세력의 무장 해제, 약탈과 파괴의 중단, 이슬람 율법에 기초한 순수한 이슬람 정부 수립을 내걸고 지지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끊임없는 전쟁의 참화와 절망 속에 허덕이던 아프가니스탄 민중은 탈레반을 새로운 대안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처럼 보였고, 수천 명의 청년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탈레반은 불과 2년여 만에 5만 명의 무장 세력으로 성장했고, 드디어 1996년 9월에 카불을 점령하고 아프가니스탄 영토의 90퍼센트 이상을 장악했다. 옛 무자헤딘 잔존파들, 즉 타지크계의 마수드파, 우즈베크계의 도스툼파, 시아파 하자라 족의 카림 칼릴리파 등은 아프가니스탄 북부로 쫓겨나 반탈레반 투쟁을 계속했다. 이란, 러시아, 인도가 이들 북부동맹에게 무기와 자금을 대주었다.
이슬람 세계의 맹주 자리를 놓고 사우디아라비아와 다투고 있던 시아파 이슬람 국가인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는 탈레반과 앙숙이었다. 러시아는 탈레반의 이슬람 근본주의가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독립국가연합(CIS) 소속의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미칠 영향을 우려했다. 인도는 1947년 독립 이래 적대 관계였던 파키스탄이 지원하는 탈레반과 당연히 사이가 나쁠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이해관계
그렇다면 탈레반의 결성과 성장을 후원했던 미국이 지금은 오히려 그들을 공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1995년에 미국 정부는 자국 석유회사 유노캘이 카스피 해 연안의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아프가니스탄을 경유하여 파키스탄으로 이어지는 송유관 건설 사업을 지원했다. 그래서 미국으로서는 아프가니스탄을 통제할 수 있는 단일 정부가 절실했다. 1996년에 탈레반이 집권하자 유노캘은 탈레반과 송유관 건설 사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건설 공사에만 45억 달러가 드는 중요한 사업이었다. 1997년에 나온 세계은행의 연구 보고서는 유노캘이 추진하는 송유관 노선이 기존 러시아 송유관을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라고 결론지었다. 유노캘의 부회장 크리스 태거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탈레반이 상황을 진정시키고 국제적 승인을 얻기만 한다면, 그 사업은 실현 가능성이 있다.”그러나 탈레반은 미국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미국이 수단에 압력을 넣어 쫓아낸 빈 라덴을 받아들인 탈레반은 집권한 뒤에 이슬람 근본주의를 더욱 강화했고, 미국이 지원했던 군사 훈련 기지를 계속 확대하면서 수많은 무슬림을 전사로 훈련시켜 중동 각지로 내보냈다.
이미 이란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의 반제국주의 투쟁의 뜨거운 맛을 본 적이 있는 미국으로서는 중동 지역의 불안정 요인이 될 세력을 계속 양성하는 탈레반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노캘은 아프가니스탄의 정정 불안을 이유로 송유관 건설 사업을 전면 유보했고, 1997년에 미국은 에너지 전략을 변경해야 했다. 탈레반이 미국에 아직 유용했을 때 브레진스키가 했던 말은 지금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세계사의 관점에서 봤을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탈레반인가 아니면 소련 제국의 붕괴인가? 흥분한 소수의 무슬림인가 아니면 냉전의 종식인가?” 브레진스키에게 “세계사의 관점”은 다름 아닌 미국의 세계 지배 전략이다. 세계 최강의 초강대국으로서 패권을 유지하고 세계를 누비는 미국 자본의 이익을 보장하려는 미국 제국주의야말로 전 세계적인 불안정과 전쟁,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는 근본 요인이다. 탈레반이든, 이라크든, 세르비아든 그런 지배 전략을 추구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미국은 제아무리 어제의 동맹국일지라도 가차없이 적으로, 악마로 만들어 파괴하고 응징했다.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은 미국의 세계 지배에 관건이 되는 전략적 자연 자원, 즉 석유와 천연가스의 보고인 중동과 카스피 해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그 지역에서 자국의 패권과 지배력을 다시금 천명하기 위한 본보기로 아프가니스탄을 폭격하고 있다.
미국의 이런 제국주의적 지배 전략과 그 실행을 저지하고 좌절시키지 못한다면, 세계적 불안정과 전쟁 위험은 아프가니스탄과 중동 지역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