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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됐는가

존 몰리뉴 (영국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책갈피),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의 저자)

1967년 12월, 당시 19살이던 나는 뉴욕에서 사회주의자가 됐다.

14살 때부터 나는 매우 반항적인 10대였다. 처음에 나는 선생님들과 논쟁하고 내가 다니던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그래머 스쿨[영국의 인문계 중등학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식으로 일종의 "지적" 반항을 했다.

그 뒤 더 아나키즘적이고 심지어 허무주의적인 반항도 했다. 나는 "체제에 저항"했지만, 나 자신을 개인적인 아웃사이더나 반항아 ― 시인, 음악가, 부랑자, 도박사, 범죄자 ― 라고 생각했지, 노동계급에 일체감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 나는 사회주의 사상을 접해본 적도, 사회주의 활동가를 만나본 적도 없었다.

이런 사정은 사우스햄프턴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바뀌었다. 사회주의 사상은 곧바로 나를 매료시키기 시작했다. 그 뒤 나는 겨울 방학에 3주짜리 뉴욕 여행을 갔고, 뉴욕에 도착한 첫날 밤 호텔방에서 도둑을 맞았다. 그래서 맨해튼을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매디슨 거리를 따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지나 값싼 숙소를 구하러 빈민가인 바우어리 지구까지 갔다. 바우어리에 위치한 여관의 조그만 침실은 하룻밤 자는 데 1달러면 족했다.

그렇게 가까이에서, 그렇게 생생한 불평등을 목격한 것은 생애 처음이었다. (당시의)복지국가 영국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한편에선 맨해튼의 고층건물들로 상징되는 기업 자본의 천문학적인 부와, 다른 한편으로 미국 사회의 실패와 냉대로 인한 완전한 타락이 ― 바우어리에서 겨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는 알콜중독자, 변성알콜 섭취자, 마약중독자, 아프고 다친 노인들 ― 지척에서 공존했다.

그 때 내가 깨달은 것은 이런 상반되는 현상이 나란히 존재할 뿐 아니라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 착취와 소외로 얼룩진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런 깨달음 때문에 나는 사회주의자가 됐다.

1968년 1월, 영국에 돌아온 나는 처음으로 접촉한 마르크스주의 단체인 '사회주의노동자동맹' 소속 청년사회주의자들(the Young Socialists of the Socialist Labour League') ― 당시 내가 다니던 대학 캠퍼스의 유일한 조직 ― 에 가입했다. 나는 그 조직이 제리 힐리(Gerry Healy)라는 독단적인 지도자가 지배하는 지극히 종파적이고 교조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조직임을 곧 알게 됐고 두 달이 채 못 돼 그 조직에서 나오고 말았다.

그 뒤 나는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뛰어들어 1968년 3월 베트남연대운동이 주최한 대규모 시위에 참가했다. 그 시위는 거버너 스퀘어 광장에 있는 미 대사관 앞에서 경찰과의 대규모 전투로 끝났다. 그 때 처음으로 경찰 폭력을 맛봤다. 기마경찰이 시위대를 공격했을 때 느꼈던 두려움과 이에 맞서 저항하는 시위대의 용기를 보며 느꼈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뒤의 결정적 시기는 학생 반란이 프랑스 노동계급의 총파업을 불러일으킨 파리의 5월이었다. 텔레비전에서 본 광경에 크게 고무된 나는 직접 프랑스에 가서 현장을 보기로 결심했다.

내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학생들이 증권거래소를 포위한 다음 날 아침이었고, 방문 기간 내내 학생들과 경찰은 불안한 휴전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떤 거리 전투에도 참가할 수 없었다. 그러나 투쟁의 잔해들 ― 보도블록을 깨뜨려 만든 자갈들, 남아있는 바리케이드들, 붕대를 감은 채 걷고 있는 부상자들 ― 은 도처에 널려 있었고, 나는 또 총파업의 힘으로 마비된 사회를 볼 수 있었다.

나는 곧장 점거 상태에 있었던 소르본 대학으로 갔고, 거기서 밤을 지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나는 그들이 학생인 줄 알았는데, 대다수는 투쟁에 매료된 젊은 노동자들이었다. 나는 또 파리 전역과 국립극장 오데옹 ― 당시 이 곳은 운동의 목적, 전략, 전술 등을 24시간 내내 논의하는 상시적 대중집회장으로 쓰였다 ― 에 부착될 멋진 포스터들을 대량 인쇄하고 있던 예술학교(에꼴 데 보자르)도 방문했다.

나는 1968년 5월을 통해 무엇보다도 투쟁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경험했고, 노동자 혁명이 서구 선진국에서도 가능하다는 확신을 얻었다.(5월 사건이 있기 전에 좌파들 사이에서 득세했던 견해는 혁명은 오직 제3세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혁명적 사회주의자임을 자임하게 됐고, 영국으로 돌아와 가입할 단체를 찾아 나섰다.

6월에 대학 친구 몇몇이 '국제사회주의자들'의 토니 클리프를 만났다. 나는 그 모임에 참가하진 않았지만 친구들은 나에게 토니 클리프가 매우 인상적인 인물이었다고 전해 주었다. 그는 '국제사회주의자들'이 종파적이지 않고 개방적인 반(反)스탈린주의 조직이며, 학생운동과 베트남전 반대 운동이 영국 노동계급을 향해 나아가길 원하는 조직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클리프는 또 내 친구들에게 가입원서를 몇 장 건네주었다. 나는 가입원서를 작성해서 클리프에게 발송했다. 당시 그 단체의 정책과 이론 등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지만 적어도 내가 함께하고 싶어하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 해 여름방학에 런던 집으로 돌아갔을 때 근처의 '국제사회주의자들' 지회에 가입했다. 1968년 여름은 흥미진진한 시기였다. 토니 클리프, 마이크 키드론 말고도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여러 지도적 활동가들을 만났고 많은 모임에 참석했으며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략에 반대하는 것을 포함해 다양한 운동과 시위에 참가했다. 또, 〈사회주의 노동자〉 신문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 해 가을 사우스햄프턴 대학교로 돌아왔을 때, 나는 헌신적인 회원이 되어 지역 지회를 건설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 헌신성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번역 조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