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 연세대에서 활동하며 느꼈던 故 배은심 어머님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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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말 시작된 박근혜 퇴진 촛불 운동 때, 배은심 어머님은 광화문 광장에서 발언을 하셨다. 당시에 어머님은 이미 70대 중반이셨는데, 쩌렁쩌렁한 기운으로 광화문 광장을 뒤흔드셔서 정말 경이롭다고 느꼈던 기억이 있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의 그 발언처럼, 1987년 6월 9일 이한열 열사의 피격 이후 어머님은 30년 넘게 여러 투쟁 현장들과 항쟁들에 함께해 오셨다. 한 인터뷰에서 말씀하시길, 어머님은 당신의 아들이 왜 그렇게 맨 앞에 나가서 싸웠을까 이유를 찾아야 했다.
아마도 어머님께서는 아들이 차마 다 이루지 못했던 대의를 본인이 이어가고자 하신 것이리라.
“이 많은 청년들이 네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줄 거야. 안 되면 엄마가 갚을란다.
(...) 한아, 가자, 우리 광주로 가자!”
(1987년 7월 9일 故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에서)
故 이한열 열사와 故 배은심 어머님 모두 광주 사람이다.
여러 사람들이 어머님의 말씀과 지지, 연대로부터 많은 힘을 받았다. 배은심 어머님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유가족들을 직접 찾아가 해 주신 말씀이었다. 똑같이 자식을 잃은 부모로서, 먼저 겪어 보니 강해져야 하더라는 메시지였다.
배은심 어머님은 2007년부터 민주노조를 조직해 투쟁해 온 연세대 청소·경비노동자들에게도 처음부터 줄곧 연대해 오셨다.
기억
이한열 열사를 ‘학생들이 잊은 것 아니냐’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내가 만났던 학생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세상이 많이 각박해졌다지만, 연세대라는 대학에 들어와서 자신이 이한열 열사의 후배가 되었다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친구들은 늘 존재했다.
촛불 운동이 있은 후에 신입생 수련회에 갔던 나는, 알딸딸하게 취한 신입생 후배들이 영화 〈1987〉의 엔딩 크레딧 OST인 ‘가리워진 길’(유재하 원곡)을 같이 부르자고 해서 함께 부른 적이 있다. 그 후배들은 나중에 학내 청소·경비노동자들이 학교 본관을 점거하며 투쟁할 때,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괴로워하던 나에게 “형, 포기하지 마세요” 하고 응원해 주었다.
이한열 열사가 활동했던 동아리 ‘만화사랑’에 가입한 한 후배는 동아리에 보관된 이한열 열사와 당시 선배들의 기록들을 탐독하면서, ‘혁이 형’(이한열 열사의 애칭이었다고 한다)의 치열했던 활동을 동경했었다.
만화사랑 동아리의 30년 후배가 알게 되었다는 ‘혁이 형’은 축제 주점에서 번 수익을 철거민들을 위해 쓰자고 하던 따뜻한 사람이었고, (시위에서 피격된) 그날 아침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도 자신이 맡기로 한 사수대 역할을 끝까지 책임지려 한 심지 굳은 사람이었다.
한 투사의 죽음에 관한 기억은 곧 항쟁에 관한 기억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기억은 한 학교, 한 나라 사람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2019년 홍콩에서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규모 항쟁을 벌였을 때 이들은 30여 년 전 한국의 민주항쟁 역사에서 희망을 찾았고, 한국의 많은 대학생들은 ‘홍콩의 이한열들’에게 지지와 연대를 보냈다. 내가 이 때 만난 홍콩 학생들 중에는 자신들이 한국에서 공부한 한국 민주 항쟁의 역사를 번역해서 홍콩 현지의 친구들에게 보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영화 〈1987〉을 본 홍콩 대학생들은 모두 이한열이란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홍콩 항쟁 지지 활동을 하던 나는 어머님께 지지 메세지를 부탁드렸고, 어머님께서는 홍콩의 투사들에게 몇 마디 해 주시기도 했다. 당신의 아들처럼 홍콩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학생들에게, 다치지 말고 승리하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이 메시지는 곧 당시 홍콩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언론사 〈빈과일보〉(2022년 현재 폐간됨)에 실리며, 홍콩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어머님의 말씀이 언론에 나간 이후, 어머님께서는 내게 전화하여 ‘왜 언론에 마음대로 말을 전하느냐’고 화를 내시기도 했다. 어머님께 부탁을 드릴 때 언론에 전해도 괜찮겠느냐 동의를 구하긴 했지만, 어머님께서는 생각보다 많은 언론들에 기사가 난 것이 부담스러우셨던 게 아닐까 싶다. 아마도 어머님의 말씀을 듣고 힘을 받은 사람들이 열심히 싸우다가 혹여나 당신 아들처럼 다치진 않을까 하는 속 깊은 걱정도 있으셨으리라.
어머님께서 한 번 찾아오라고 하신 뒤로 2년 넘게 미루기만 해 왔다, 최근에서야 ‘이제는 찾아뵈어야지’ 하는데 돌아가셨단 말을 듣게 되었다.
어머님께서는 너무 일찍 떠나버린 아들을 생각하여, 다른 자제분들이 결혼하고 손주를 낳아도 가족 사진을 집에 하나도 걸지 않았다고 한다. 고(故) 전태일 열사와 그 모친인 고(故) 이소선 어머님이 그랬듯, 고(故) 이한열 열사와 고(故) 배은심 어머님께서도 지금껏 수많은 투사들을 키워 오신 것 같다. 치열한 삶을 살아 오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신 고(故) 배은심 어머님의 영면에 명복을 빌며, 조사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