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WTO 시위는 홍콩에 무엇을 남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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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욱 기자가 반WTO 시위가 홍콩 대중의 의식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다. 홍콩 반WTO 시위에 참가한
홍콩 WTO 각료회담 개막식 날 한 OECD 소속 경제학자는
여기에는 홍콩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홍콩인들이 한 경험이 깔려 있다.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홍콩 자본주의가 계속 자유개방 자본주의 모델을 따르지는 않았다. 특히, 1966∼67년 식민 통치와 빈곤에 맞선 까오룽반도 대소요 이후 홍콩 영국 총독부는 국가자본주의적 발전 방식을 채택했다.
이후에도 홍콩은 복지국가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주거
그러나 두 번의 변화가 홍콩 노동자들의 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1990년대 초 홍콩 자본가들이 제조업 공장을 중국 본토로 옮기면서 불과 몇 년 만에 홍콩 제조업 인구가 90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급격히 줄어든 것이었다.
두 번째는 1997년 동아시아 경제 위기였다. 1998년 홍콩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 그 후로 주거
홍콩노총 교육선전국장인 멍시우탓은 노동자들의 의식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후 홍콩 실업률이 6퍼센트 아래로 떨어진 적은 드물다. 홍콩 신문에는 방과후 폐지를 팔아 학비를 마련하는 10대 소년 얘기 등 빈곤층에 대한 기사가 자주 등장했다.
오늘날 홍콩은 인도보다 훨씬 빈부격차가 심하며, 25만 명에 달하는 필리핀 이주노동자와 소수의 중국 이주노동자를 포함해 차별받는 다양한 노동계급이 존재하는 사회다.
이번 시위에 대한 홍콩인들의 반응은 이런 경험이 운동으로 일반화할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홍콩인들의 반응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런 사회적 변화뿐 아니라 정치적 맥락도 볼 필요가 있다. 흔히 홍콩은 비정치적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몇몇 중요한 경험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1989년 천안문 항쟁이었다. 천안문 광장 진압 반대 캠페인 속에서 다수의 홍콩인들은 정치적 각성을 경험했다. 하루에 무려 1백20만 명이 모인 적도 있다.
다른 하나는 2003년 이후 시작된 민주적 권리 쟁취 운동이다. 처음에 이 운동은 중국 정부가 강요한 테러방지법
그러나 곧 중국 정부에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는 적극적 운동으로 변했다. 2004년 7월에 무려 50만 명이 모였고, 2005년 12월 4일에도 25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이 운동은 아직까지 철저하게 자유주의 부르주아들
〈다함께〉 기자가 만난 많은 홍콩 사람들은
또, 소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러나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보통
문제는 아주 오랫동안 그런 쟁점으로 싸운 대중 운동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었다. 따라서 체제에 문제의식을 가진 선진적인 사람들은 고립감을 느낀 채 살아 왔다.
불행히도 국제 시위대에 대한 호감에 비해 직접 시위에 참가한 홍콩인의 수는 극소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중의 호감를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직접 참가를 조직하는 데는 다소 소극적이던 홍콩민중동맹과 국제 참가단의 한계도 작용했다.
이제 공은 홍콩의 진보 세력에게 넘어 갔다. 지금까지 홍콩은 좌파의 황무지였다. 1960년대 마오주의 세력이 잠깐 성장할 수 있었지만,
홍콩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그러나 대중의 의식은 이미
심지어 한 자유주의 언론인조차
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