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반대, 전쟁반대, 신자유주의 반대 다음은 부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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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의 심장 워싱턴에서 부시와 이라크 점령에 대한 저항의 불길이 타올랐다. 미국의 주요 반전연합체인
이는 이라크 전쟁 개전 이후 최대 규모 워싱턴 시위이자 50만 명이 참가한 1969년 11월 베트남전 반대 시위 이후 최대 규모 워싱턴 시위였다.
워싱턴 항의시위의 대성공은 부시가 처해 있는 상황을 극적으로 반영한다. 시위의 초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신디 시핸이 불을 당긴 이라크 점령 반대 여론의 확산이었다. 신디 시핸은 그녀 뒤에 존재하고 있는 광범한 반전 여론의 상징이었다.
둘째 요소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비극적으로 보여 준 부시의 국내 정책에 대한 환멸이었다. 시위 대열은 구호와 팻말 등을 통해 이렇게 주장했다.
부시는 9
부시의 중요한 골칫거리는 반전운동과 국내 억압에 맞선 투쟁이 결합될 조짐이 있다는 점이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가져온 결과에 대한 분노를 반전운동은 효과적으로 결합시켰다. 베트남전 반대 운동도 흑인 억압에 맞선 투쟁과 결합되면서 폭발적인 상승 작용을 일으킬 수 있었다.
부시는 9월 26일 백악관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신디 시핸을 체포했다. 이것은 9월 24일 대규모 시위에 대한 부시의 대응이다. 그러나 부시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녀의 성공 뒤에는 광범한 반전여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부시의 핵심 동맹자 토니 블레어의 전쟁 노력에 반대하는 런던 시위도 성공적이었다. 전쟁저지연합과 영국무슬림연합과 핵무장반대운동
런던 행진은
런던 시위의 성공은 런던 폭탄 테러를 빌미로 한 시민적
세번째 규모의 파병국인 한국에서 벌어진 서울 시위도 성공적이었다. 파병 연장 쟁점이 본격화하지 않았고 조직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거의 1천 명이 집회에 참가해 시위 조직자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서울 행동은 부활하고 있는 국제 ― 특히 미국 ― 반전운동의 자신감을 서울 복판에서 보여 줄 수 있었고, 11월 18일 반부시 항의와 하반기 파병연장 반대투쟁 선포라는 핵심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던질 수 있었다.
다만, 민주노동당 의원 연설이 시위 전날 밤늦게 취소된 것은 아쉽다. 당 관계자는 쌀협상 비준안 통과 저지를 위한 국회 내 투쟁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시위 당일인 토요일에는 국회가 열리지 않았다.
설사 국회 관련 일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훨씬 더 중요한 쟁점인 제국주의 전쟁 반대 투쟁을 진보 정당 소속 의원들이 기피한 것은 본말전도이다.
또, 국회 안에서
설상가상으로, 의원단을 대리해 연설한 하연호 당 최고위원은 연설 중에
그 동안 대중적 반전 행동이 대부분 그랬듯이 반전 운동은 국제적 운동이고 그럼으로써만 성장할 수 있었다. 민족주의는 이런 효과를 반감시킨다.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하반기 반전운동의 첫발은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고 할 수 있다. 이 성과를 디딤돌 삼아 부시 방한 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