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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도 필요하다는 것으로 탈성장론이 반박될까?

이번 호에 실린 장호종의 ‘탈성장, 기후 위기의 대안인가’ 기사는 흥미로웠다. 탈성장론자들 중에서 체제 문제에 전보다 더 주목하는 이들이 부상한다고 소개한 대목과, 그럼에도 탈성장론이 노동계급의 중요성을 놓치고 있다는 비판에 특히 동의가 됐다.

다만 내가 이견을 갖는 대목도 있다. 탈성장이 대안 사회 운영 원리가 될 수 없다고 비판하는 논거로 성장과 탈성장 모두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거로는 가장 냉혹하고 근본생태주의적인 일부 탈성론자들만 겨냥하고 나머지는 놓치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많은 탈성장론자들(어쩌면 다수)은 재생에너지와 복지 등의 분야에서 성장이 필요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2020년 60개국 1000여 명이 참여한 탈성장 네트워크의 공개서한은 “화석연료 생산, 군수 및 광고와 같은 경제의 일부 부문은 가능한 한 빠르게 단계적으로 폐지되어야 하지만, 보건의료, 교육, 재생가능에너지, 생태농업과 같은 다른 부문들은 육성되어야 한다”는 것을 첫째 테제로 제시하고 있다. (국내에는 2020년 5월 ‘다른 백년’ 웹사이트에 소개됐다.)

한편, 장호종은 탈성장론자 중에도 성장과 탈성장 모두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히켈)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자신들의 입장을 “탈성장”이라 뭉뚱그려 부르는 문제가 있고 이는 근본 생태주의자들의 가정을 공유하는 듯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이 “탈성장”이라는 명칭을 고수하는 것이 근본 생태주의적 생각 때문일까? 나는 그보다는 성장에 대한 지배자들의 집착에 대한 즉자적 반발의 성격이 더 강하다고 본다. 탈성장론자들 중 근본 생태주의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이들(요르고스 칼리스, 고헤이 사이토)의 청중이 많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또한 장호종은 “막연하게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자연의 ‘절대량’에 고정된 한계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근본 생태주의적 사고로 꼽는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인 마틴 엠슨이 쓴 소책자 〈반자본주의 생태학〉에서도 자연의 고정된 한계를 상정한다.(‘재생가능한 자원의 이용률을 재생 속도 이하로 낮춰야 한다, 재생불능 자원의 이용률은 지속가능한 대안재 개발 속도를 넘어설 수 없다, 오염과 서식지 파괴는 자정 능력을 초과해선 안 된다’) 더욱이, IPCC의 보수적 전망으로도 인류가 그 한계를 넘기까지 얼마 안 남았다고 해서 위기감이 큰 지금, 고정된 한계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진정한 변별점은 자연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생산관계를 바꾸면 그 한계 안에서도 얼마든지 풍요로울 수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탈성장론자들은 생산관계가 문제임을 보지 못하거나, 그 문제를 인식하는 일부 좌파적 탈성장론자들조차 이를 전략 문제와 연결시키지 못한다.(그 점에서 후자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