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펙에 개입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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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원 〈매일노동뉴스〉 국제담당 객원기자(이하 윤효원)는 “부산 APEC 회의, ‘거부’와 ‘반대’만 할 것인가”(〈매일노동뉴스〉 9월 20일치)에서 민주노총을 비롯한 한국 노동운동이 아펙을 비롯한 IMF, WTO, 세계은행 등을 전면 거부할 것이 아니라 개입하고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서 노동조합의 요구를 반영시켜 노동자들의 권익을 실현해 나간다”는 국제자유노련(ICFTU)의 입장을 우호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세계화 때문에 경제에 개입할 수 있는 국가가 약해지고 유럽연합이나 북미자유무역협정 같은 경제 블록화가 세계적 추세인 상황에서, 이런 기구들에 노동 의제를 포함시켜 세계화를 제어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거부하고 ‘IMF 해체와 WTO 반대’를 주장하는 것은 WTO조차 규제로 여기는 신자유주의 극단적 분파와 실천적으로 같은 입장에 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윤효원은 “사실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현행 방식의 세계화에는 문제가 많지만, 세계화 자체는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세계화를 거부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좀더 진보적인 것처럼 보이는 국가들에 의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노동당과 사회당이 집권하고 있는 뉴질랜드와 칠레의 국가 수반이 아펙에 참석하고, 현행의 미국이 주도하는 일방주의 국제질서에 비판적인 전통 강국 중국과 러시아의 국가 수반도 참석”하는 것은 아펙에 개입해야 할 이유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노동당·사회당 정부들인 뉴질랜드와 칠레도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를 추진하고 있고 중국이나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중국이나 러시아는 미국의 국제 정책에 반대를 표명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이해 관계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이들도 티벳과 체첸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국제적인 노동운동과 반자본주의 운동이 이들에 의지할 수는 없다.
윤효원은 다자간 협정이 “초강대국이나 힘의 우위를 가진 상대국의 일방주의를 제어할 수 있기 때문”에 빈국들에게 더 유리하고 따라서 이들 기구를 민주화시키는 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자간 협정이라는 틀이 강대국들의 일방주의를 자동적으로 제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아니다.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WTO 각료 회담에서는 개도국들이 강대국들에 저항했지만, 2001년 도하 회의에서 빈국들은 군소리 없이 강대국을 따랐다.
칸쿤 회의 때는 반 WTO 운동에 WTO가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개도국들이 저항할 수 있었지만, 도하 회의 때는 9·11 테러 이후 반자본주의 운동이 위축돼 있었기 때문에 개도국들도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개도국의 지배자들이 신자유주의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펙이나 WTO 등에 노동 기준을 포함시키려는 시도는 대부분의 다국적 기업이나 서방 국가들에 은폐물을 제공해 주는 것으로 이용될 수 있다.
아동 노동과 주당 60시간 이상의 혹사 노동,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강화 등에 반대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국제자유노련처럼 이를 WTO나 아펙 등에 포함시키려 한다면 이런 노동을 고용하지는 않지만 ‘노동 유연화’를 추진하는 대다수 기업들과 서방 국가들은 면죄부를 받게 된다.
또한 전 세계의 노동자·민중이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감수하면서 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체제의 근본적 문제는 회피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주로 제3세계 국가들의 노동조건을 비난하고 WTO가 이들에게 제재를 해야 한다는 국제자유노련의 입장은 “선진국 노동자들의 일자리 보호를 위한 또 다른 보호주의적 장벽”을 요구하는 것으로 “남·북반구 노동자들의 연대를 저해시키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한겨레〉 2003년 10월 23일치).
윤효원은 이러한 비판의 맥락을 알고 있음에도 “한국 경제가 세계 경제에서 발휘하는 영향력”을 고려할 때, 한국 노동운동이 국제자유노련과 같은 입장을 취하는 게 낫다고 말하고 있다. “세계화의 수혜”를 입어보자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기껏해야 제3세계에서 빈곤을 유지하는 대가로 자국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지키자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선진국 노동자들이나 한국 노동자들도 세계화로 전혀 이득을 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복지 삭감과 공공 서비스 민영화, ‘노동 유연화’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이런 대안보다는 기업 세계화에 근본으로 반대하면서 노동운동이 국제적으로 단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더 현실적인 방법이다.
아펙에 반대하는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활동이 더욱 확대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국제적인 운동에 커다란 자신감을 줄 것이다.
물론 WTO나 아펙에 반대하는 것만이 완전한 대안은 아니다. 이것은 세계화에서 비롯한 다양한 참상들을 일시적으로 저지시킬 뿐이다.
그러나 이 운동이 더욱 크게 성장해 WTO나 IMF, 세계은행, 아펙 등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다면 이를 바탕으로 전 세계에서 빈곤과 억압, 전쟁을 낳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화가 아닌 ‘다른 세계’를 건설하는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노총의 아펙 참가 결정 유감
“아펙도 노동을 배제하고 자본의 입장에서 신자유주의적 방향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말한 한국노총이 이번 부산 아펙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2003년 칸쿤 투쟁 때 “미국·유럽연합쪽 노조가 주도하는 국제자유노련의 [국제 기구 개입] 주장은 자국 노동자들의 일자리 보전만을 염두에 둔 것”(강충호 국제국장)이라고 비판했던 한국노총이, 이번 아펙에서는 국제자유노련이 주최하는 ‘아시아태평양노동네트워크(APLN)’를 주관하기로 결정했다. 중요한 동원을 앞두고 한국노총 지도부가 초를 친 셈이다.
한국노총은 하반기 비정규 보호입법 쟁취와 노사관계 제도 재편 일방적 추진 저지를 위해 민주노총과 함께 투쟁하며 총파업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또, “노동부 장관 퇴진 없는 노정 대화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노사정위원회와 노동위원회에서 탈퇴했고, ILO 아태지역총회 불참 선언까지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아펙에 참여하는 것은 정부에 힘을 실어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민주노총이 한국노총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아펙 반대 투쟁을 계속하기로 한 결정은 완전히 올바른 것이다. 더 나아가, 민주노총이 한국노총 지도부의 투쟁 회피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운동의 좌파적 단결에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