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로버츠 논평:
이윤율과 이윤량 대립시키는 데이비드 하비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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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마르크스의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을 받아들이지 않아 왔다. 최근 하비는 이윤율이 떨어져도 이윤량은 늘어날 수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며 이윤율과 이윤량을 대립시키고 후자를 더 중시하는 관점을 제시해 왔다. 최근 국내에 번역·출간된 《자본주의는 당연하지 않다》의 한 장에도 이와 관련된 논의가 담겨 있다.
다음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마이클 로버츠가 8월 25일 자신의 블로그에 발표한 글로, 이에 관한 논쟁을 소개하고 하비의 주장을 반박한다.
데이비드 하비 교수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일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하비와 나는 마르크스의 가치법칙과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에 관해 토론하고 논쟁해 왔다. 하비는 자본주의에서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생산·투자 위기를 설명하는 데에서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이 갖는 의미에 관해 언제나 회의적이었다. 하비는 다른 설명을 선호했다. 나는 여기에 반대해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의 타당성을 옹호하고 그 법칙이 경제 위기의 궁극적 원인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 글에서는 이 논쟁을 다룬다. 투란 사바샤트가 편집한 빼어난 책 《금융 멜트다운》[국내 미번역], 특히 위기와 이윤율을 다룬 2부에서도 이 논쟁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최근 하비는 친절하게도 《뉴 레프트 리뷰》 7~8월호에 실릴 글을 내게 미리 보내 줬다. “비율과 양”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글에서 하비는 위기를 분석하는 데에서 이윤율보다 이윤량을 중시해야 하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한다. 한 대목에서 하비는 이렇게 말한다. “양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은 주류 논평가들만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도 양의 중요성을 간과해 온 오랜 역사가 있다. 이윤율 저하 경향에 관한 연구에서 특히 그렇다.” 그 후 하비는 내 책 《장기불황》(연암서가, 2017)을 언급하며 이렇게 논평한다. “이윤율 저하 경향에 관한 마이클 로버츠의 연구는 증대하는 양의 중요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글쎄, 내 책 26쪽[이하 모든 쪽수는 영문판 쪽수다]을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자본 축적과 이윤율(그다음에는 자본 축적과 이윤량) 사이에 존재하는 근저의 모순은 위기로 해결된다.”[강조는 로버츠] 다음 쪽에는 나는 이렇게 썼다. “매 위기 때마다 ⋯ 이윤량의 하락은 경기 침체로 이어지거나 경기 침체와 함께 벌어졌다.” 실로 나는 그 부분에서 여러 쪽을 할애해 호황기와 침체기에 이윤량이 하는 구실을 개괄하고 문헌들을 인용했다.
무엇이 쟁점인가?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에서 그 쟁점을 제시한다. “전반적인 이윤율이 크게 하락해도 ⋯ 자본이 고용한 노동자들의 수, 즉 자본이 가동하는 노동의 절대량, 따라서 자본이 흡수하고 가져가는 잉여노동의 절대량, 따라서 거기서 생산되는 잉여가치의 양, 따라서 거기에서 생산되는 이윤량의 절대적 크기는 늘어날 수 있고, 이윤율이 점진적으로 하락할 때에도 점진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이어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쓴다. “이것은 가능한 일일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 [같은 법칙이 — 마이클 로버츠] 사회적 자본이 가져가는 절대적 이윤량의 증대와 이윤율의 하락을 동시에 일으킨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이렇게 묻는다. “그렇다면 같은 원인에서 비롯한 절대적 이윤량의 증대와 결합된 이 양면적인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은 어떤 형태로 제시돼야 하는가?”
마르크스 자신이 설명하듯이 이윤율 저하 경향 법칙은 양면적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이윤율이 떨어지는 동시에 이윤량이 증대하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한 일이고 가능성이 높은 일이다. 산술적으로 봐도, 비율이 떨어져도 양은 늘 수 있다. 그러나 양면적인 법칙은 양면적으로 작용한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3권 13장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두 운동은 나란히 진행될 뿐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하며 같은 법칙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 추가적인 자본이 자본주의적 생산 목적에 더는 동원될 수 없을 때 자본의 절대적 과잉생산이 있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증대된 자본이 그러기 전과 똑같거나 그보다 더 적은 잉여가치를 만들어낼 때, 즉 ΔC만큼 늘어난 자본 C+ΔC가 그러기 전의 자본 C보다 이윤을 더 많이 생산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적은 이윤을 생산할 때 자본의 절대적 과잉생산이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윤율이 떨어져도 이윤량이 늘어날 수 있고 늘어날 테지만, 이윤율이 떨어지면 결국에는 이윤량도 떨어져서 ‘절대적 과잉축적’에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이 지점이 바로 위기가 터지는 임계점이 된다.
그럼에도 하비는 마르크스가 위기를 분석하는 데에서 이윤율보다 이윤량을 언제나 중시했다고 주장하려 한다. 그러나 위 인용은 마르크스가 이윤량과 이윤율이 통합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봤음을 보여 준다. 위기는 이윤량이 떨어져서 과잉 투자와 과잉생산이 벌어질 때 촉발된다. 그러나 이것은 이윤량을 줄일 만큼 이윤율이 떨어질 때 벌어지는 일이다.
양면적 법칙
얼마 전[7월 말] 뉴욕에서 열린 “반자본주의 연대기”[최근 국내에 번역·출간된 《자본주의는 당연하지 않다》의 원제목이다]라는 제목의 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한 하비는 중국과 제국주의, 위기에 관한 그의 최신 견해를 청중에게 설명했다. 그러다가 하비는 특별히 나를 지목하며 ‘이윤율’ 이론가들을 비판했다. 하비는 마르크스의 이윤율 법칙과 대결하는 폴 스위지와 바란의 ‘초과이윤론’을 지지하며, 마이클 로버츠가 언제나 이윤율 저하 경향에 집착한다고 하면서 이런 농담을 했다. “이윤율이 1850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면 지금은 진작에 0이 됐어야 했다!”
재미있는 농담이지만, 이윤율 저하에 관한 내 글들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세계 자본주의의 이윤율은 0으로 떨어지지 않았고 한참 후에도 그러지 않을 것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하락해 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 책에서 설명했듯,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이윤율 저하 경향을 상쇄하는 요인들이 있다. 이 상쇄 경향은 이윤율을 한 시기나 심지어는 몇십 년 동안 끌어올릴 수 있다. 예컨대, 1980년대 초에서 20세기 말까지 바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이윤율이 등락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자본주의의 주기적인 경기 침체로 인해 자본 가치가 절하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회사들이 파산하고, 고정 자산이 손실 처리되고, 노동자들이 해고된다. 이것은 여러 해 동안 이윤율을 끌어올릴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이윤율의 순환이 발생한다. 《장기불황》에서도 이를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이처럼 이윤율은 0으로 직행하지 않는다. 하비가 나를 비웃으려고 한 농담과 같은 일은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는 것이다. 아래 그래프를 보면 이 과정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알 수 있다. 지금 시점부터 이윤율이 꾸준히 떨어지기만 한다 해도 2060년쯤이 되기 전까지는 0에 도달하지 않을 것이며, 실제로는 그 시점이 돼도 앞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이윤율은 0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프를 보면 이윤율이 오르는 시기가 여럿 있다. 특히 세계 대전이나 오랜 경기 침체가 지난 후에 그렇다.
하비가 토론회에서 발표하기를, 하비는 언젠가 내게 왜 이윤량에 관해 얘기하지 않냐고 직접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자 내가 “아냐, 말했어. 그런데 사실 중요하지 않은 문제야” 하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 기억은 다르다. 사실 그 대화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뤄졌다. 그 대화는 2019년 런던에서 열린 ‘히스토리컬 머티리얼리즘’ 컨퍼런스의 전체 토론회에서 청중 200여 명을 앞에 두고 나눈 것이었다. 그때도 하비는 이번에 《뉴 레프트 리뷰》에 발표한 것과 같은 주장을 담은 글을 내게 미리 보내 줬었다. 당시 논쟁을 나는 블로그에 꼼꼼하게 (내 생각에는 정확하게) 기록해 뒀다. 그 글을 꼼꼼히 읽어 본다면 하비의 ‘반론’과 나의 대답이 이번에 하비가 뉴욕 토론회에서 묘사한 것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이렇게 답했다. “실제로 우리, 이윤율 저하 경향의 ‘광팬’들은 [이윤율과 이윤량에 관한 — 마이클 로버츠] 마르크스의 양면적 법칙에 관해 잘 알고 있다.” 당시 전체 토론회에서 나는 그 법칙을 개괄하고, ‘이윤율’에 관한 여러 이론가들의 연구를 인용했다. 그중 하나는 헨리크 그로스만이었다. 그로스만은 마르크스의 양면적 법칙을 이용해 위기를 설명했다. 이윤율 저하가 이윤량의 증대를 둔화시켜서, 결국 생산에 계속 투자하고 생활에 필요한 몫을 챙겨 갈 만큼 잉여가 충분치 않게 돼 붕괴가 찾아 온다는 것은, 사실 그로스만의 이론 전체의 바탕이 되는 기본 주장이다.
나는 위기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윤율과 이윤량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 주는 온갖 경험적 증거들을 제시했다. 예컨대 나와 굴리엘모 카르케디가 공동 편집한 《위기에 빠진 세계》[국내 미번역]에 수록된 드렉셀대학교 부교수 호세 타피아의 연구를 인용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양면적 법칙에 기반한 모델을 신중하게 제시하고 이것을 실제 미국 경제 데이터에 적용해서 2008~2009년 대불황과 그 법칙의 연관성을 보였다.
무엇이 위기를 잘 설명하는가?
그러나 당시 누가 뭐라고 했냐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무엇이 자본주의에서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위기의 원인을 가장 잘 설명하는가? 당시 논쟁을 기록한 글에서 나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하비 교수는 마르크스가 제시한 이윤율 법칙의 구실과, 경제 위기와 그 법칙의 연관성을 축소하려는 듯하다. 내가 보기에 하비가 양면적 법칙을 꺼내든 것은 이윤량이나 자본 스톡[자본의 양], GDP(국내총생산)가 중요하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윤율의 저하로 이윤이 불충분해지는 게 아니라 이윤량의 증대로 잉여가 지나치게 많아진다는 것이 된다. 이에 따르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어떻게 흡수하고 처리할 것이냐가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소비자들의 소비 능력에 비해 자본이나 이윤이 너무 많아서 위기가 생긴다는 하비의 견해와 맞닿아 있다. 실제로 하비는 이윤과 투자의 수준과 비율이 아니라 소비 의욕과 소비 수준이 위기를 촉발하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예전에 보였듯이 그에 관한 증거는 하비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강조는 로버츠]
내가 블로그에 올려 온 글을 읽어 온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논쟁에서 하비는 마르크스의 이윤율 법칙을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보기를 거부한다. 그 대신 하비는 자신이 “원인의 다양성”이라고 일컫는 것을 선호한다. 하비는 마르크스의 이윤율 법칙에 초점을 두는 사람들을 ‘단일 원인론자’로 규정한다. 그러나 하비는 이윤율 저하 경향의 경험적 증거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비는 이윤율에서 이윤량으로 골대를 옮겼다. 그러나 골대를 옮긴다고 골이 안 들어가는 게 아니다.
마르크스의 양면적 법칙은 위기의 근본 원인이 이윤율 법칙임을 반박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통합적으로 연결돼 있다. 반면, 이윤율 법칙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과소소비론, ‘너무 많아서 흡수하지 못하는 잉여’, 불균형, 금융 불안정성 등) ‘다양한’ 원인론은 설득력 없고 입증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