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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에 대한 서방의 편견

이슬람에 대한 서방의 편견

서방 지배자들과 언론들은 소련이 붕괴한 1990년대 이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충돌이 ‘이슬람과 서방’의 충돌로 대체됐다고 주장해 왔다. 1980년대에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이슬람을 당시 소련과 함께 세계를 위협하는 최대의 ‘악’으로 규정했다.

서방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슬람을 본질적으로 편협하고 폭력적인 종교라고 비난한다. 〈뉴스위크〉(2001년 10월 17일치)는 “중동의 테러리스트들이 왜 미국을 증오하는가” 하고 물음을 던진 뒤 이렇게 답변했다. “미국인들은 자유를 지지하고 저들은 자유를 증오한다, 미국인들은 부자이고 저들은 미국의 부를 시기한다, 미국은 강하고 저들은 미국의 힘을 증오한다. …그러나 빈곤과 질투심보다 더 강한 무엇이 작용하고 있다. 살인과 동시에 자살을 부추기는 것은 …바로 종교다.”

모순된 이해 관계

판에 박힌 반이슬람 선동은 이슬람이 서로 다른 계급들의 서로 다른 이해 관계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주요 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은 매우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모순된 신앙의 구현체다. 예컨대, 기독교는 “해방 신학”의 이름으로 1970년대와 1980년대 라틴 아메리카에서 계급 불평등과 미국이 후원한 독재 정부와 맞서 싸웠다. 그러나, 기독교는 미국 권력과 자본주의와 독재 정부를 지지하기도 한다. 이슬람도 마찬가지다. 사회 억압에 반대하는 꾸란의 모호한 교리는 깊은 좌절감에 대한 출구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슬람 정치 운동의 성장은 세계 질서로부터 배제된 수억 명의 사람들이 느끼는 소외의 산물이다. 예컨대, 이슬람의 기치 아래 일어난 두 번의 위대한 봉기 ― 1979년 이란 혁명과 1980년대 옛 소련의 침공에 맞선 아프가니스탄인들의 항쟁 ― 는 이집트·알제리·팔레스타인 점령지 등의 반정부 투쟁과 반제국주의 운동에 영감을 줬다.(이 봉기들은 서방 지배자들을 전율에 빠뜨렸고, 이슬람을 마녀사냥하는 계기가 됐다.)이란 혁명은 독재자 팔레비 국왕과 그를 후원한 미국에 대한 사무친 반감의 폭발이었다. 팔레비의 전제적 통치는 다양한 사회 세력들을 적대자로 만들었다. 이슬람은 팔레비의 전제적 통치를 통렬하게 비난했다. 그 때문에 이슬람은 공동의 적에 맞선 다양한 사회 집단들의 구심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친소 정권이 스탈린주의적 방식의 급속한 ‘근대화’ 계획을 실시하려 하자 매우 다양한 사회 세력들이 저항했다. 친소 통치자가 죽자 또 다른 인물을 권좌에 앉히기 위해 옛 소련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그 때 이슬람은 다시 한 번 저항의 슬로건으로 등장했다.(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는 이 잡지의 관련 기사를 참조하시오.) 그러나, 이슬람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이슬람의 급진적 요소들은 약화됐다. 이슬람 정권들은 기꺼이 이슬람 자본가들과 협력했고 내부의 반대파들을 혹독하게 탄압했다. 1979년 이란의 국왕 팔레비가 대중 파업과 무장 봉기와 군대 반란으로 전복되자, 각자 자기 식대로 이슬람 교리를 이해했던 다양한 집단들은 매우 다른 실천적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이슬람과 세속 집단 사이에, 그리고 상이한 이슬람 교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결국 아야톨라 호메이니의 추종자들이 승리했다.(‘아야톨라’는 시아파 무슬림의 종교 지도자를 가리키는 호칭이다.) 이들은 패배한 반대파들을 가혹하게 숙청했고, 종교의 이름으로 억압과 테러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이것은 반혁명이었다. 서방에 맞서 이슬람이 하나로 단결해 있지도 않다. 대부분의 이슬람 정권들은 미국을 포함한 주요 강대국들과 동맹을 맺었다. 또, 1980년대 가장 거대하고 끔찍한 전쟁은 이라크의 이슬람 정부와 이란의 이슬람 정부 사이에서 벌어졌는데, 미국은 결정적 순간에 이라크를 지지했다.(사우디아라비아와 수단의 핫산 알투라비 이슬람 정권도 이라크를 지지했다.) 이런 모순은 이슬람 자체에 내재된 것이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사람들이 억압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고 설교했다. 그의 설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었지만, 부자들을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무함마드는 자비의 이름으로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화해시키려 했다.

이슬람과 폭력

무력과 강제에 의한 이슬람 개종을 가리키는 “한 손에는 꾸란, 한 손에는 칼”이라는 말이나, “참수형·투석형·손목 절단형” 등이 명시돼 있는 샤리아(이슬람 율법) 등은 이슬람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세 이슬람의 출현 배경과 과정을 보면 이것이 매우 편협한 시각임을 알 수 있다. 7세기 초 예언자 무함마드의 신도들은 역사적 문명의 땅인 중동에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무함마드 사후, 칼리프(무슬림 통치자)였던 아부 바크르와 오마르가 이끈 아랍 군대는 두 제국의 도시들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무함마드의 제국은 비잔틴 제국과 사산 페르시아 왕조의 위기 덕분에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이슬람 군대는 낡은 제국의 지배자들에 대한 대중의 엄청난 반발 덕분에 승리했다. 도시 주민 가운데 다수였던 유대인들과 ‘정통’ 기독교인들은 아랍 군대를 환영했다. 무슬림 정복자들이 새로운 국가 구조를 만들지도 않았고, 주민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지도 않았던 초기에는 특히 그랬다. 처음에 무슬림 정복자들은 낡은 행정 기구를 대부분 그대로 두었고, 기독교인·유대인·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인 들의 신앙을 존중했다. 무슬림 정복자들은 단지 정규적인 세금을 납부하라고 요구하고, 국가와 무슬림의 지배에 계속 저항한 귀족들의 토지를 압류했을 뿐이었다. 주민 대중은 옛 제국들보다 덜한 억압을 받았다. 한 유대인 작가는 “조물주는 인간을 악에서 구하시려고 이스마엘[즉 아랍] 왕국을 주셨다.”고 말했고, 시리아의 한 기독교 역사가는 “하느님은 아랍인을 사용해 우리를 로마인들에게서 해방시키셨고 … 로마인들이 우리에게 보인 만행과 격심한 증오에서 구하셨다.”고 말했다.

이슬람을 다루는 역사가 버나드 루이스는 역사적으로 기독교 지도자의 통치보다는 이슬람 지도자의 통치 아래서 소수 종교 신자들의 삶이 더 풍요로웠다고 지적했다. (《중동의 역사》, 까치 출판사).

무함마드의 설교는 아랍의 농민과 도시민이 믿은 기독교·유대교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당대의 기독교와는 달리, 이슬람은 단지 신앙과 도덕적 규범만을 설교하지 않았다. 무함마드의 설교는 사회 개혁을 위한 정치 강령이기도 했다. 무함마드는 전쟁의 파괴, 두 제국의 수탈 등으로 말미암은 대중의 가난과 사회 혼란을 해결하려 했다. 무함마드는 단일한 법전에 근거한 공동체(움마: Ummah) 건설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때문에 무함마드는 메카의 지배자 가문들의 미움을 받았고, 신도들을 이끌고 메디나로 망명(헤지라)해야 했다. 한편, 서방 지배자들은 “간음하면 돌로 쳐죽이고 도둑질을 하면 손을 자른다”고 명시돼 있는 샤리아가 이슬람의 야만성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하디스(무함마디의 언행)와 샤리아는 인도적이고 문명화된 가치와 반대되는 야만주의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면적인 해석이다. 9세기와 10세기에 이 법전들은 제국의 관료와 지주 귀족들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상인과 수공 기술자의 가치관을 부분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것은 서유럽에서 발전하고 있던 봉건 제도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 제국인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현실과도 선명하게 대비됐다. 사실, 중세 이슬람은 야만주의를 대변하기는커녕 암흑기 유럽뿐 아니라 정체한 비잔틴 제국과도 뚜렷하게 대비됐다. 특히 8세기 중엽 압바스 혁명은 1백여 년 동안의 경제 성장으로 가는 길을 열어젖혔다. 생산·기술 혁신·예술 기법·과학 지식 등이 발달했다. 메소포타미아와 나일 강 유역은 밀, 보리, 쌀, 대추야자, 올리브를 생산하면서 번영을 누렸다. 제국의 무역량은 방대했다. 무역의 범위는 동쪽으로는 인도 동부와 중국까지, 서쪽으로는 러시아와 아프리카와 서유럽에까지 이르렀다. 무역의 확대와 함께 일종의 은행 제도도 출현했다. 수공 기술자에 기반을 두고 공업도 번창했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상층의 부유한 사업가, 곡물상, 징세 대행인, 수입상 등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 인도의 수학 발전은 아랍 학문의 한 토대가 됐고, 아랍 학문은 수백 년 뒤 유럽에서 르네상스가 일어나게 한 핵심적인 동력이 됐다. 이것은 압바스 혁명이 지주와 장군만큼이나 상인과 장인을 중시하는 정책을 펴며 대서양에서 인더스 강에 이르는 지역을 통일시켰기 때문이다.

이슬람과 테러

서방 정부와 언론들은 지난 10년 동안 이슬람을 비이성적 폭력과 동일하게 취급했다. 그러나 이슬람과 테러는 동의어가 아니다. “본래의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이슬람 부흥 운동(소위 이슬람 근본주의)은 이슬람 사회의 세속적 타락을 반대하고 꾸란과 샤리아에 기초한 초기의 이슬람 공동체(움마)를 건설하려 한다. 이 운동은 북부 아프리카, 인도 대륙, 인도네시아, 동아시아의 일부 나라들에 퍼져 있다. 그와 동시에 중동에 집중돼 있다. 그 이유를 찾아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알제리, 시리아, 파키스탄 등의 지배자들은 스스로 계급이나 신분 차별이 없는 신앙 공동체를 대표하는 독실한 무슬림이라고 주장한다. 그들 뒤에는 미국의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이 버티고 있다. 수백만 중동인들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무조건 지지하는 미국에 매우 격분한다. 대중의 극심한 고통만이 급진적 이슬람 운동이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그것은 또한 집단 행동을 통해 고통을 끝장낼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절망감을 반영한다. 한때 중동에도 거대한 대중 운동이 존재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국민적 반란의 물결이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끌어 냈다. 그러나, 중동의 지도자들은 재빨리 세계 체제와 평화적 관계를 수립했고, 급진적 사회 변화를 막기 위해 총부리를 대중에게로 돌렸다.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은 1960년대에 요르단과 레바논의 난민촌에서 성장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대중 투쟁이 벌어졌다. 팔레스타인의 투쟁이 이스라엘뿐 아니라 부패한 아랍 정권들을 위협하기 시작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전환점은 1970년 9월이었다(“검은 9월”). 요르단 군대가 수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했다. 조직 노동계급의 주도성 결여는 이런 운동들의 한계를 의미했다. 팔레스타인 전사들은 고립되기 시작했다. 일부는 절망에 빠져 안타깝게도 개인적 테러를 대안으로 여겼다. 민족주의 운동의 실패는 정치적 이슬람 운동의 전열 정비에 문을 열어 줬다. 1970년대에 정치적 이슬람 운동이 성장했다. 이 운동 가운데 일부는 대중적 성격을 띠기도 했다(예컨대 알제리). 그러나 그들이 정권을 마비시킬 수 있는 도시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쪽으로 선회하자 무지막지한 국가 탄압이 뒤따랐다. 중동 전역에 걸쳐 미국 제국주의와 부패한 정권들에 분개한 소규모 세력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으로부터 얼마간의 수동적 지지를 얻기도 했지만 대체로 대중으로부터 고립됐다. 이들은 노동 계급이나 농민이 아닌 사회 계층으로부터 충원됐다. 대체로 대학에 다니기는 했지만 교육이 어떤 전망도 제시해 주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 점령군과, 체첸에서 러시아 점령군과, 보스니아와 코소보에서 세르비아 군대와, 카슈미르에서 인도군과 싸우러 갔다. 서방은 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협하기 전까지는 완전히 눈 감아 버렸다. 테러 행동은 세계 체제가 보통의 중동인들에게 강요한 고통에 대한 분노의 표시였다. 동시에,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 대중 행동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의 반영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지배자들만이 아니라 노동자들에도 고통을 안겨 줬다. 더욱이 지배자들이 권력을 강화할 빌미를 제공했다. 테러리즘은 절망적인 방법이었다.

이슬람과 여성 억압

탈레반의 여성 억압 정책이나 아랍 여성들의 히잡(베일) 착용은 이슬람이 여성 억압적인 종교라는 점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서방의 자유주의자들은 종종 이슬람 근본주의가 여성 해방의 최대 위협 세력이라고 주장한다.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심지어 부시의 전쟁이 탈레반의 억압으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는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사실, 탈레반의 여성 정책은 종교의 논리적 결과라기보다는 탈레반이 등장했던 사회의 후진성과 내전의 충격을 반영한다. 여느 게릴라들과 마찬가지로, 탈레반은 전투 부대에서 여러 해를 보낸 남성들로 구성돼 있었다. 탈레반 지도자들은 탈레반 병사들이 전에 무자헤딘이 도시를 장악했을 때처럼 행동할까 봐 두려워했다. 무자헤딘은 여성 학대와 강간으로 악명 높았다. 그래서 탈레반 지도자들은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여성을 공공 생활로부터 완벽하게 격리했다. 물론 이것은 끔찍한 여성 억압이다. 아랍 여성의 히잡 착용도 여성 억압의 상징으로 지적된다. 1994년 프랑스 정부는 히잡을 착용한 이슬람 출신 여학생들의 등교를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인종 차별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파리의 북아프리카계 이주민 거주지에 수천 명의 경찰을 보내 히잡 착용 여학생들의 등교를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이슬람은 여느 종교와 마찬가지로 모호하고 모순돼 있다. 이런 모호함과 모순은 여성의 역할에도 반영된다. 이슬람은 여성이 억압당하는 세계에서 등장했고 여성 억압을 철폐하지 않고 완화하려 했다. 무함마드의 설교는 초기 기독교처럼 도시 여성들에게 일정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무함마드의 집단에 속해 있던 여성들의 남편들은 무함마드를 지독히 적대했다.) 무함마드는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전제하고 있었지만, 여성보다 ‘우월한’ 남성이 여성을 학대하지 말고 존중해야 한다고 설교했으며, 여성이 일정한 재산권을 지니는 것도 허용했다. 이 때문에 이슬람 지지자들은 꾸란이 중세 기독교보다 여성에게 더 많은 권리를 보장했다고 주장한다. 사실, 꾸란 자체는 여성의 베일 착용을 언급하지 않는다. 단지 여성은 “정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정숙”은 이슬람이 정복한 사회들에서는 베일 착용을 뜻했다. 그래서 많은 이슬람 사회는 공공 장소에서 여성들이 머리카락, 어깨, 상박을 드러내는 것(또는 남성들이 웃통을 벗는 것)을 마치 비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이 가슴을 노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여겼다. 이슬람 여성의 히잡 착용은 비잔틴 제국의 유행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머리 스카프를 두르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떠올려 보라.) 수많은 사람들이 처해 있는 끔찍한 조건 때문에 현대 세계에서 이슬람은 거대하게 부흥했다. 수백만의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중동의 여러 대도시 슬럼가에서 반(半)프롤레타리아로 생계를 연명하고 있다. 수백만의 교육받은 젊은이들은 안정적인 직업을 구할 가망이 없다. 그 때문에 이들은 정치적 이슬람의 모순된 메시지에 쉽게 이끌린다. 정치적 이슬람은 마치 현세에서 혁명적 변화를 보장해 줄 것처럼 보인다. 또, 부패한 관행을 없애고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강제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치적 이슬람은 과거에 대한 보수적 향수(“우리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포기했기 때문에 상황이 나빠졌다”)를 자극한다. 남성들만이 이런 메시지에 이끌리는 것은 아니다. 현대 도시의 삶이 가난과 성적 학대만을 강요한다고 믿는 수많은 여성들도 정치적 이슬람 운동에 매력을 느낀다. 이 여성들은 이슬람 법전이 육체의 상품화 압력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준다고 믿는다. 이슬람 법전이 특정 옷차림을 요구하고 아버지와 남편의 권위에 대한 존경을 강요하는데도 말이다. 왜냐하면 중동의 여성들은 이슬람 공동체가 섹스 샵과 은행들의 고리대금업이 성행하는 사회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부유한 여성이 서구 스타일의 옷을 입고 값비싼 화장을 하고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다른 한편에서 가난한 여성들이 자신의 아이들이 굶주림과 설사로 죽어 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사회보다는 이슬람 공동체가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슬람 부흥 운동은 이런 사람들에게 진정한 미래를 제공해 주지 못한다. 이슬람의 기록은, 역사적으로 보자면, 몇 가지 점에서 기독교보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장할 필요는 없다. 꾸란의 모호한 메시지로 회귀하는 것은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가능성 ―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없고 여성과 남성이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할 가능성 ― 을 실현하는 데 부적절하다.

맺음말

종교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수많은 대중이 겪고 있는 진정한 고통에 위안을 제공해 왔다. 그리고 때때로 그런 고통에 맞서 저항과 반란의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사회주의자 신부와 혁명가 신자들이 포함된 남미 해방 신학 운동은 이것의 뚜렷한 사례이다. 미국에서 기독교는 인종 차별주의에 대항한 흑인 저항 운동의 수단 노릇을 했다.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도 제국주의와 자국 지배자들의 억압에 대항하는 한 수단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모든 종교적 관념을 거부한다. 그러나 종교적 관념과 그 운동을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는 종교를 “진정한 고통의 표현이자 진정한 고통에 맞선 저항의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우리는 언제나 종교적 외피 속에 가려진 사회적 실재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억압자의 종교와 피억압자의 종교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피억압자들이 종교의 기치 아래 자신들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싸울 때 우리는 그 투쟁을 지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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