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X파일에 대한 조직 좌파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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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다함께〉 63호는 삼성 X파일을 둘러싼 지배자들의 위기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고, 삼성에 항의하는 운동도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국정감사에서 이건희 증인 채택 여부를 둘러싼 공방이 계속되고 있고, 민주노동당은 10월 초에 다시 삼성 X파일 관련 집중집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그리고 지배자들 사이의 분열과 쟁투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다른 뇌관을 건드려 다시금 대중의 분노를 자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그 잠재력이 충분히 발휘되기 좋은 조건인 것만은 아니다. 바로 최근 운동이 보였던 여러 약점들 때문이다.
〈다함께〉 는 최근 두 호에 걸쳐 주요 시민단체들이 주도하는 ‘X파일공대위’의 정당 배제 방침을 비판했다. 정당 배제는 X파일 사건에 열의가 있는 민주노동당 배제를 사실상 뜻했다. 분명 이는 운동이 더 전진하는 것을 가로막은 중요한 약점이었다.
그러나 조직 좌파 자신이 이 운동에 불참한 것도 커다란 문제였다. 지난 두 달 간 삼성 X파일 관련 집회만 해도 거의 매주 열리다시피 했지만, 조직 좌파들은 이 운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주체주의자들은 기성정치 내의 개혁파와 제휴하는 민중전선 정치 때문에 X파일의 폭로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X파일 테이프에는 이회창뿐 아니라, 6·15 공동선언의 당사자인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의 인사들도 이건희 게이트에 연루돼 있다는 것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청학련 남측본부는 8월 27일 발표한 글에서 “X파일 사건은 미국에 의해 짜여진 각본”이라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미국의 최종 목표는 민주당도 한나라당도 아닌 뉴 라이트[신우익]를 통한 “새로운 친미보수세력의 정권탈환에 있다”면서 보수 정치권 내의 지각 변동 가능성에 억지로 끼워맞추고 있다.
이러한 분석은 또한 제국주의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다. 거의 언제나 주체주의자들은 남한 정치가 친미보수 세력을 후원하는 미국 지배자들의 각본대로 진행되는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남한 지배계급은 미국의 막대한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나름의 독자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고 또한 비교적 독자적으로 경쟁한다.
묻혀져 가던 ‘X파일’이 폭로되는 과정은 의도치 않게 남한 언론사들 사이의 경쟁이 한몫 했다. 도청테이프는 지배계급 내의 일부가 다른 지배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리고 폭로 과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체적 진실이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삼성과 같은 재벌이 기성정치권 전체와 더럽게 유착해 있다는 진실은 변함 없다. 주체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미국의 음모로 규정하다 보니 기피할 수밖에 없었고, 미군철수운동과 통일운동을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식으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데 급급했다.
한편, PD 전통의 단체들은 X파일 논란을 단순히 지배자들 사이의 쟁투 또는 특정 분파에 속한 지배자들의 책략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회진보연대는 《사회운동》 9월호에서 X파일 논란이 “부패한 구세력과 ‘개혁세력’ 간 대결구도의 재현”이라고 분석했다. 그와 동시에, 이번 논란을 인민주의(포퓰리즘)적인 노무현 정부가 구세력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분석에는 X파일 논란이 한나라당에게는 불리하고 노무현과 열우당에게는 유리한 쟁점이라는 그릇된 가정이 깔려 있다.
그러나 X파일에 담긴 진실은 삼성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켰고, 한나라당과 김대중에 이어 그 계승자인 노무현 정부까지 포함하는 기성정치권 전반을 위협하고 있다. 이 때문에 노무현 자신이 앞장서서 1997년 대선자금 수사에 반대했고, X파일의 본질이 도청 문제라며 검찰수사를 방향지웠던 것이다.
PD 전통 단체들의 이 같은 관점은 지난해 탄핵정국 때와 마찬가지로 계급 세력 관계를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비롯한 것이다. 그들은, 계급투쟁은 지배계급이 노동계급을 공격하기 위해 단결할 때만 발생한다고 이해하는 듯하다.
“지배세력의 가장 큰 비리와 부정은 노동자 민중의 저항을 탄압하고 체제 위기의 비용을 전가하면서 그/녀들의 희생을 이끌어내는 데 일치단결하며 폭력과 기만을 활용한 자본-국가의 ‘합법적’ 결탁이 아닌가?”(《사회운동》 9월호)
이런 관점은 진정한 논점의 회피일 뿐 아니라, 더 치명적인 것은 지배자들 자신의 분열이 계급투쟁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배자들의 분열은 종종 의도치 않게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고, 이것이 대중의 분노와 투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PD 전통의 이 같은 관점으로는 정세가 비관적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또한 종종 현실에 존재하는 운동에 대해 회피적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안티삼성 운동이 한창일 때 사회진보연대와 자매단체 격인 전국학생연대회의는 그 운동을 폄하하며 소규모 비정규직 작업장 연대 활동에 주력했다.
결국 주체주의 경향이든 PD 경향이든 중요한 계급투쟁 쟁점을 회피한 채 각개 약진하느라, 그 어느 운동 하나 제대로 된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기성 정치권의 위기가 심화하고 있는 요즘, 조직 좌파가 이와 같은 정치적 오류를 반복한다면 운동은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들을 놓치게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