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장미” 파업 승리 110년:
로렌스 노동자들은 어떻게 싸워 이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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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년 전 3월 12일, 미국 매사추세츠주(州) 로렌스시(市)에서 섬유 노동자 수만 명이 대규모 파업 끝에 승리를 거뒀다. 노동자 압도 다수는 이주 노동자, 여성 노동자였다. “‘빵과 장미’ 파업”으로 널리 알려진 이 투쟁은 이후 많은 노동자들과 투사들에 영감을 줬다. 이 노동자들이 어떻게 단결해 싸워 승리했는지를 살펴 본다.
1912년 로렌스 섬유 노동자 파업은 미국 역사상 가장 커다란 영감을 준 파업 중 하나였다.
당시 로렌스에서 뉴욕주(州) 북부까지 펼쳐져 있던 섬유 공단은 때마침 첫 출항을 준비하던 초대형 여객선 타이타닉 호와 닮았다. 막대한 부와 최악의 빈곤이 나란히 존재했다.
이곳의 섬유 산업을 지배하던 기업은 ‘아메리칸 울른 컴퍼니’(AWC)였다. AWC 회장 윌리엄 우드는 당시 미국 최대 자본가이던 앤드루 카네기나 존 데이비슨 록펠러보다 부자였다. 우드는 궁전 같은 저택, 별장, 개인 소유 섬, 수많은 고급 자동차를 소유했다.
AWC는 노동자들을 “경주마처럼 몰아댔다.” AWC는 로렌스 주민들이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부르던 대공장을 지었다. 공장 2개 동은 각각 길이가 600미터에 이르렀고, 내부 통로의 전체 길이는 25킬로미터에 이르렀다. 그 통로를 따라 1470개의 동력장치가 설치돼 있었다.
이곳을 비롯한 여러 섬유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출신국이 51개나 됐다. 쓰이는 언어만 45개(사투리까지 더하면 62개)였다.
전체 노동자의 8분의 7이 이민자이거나 이민자의 자녀였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14~18세 여성이었다.
평균 임금은 주당 6달러였다. 아동은 3~4달러를 받았다.
임금의 3분의 2를 회사가 제공하는 공동 주택의 임대료로 내는 이들도 있었다. 공장에서 마시는 물도 돈을 주고 사야 했다. 노동자들은 직물을 만들었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옷 한 벌 사 입을 여유도 없었다.
어떤 공장은 5년 동안 사흘에 두 번꼴로 사고가 났다. 산업재해·영양실조·질병이 만연했다.
공장 노동자의 평균 수명은 39.6세였지만, 공장주는 58.5세, 의사·변호사·목사는 65.4세였다.
노동자 36퍼센트가 25세가 되기 전에 죽었고, 노동자 가정의 자녀들 50퍼센트가 6세가 되기 전에 죽었다.
이런 노동자들은 남부 유럽 전역에 나붙었던 AWC의 구인 포스터를 기억했다. 금이 가득 든 가방을 들고 노동자들이 공장을 나서는 포스터였다. 금 가방을 든 노동자 아버지를 열 명의 가족들이 반기는 포스터도 있었다. 포스터에는 “로렌스에선 아무도 배고프지 않다”, “모두 일할 수 있고 모두 먹을 수 있다” 하고 적혀 있었다.
로렌스의 노동자들은 매일 아침 공장에 나갈 때마다, 매주 3~6달러를 받을 때마다 그 포스터를 떠올렸고, 그만큼 우드를 증오했다.
“임금이 모자란다!” “총력전!”
1912년 1월 1일, 매사추세츠주 주정부는 여성·아동의 최대 노동 시간을 주당 54시간을 넘기지 못하도록 하는 주법을 시행했다.
로렌스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대개 주당 56시간이었다. 그런데 새 법에는, 줄어든 2시간만큼의 임금을 보전해야 한다는 문구가 없었다.
언론은 사장들의 불만을 대변했다. ‘남부는 3.5달러에 66시간도 부려 먹는데, 이제 어떻게 그들과 경쟁하란 말이냐!’
섬유 무역 관련 잡지 《섬유와 직물》은 훨씬 파렴치했다. “이 법은 국민의 자유에 대한 노골적인 간섭이다. … 섬유 공장에서 여성과 미성년자는 주 60시간 이상 일하면서도 혹사당하지 않았다. 우리 공장 공동체의 건장한 중년과 노인들은 10~12세에 일을 시작해, 은퇴하고 노동의 결실을 즐길 때까지 행복한 삶을 산다.”
그러나 섬유 산업은 다른 제조업들에 견줘 해고가 잦고, 임금은 너무 낮았다. 심지어 로렌스시 거리를 지키는 군인들도 주당 12달러를 받았다.
1월 11일, 면직 공장 ‘에버렛’의 여성 노동자들이 이전보다 32센트 삭감된 주급을 처음 받았다. 가뜩이나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32센트 삭감은 ‘먹느냐 굶느냐’의 문제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출신 여성 노동자들이 기계 전원을 내렸다. 그들은 “임금이 모자란다!” 하고 연호하며 공장을 나갔다.
다음날 방직 공장 ‘워싱턴’의 노동자들도 똑같이 대응했다. 그들은 공장 문을 부수고 다른 공장들로 행진했다. 이 노동자들은 다른 공장 노동자들에게 기계 전원을 끄고 함께 행진하자고 호소했다. “임금이 모자란다!” “임금이 모자란다!” “총력전!” “총력전!”
파업 첫날 파업 참가자는 1만 명이었다. 둘째날이 되면 로렌스의 섬유 노동자 3만 2000명 중 2만 5000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파업이 시작된 다음 날도 우드는 새벽 3시부터 일했다. 사환에서 시작해 대부호가 되고도 우드는 하루 17시간, 주 6일 일했다.
“저도 여러분처럼 이 회사의 직원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드의 연봉은 100만 달러가 넘었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것이었다.
그는 노동자 임금을 주당 32센트 삭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AWC는 전년도에도 막대한 수익을 냈다.
로렌스시(市) 시장은 “파업 자체를 깨거나 파업 참가자들의 머리통을 깰 것”이라고 했다. AWC의 주주 한 명은 파업 노동자를 “40~50명은 쏴 죽여야” 한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시장은 군대를 동원했다. 거리에서 파업 노동자 3명 이상 모이는 것이 금지됐다. 노동자들을 향한 계엄령인 셈이었다. 노동자들이 이에 저항하자, 수백 명이 체포됐다. 수십 명에게 징역형이 선고됐다.
노동조합
파업 노동자들은 조직적으로 맞서야 한다고 여기게 됐다.
하지만 수치스럽게도 미국 노동총동맹(AFL) 산하 섬유노동자연합은 소속 조합원들이 파업에 동참하지 못하게 하고, 이들을 대체 인력으로 투입했다. AFL의 관료들은 여성·이주 노동자를 조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봤고, 백인 남성 숙련 노동자들만 중시했다.
파업 노동자들은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을 찾아갔다. IWW는 아나코-신디컬리스트들과, 사회주의자들, 혁명가들이 1905년에 설립한 노동조합이었고, 노동자들의 인종, 성별, 출신, 종교, 언어, 기술 수준을 가리지 않고 조직했다.
로렌스에는 IWW 조합원이 300명뿐이었지만, IWW는 유능한 조직자였던 조셉 에토르를 로렌스로 급파했다. 에토르는 5개 국어를 말할 수 있었다.
에토르와 함께, ‘이탈리아사회주의자연맹’의 사무국장이자 급진 좌파 신문 〈프롤레타리아〉의 편집자였던 아르투로 지오반니티도 로렌스로 왔다.
에토르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 간 성별·국적·언어 차이를 이용해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착취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리스계-터키계, 터키계-아르메니아계, 프랑스계-독일계, 남부-북부 이탈리아계처럼 출신지에 따라 서로 골이 파여 있던 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토르는 출신지에 따라 선출된 노동자 대표 50명으로 구성된 파업위원회를 조직했다. 파업위원회 회의는 거의 30개 언어로 동시 통역됐다. 이 대표들은 언제든 갇히거나 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대타를 두어야 했다.
실제로 경찰은 이탈리아계 여성 노동자 대표 애나 로비조를 쏴 죽이고는, 현장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연설하던 에토르와 지오반니티를 살해 공범 혐의로 체포했다.
같은 날, 군대는 시리아계 파업 노동자였던 17세 남성 존 레이미를 살해했다. 레이미는 등 뒤에서 총검에 찔려 죽었다.
경찰은 파업을 음해하려 조작극을 벌이기도 했다. 경찰은 우드의 집과 공장, 군대의 무기고와 경찰서를 노린 다이너마이트 더미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이 사건에 우드가 연루된 정황이 드러나 재판을 받아야 했다.
친기업 언론들은 파업 노동자들이 미국인도 아니라고 비난했다. “해외 공작원 500여 명”이 소란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이 “무식해서 잘 속고 잘 흥분한다”고도 했다. 성직자들은 노동자들에게 “사악한 IWW에게 속지 말라”고 설교했다.
IWW는 로렌스에 더 많은 조직자들을 보냈다.
기업주들 사이에서 악명 높았던 IWW 지도자 “덩치 큰 빌” 빌 헤이우드가 로렌스에 도착하자, 기차역에 1만 명이 운집해 헤이우드를 환영했다. 당시 21세였던 유명한 투사 “삐딱이”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도 로렌스에 도착했다.
전투성과 연대
노동자들은 파업 전술을 논의하기 위해 열리는 대중 집회에 매주 참가했다. 전투적 행동들이 채택됐다.
노동자들은 수천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피켓라인 전술을 펼쳤다. 파업 파괴자들이 공장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였다.
군인들이 총검으로 피켓라인을 공격하자, 노동자 1만 5000명이 ‘인간 띠 잇기’를 하며 로렌스 거리를 행진했다.
혹한의 겨울 동안 두 달이 넘도록 매일같이 수많은 노동자들이 서로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고 구호를 외쳤다. 이 노동자들은 파업 파괴자들이 밤에 잠을 못 자게 하려고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여성 노동자들은 맹렬하게 투쟁했다. 이들은 경찰·군인들의 얼굴에 후추를 뿌리고, 가위로 멜빵을 잘랐다. 모자 핀으로 말을 찔러 군경을 말에서 떨어뜨리기도 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다리 위에서 경계를 서던 경찰 한 명을 붙잡아서 멜빵을 자르고 총·곤봉·배지를 빼앗고 얼어붙은 강 위에 매달았다.
로렌스시 지방검사는 “경찰 한 명이 남성 [파업 노동자] 열 명을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 한 명을 처리하려면 경찰이 열 명은 필요하다” 하고 한탄했다.
파업 기간에 여성 노동자 130명이 체포됐다.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은 이렇게 말했다. “IWW가 여성들을 방패막이로 내세운다고들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여성들을 뒤에 가둬 놓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간 것이다.”
파업위원회는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위한 재정 지원도 조직했다. 공장 임금에 의존하던 5만 명을 위해 하루 평균 1000달러의 파업 기금이 조직됐다. 파업위원회는 전국에서 모인 파업 기금을 도표로 그려서 공개했다. 이 기금은 파업 노동자와 가족을 위한 무료 급식소 18곳에 배분됐다.
그럼에도 파업의 재정적 어려움이 커지자, 노동자들은 유럽 노동운동에서 자주 쓰이던 전술을 폈다. 파업에 연대하는 다른 도시 노동자들이 파업 노동자 자녀들에게 거처와 돌봄을 제공하게끔 조직했다.
어린아이 300여 명이 다른 도시로 보내졌다. 유명한 산아제한 운동가이자 성 교육자였던 마거릿 생어가 이를 도왔다.
생어는 로렌스 아이들의 옷이 “넝마” 같았다고, “아이들 119명 중 속옷을 입은 아이들은 4명뿐이었다” 하고 기록했다. 생어는 아이들이 모두 영양실조였고 거의 모두가 편도선염을 앓고 있었다고도 했다.
뉴욕시에서는 파업 지지자들 수천 명이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기차에서 내리는 아이들을 맞이했다. 어디서나 기쁨과 반가움의 눈물이 흘렀다.
호텔 조리 노동자들이 이 아이들을 위해 만찬을 준비했다. 이탈리아·프랑스계·시리아계·동유럽계 어린이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배를 채웠다.
헬렌 켈러도 로렌스 파업에 크게 고무돼 로렌스를 지지 방문했고, 도시들을 돌며 파업 기금을 모금하고 아이들을 돌볼 가정을 모집했다. 헬렌 켈러는 에토르·지오반니티 석방위원회에서도 활동해, 법정에서 그들의 무죄를 증언했다.
“빵과 장미”
사측과 국가는 탄압을 키웠다. 군경뿐 아니라 사측이 고용한 폭력배들도 기승을 부렸다.
2월 24일, 필라델피아로 떠나는 아이들이 로렌스 기차역에서 체포됐다. 군대가 역을 포위하고 경찰이 곤봉을 휘둘러 아이들과 여성들을 짓밟았다. 아기를 품에 안은 여성들도 있었다.
탄압이 커지는 한편 파업 연대도 커졌다. 연대 시위가 미국 여러 곳으로 확대됐다.
파업 내내 노동자들의 전투성은 고조됐다. 노동자들은 임금뿐 아니라 존엄을 위해서도 싸우고 있었다. “우리는 빵과 장미를 원한다” 하는 구호가 노동자들의 열망을 잘 표현했다.(그러나 아쉽게도 로렌스에서 이 아름다운 구호가 실재했다는 확실한 자료는 없다.)
3월 12일, 결국 사측이 항복했다.
노동자들은 평균 15퍼센트의 임금 인상을 쟁취했다. 임금이 50퍼센트 인상된 경우도 있었다. 임금뿐 아니라 노동조건 개선 약속도 있었다.
파업 노동자들이 여러 언어로 번역해 검토한 합의안은, 3월 14일 집회에서 1만 5000명이 손을 들어 통과시켰다. 노동자들은 승리를 축하하며 여러 언어로 일제히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
로렌스 파업의 승리는 미국 전역의 사장들을 겁먹게 했다. 미국 북동부에서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자, 사장들은 파업이 확대되기 전에 재빨리 임금 인상을 제시했다. 〈디트로이트 뉴스〉는 섬유 노동자 43만 8000명이 도합 1500만 달러에 이르는 임금 인상을 얻어냈다고 추산했다.
한편, 로렌스에서 IWW 조합원은 파업을 거치며 1만 6000명으로 늘었다. IWW의 성공은 AFL이 무시한 노동자들도 투쟁에 나서 성장하고 조직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이후 IWW는 로렌스에서 조직이 쇠퇴했는데, 이는 IWW의 특성 때문이었다. IWW의 지도자들은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에 기반해 있었고 대개 정치적 문제를 회피했다.
이런 정치는 투쟁의 고조기에는 매우 성공적일 수 있다. 하지만 IWW는 투쟁의 전투적 유산을 토대로 노동자들의 정치와 조직을 다지는 것보다 투쟁이 분출하는 곳곳마다 옮겨 다니는 것을 선호했다.
몇몇 사회주의자들은 로렌스 노동자들의 투쟁이 거둔 성과를 바탕으로 노동자들을 단결시킬 혁명적 조직을 건설하자고 주장했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목표를 달성하기에 너무 작았다.
이후 여러 해에 걸쳐 노동자들은 사측의 거센 반격에 직면해 많은 것을 다시 뺏겼다. 조합원들은 해고됐고 지도자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럼에도 “빵과 장미” 파업은, 성별·나이·국적을 불문하고 노동자들이 생산을 멈추고 단호하게 싸우면서 분열을 뛰어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