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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선과 불의에 대한 통렬한 고발

정병선
《보통 사람들을 위한 제국 가이드》 역자

영국의 정치 평론지 《프로스펙트》가 창간 10주년을 기념해 최근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노움 촘스키가 “이 시대 최고의 지성”으로 선정됐다. 한편 독자들이 직접 써 넣은 지성인 3위로는 아룬다티 로이가 뽑혔다.

아룬다티 로이는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책으로 1997년 부커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도 여성 작가이다. 부커상은 매년 영연방 국가에서 영어로 쓰인 소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을 선정해 주는 문학상이다. 아름다운 소설 《작은 것들의 신》과 작가 아룬다티 로이를 낳은 인도는 어떤 나라일까? 로이의 신작 《보통 사람들을 위한 제국 가이드》(시울)를 통해 그녀의 조국, 인도의 실상을 읽을 수 있다.

라자스탄 주의 포크란에서는 1998년에 핵 실험이 실시됐다. 카슈미르에서는 1989년 이후 무슬림 약 8만 명이 인도 보안군에게 살해당했다. 구자라트 주에서는 2002년에 약 2천 명 이상의 무슬림이 살해당하고, 윤간당하고, 산 채로 불태워졌으며, 주민 15만 명이 고향에서 쫓겨났다. 인도는 1999년 카길에서 파키스탄과 전쟁을 벌였다. 지난 50년 동안 인도에서는 대형 댐 건설로 3천3백만 명 이상이 강제 이주 당했다.

로이는 인도가 세계 최대의 민주 정체 국가가 아니라 바나나 공화국 수준으로 전락했음에 분노한다. 그녀는 인도가 비동맹 노선이라는 자랑스런 전통을 포기하고 미국과 “완벽한” 동맹을 맺으면서 국가의 적법성을 훼손하지 않고서도 억압적인 정권으로 변모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와 다수결주의, 파시즘의 경계가 아무 거리낌 없이 지워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인도의 시장이 활짝 열려 있고, 다국적 기업들이 마음대로 활개칠 수만 있다면 제국 기계 미국에게는 인도의 불의와 빈곤이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지만 악의 축의 정회원 국가이자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인 이라크 정권은 다르다. 침략당하고, 폭격당하고, 포위당하고, 위협당하고, 주권을 빼앗기고, 어린이들이 암으로 죽고, 국민이 노상에서 폭살당해도 싸다. 테러와의 전쟁이 실제로는 테러와 무관하고, 이라크 전쟁도 석유 때문만은 아니라는 게 명백해진다. 그것은 한 초강대국의 패권, 완전한 지배, 세계적 헤게모니를 향한 자기파괴적 충동이다. 아르헨티나와 이라크 민중 모두가 동일한 과정에 의해 살육됐다. 사용된 무기가 다를 뿐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IMF의 수표장이었고, 이라크에서는 크루즈 미사일이었다.

2003년 2월 15일은 대중의 도덕심이 비상하게 발휘된 날이다. 수백만 명이 전 세계 수백 개의 도시에서 가두로 진출해 이라크 침략에 항의했다. 현재의 여론조사 결과는 미국민의 54퍼센트가 부시의 이라크 침공이 잘못됐다고 믿고 있음을 보여 준다. 2003년 3월에는 그 수치가 24퍼센트였다. 그녀는 민족주의 및 애국주의 선동을 비난하고, 자국 정부에 반대해 온 수천의 대중에게 찬사를 바친다. 특히 그녀는 미국의 시민들을 칭송한다. 미국 시민들은, “무자비한 선전에도 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정부에 맞서 싸우고 있다. 미국을 뒤흔드는 극단적 애국주의 열풍 속에서 그것은 해방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이라크·아프가니스탄·팔레스타인 인들만큼이나 용감한 행위이다.”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전쟁이 결합돼 있음을 깨달아 가고 있다. 《보통 사람들을 위한 제국 가이드》는 이 책의 제목으로 손색이 없다. 로이가 지배 계급의 위선과 불의를 폭로하고 분쇄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 책에 실린 모든 논설이 보통 사람들이 제국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동시에 제국을 저지할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지성에 노움 촘스키와 아룬다티 로이가 뽑혔다는 사실은 우리가 여전히 행동하는 비판적 지식인을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촘스키는 “이 책에 담겨 있는 로이의 완벽한 설득과 날카로운 분석은 다시 한 번 귀담아 들어야 할 경이이자 기쁨”이라고 썼다.

기업이 주도하는 세계화 프로젝트에 독자적으로 맞설 수 있는 개별 국가는 없다.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와 맞닥뜨리자 우리 시대의 영웅들이 갑자기 왜소해지는 것을 우리는 거듭거듭 목격했다. 비범하고 카리스마적인 저항 운동의 거인들이 권력을 잡고 국가의 수반이 되더니 무기력해져 버렸다.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 말이다. 룰라는 2003년 세계사회포럼의 영웅이었다. 이제 그는 IMF의 정책을 실시하고, 연금 혜택을 축소하고, 노동자당에서 급진파를 쫓아내느라고 바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는 사유화 계획과 구조조정 정책을 밀어붙였다. 수백만 명이 집을 빼앗겼고, 일자리를 잃었고, 수도와 전기가 끊겼다.

배신감에 가슴을 치면서 후회해 봐야 소용 없다. 룰라와 만델라는 어느 모로 보나 걸출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야당 세력에서 정부를 책임지는 위치로 변신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은 다양한 위협에 포박당하고 만다. 이 가운데서 가장 사악한 것이 자본을 빼 가겠다는 위협이다. 이 위협 하나면 어떤 정부라도 간단히 제압할 수 있는 것이다. 지도자의 개인적 카리스마와 투쟁 경력이 기업 카르텔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이나, 그 문제에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순진한 태도다. 급진적 변화는 정부들끼리 협상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민중만이 급진적 변화를 강제할 수 있다.

2003년 9월 10∼14일에 멕시코의 휴양 도시 칸쿤에서 열린 제5차 WTO 각료회담은 좌절됐다. 우리는 그것이 수많은 나라에서 수백만의 대중이 여러 해 동안 줄기차게 투쟁해 온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다. 칸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실질적 타격을 가하고 급진적 변화를 강제하려면 각 지역의 저항 운동 세력들이 국제적 연대를 건설하는 게 사활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칸쿤에서 우리는 저항을 세계화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다. 부산에서 열리는 아펙 회의에 맞서 싸우는 활동가들에게 로이의 호소는 소중한 지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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