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와 우울한 마음’ 토론회:
시청자 전화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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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를 읽기 전에 “마르크스주의와 우울한 마음”을 읽으시오.
“ADHD를 정신적 질환으로 보는 게 과연 합당할까요?”
저는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교사로 일하다 보면 소위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장애(ADHD)’라고 불리는 걸 가진 듯 보이는 아동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에 관한 고민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사실 ADHD 같은 작은 문제를 정신적 질환으로 이름 붙이는 게 과연 합당한지 문제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사회적 맥락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과도한 행동을 할 때가 많다는 이유로 이것이 치료해야 할 질환이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이 사회와 학교가 얼마나 틀에 박힌 인간만을 원하는지를 보여 주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또 다른 고민도 있는데요. 분명히 과잉 행동이나 주의력 결핍이 남보다 심한 아동들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아동들이 이 체제와 학교에 내재된 시선 즉, 틀에 박히고 획일적인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죠.
ADHD 아동들은 다른 아이들한테서 알게 모르게 종종 ‘쟤 뭐야?’ 하며 별종으로 취급받습니다. 이런 상황을 반복해서 보면서 교사로서 참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특히, 최근에 성인이 돼서도 ADHD가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 복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인이 돼서야 ADHD로 진단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 학창 시절이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지금이라도 알 수 있게 돼서 다행이다’,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 요새 누가 봐도 주의력 결핍이나 과잉 행동이 심하다 싶은 아동의 경우에는 부모님한테 진단받아 볼 것을 권유하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진료받는 것 자체가 낙인 효과가 있다 보니까, [부모님이] 대체로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시고요. 특히 ADHD가 부모의 양육 방식 탓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하느라고 무척 애를 먹습니다.
이 사회는 틀에 박힌 인간만을 길러 내려 하면서 거기서 벗어난 사람들을 낙인을 찍습니다. 그런데 ADHD라는 이름으로 진단받고 ‘치료’를 받는 게 오히려 당사자들한테 위안이 될 때가 많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동시에 다시금 ADHD라는 이름이 낙인이 돼서 당사자와 부모들을 괴롭히기도 하고요.
저는 이제 학교 안에서만 고민하다가 보면 답이 없음을 많이 느낍니다. 이런 사회에 맞서 투쟁할 때만이 우리가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시간·차별적 노동이야말로 우울 유발 요인입니다”
저는 25년차 직장인입니다. 올해로 50대에 접어든 저를 가장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제가 노동하는 데 너무 많은 세월을 허비했다는 생각입니다. 누군가는 행복한 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매주 끔찍한 월요일을 견디면서 쉬지 않고 25년을 일해 보니까, 좀 허무한 생각이 듭니다. 퇴직하면 여행도 가고 싶고 그런데, 벌써부터 무릎도 안 좋고 퇴직 전에 병이라도 얻으면 내 인생은 뭔가 하고 허망한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먹고살려면 일을 안 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 노동자들은 왜 이렇게 장시간 동안, 이렇게 긴 세월을 노동하면서 보내야 할까요? 저는 이 사회에서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공짜 노동을 시키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에서 10년간 아르바이트를 했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우울증이 너무 심해서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했는데요. 이 사회가 아르바이트생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나의 아저씨〉라는 유명한 드라마도 있죠.
이 친구가 1년 전에 정규직으로 취직했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런데 정신과 선생님이 갑자기 왜 이렇게 상태가 좋아졌냐며 놀랐다고 합니다. 명함도 나오고, 직급도 생기고, 월급도 올랐습니다. 정규직이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다며 친구가 기뻐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친구는 자신의 우울증이 개인 탓이 아니고 이 사회의 비인간적인 대우 때문이라고 말해 줬던 저에게 고맙다면서 한턱 크게 쓰기도 했습니다. 오늘 이 토론회에 초대했는데 이 토론이 친구에게도 큰 도움이 됐을 것 같습니다.
우울한 마음을 유발하는 요인들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것을 양산하는 원인은 단 하나, 이 자본주의 체제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온갖 수단으로 노동자들을 서로 경쟁시키고 분열시키고 차별합니다. 그래서 더 오래 일하고 더 적은 월급을 견디도록 만듭니다.
우울한 마음은 단지 개인의 정서적인 나약함이 아니라, 이 사회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고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자신에게 향했던 화살의 방향을 체제로 돌려야 합니다”
저는 최근에 성인 ADHD를 진단받은 청년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ADHD 증상을 겪고 있었지만 언제나 제가 더 많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중력이 약하고 매번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신없이 굴러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증상을 가진 사람들이 우울이나 불안을 겪는 건 너무나 당연해 보입니다. 이 증상은 굉장히 흔하고 약 몇 알로 관리가 가능하지만, 약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증상을 완화시키는 정도이죠.
개인의 노력을 탓하며 화살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것은 마음의 고통을 더 커지게 만들 뿐이고, 최소한 증상을 완화시켜 살아가기도 어렵게 만듭니다.
발제자의 주장을 한 번 더 반복하는 것이지만, 정신적 고통이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고통의 진정한 원인인 자본주의에 맞서 함께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매일 회사에 돌아와서 무력하고 우울한 이유는 명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가 어디에서나 정신적 고통을 자라게 하는 끔찍한 사회이기 때문임을 알려 줘야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향했던 화살의 방향을 돌려서 자본주의를 공격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저는 여전히 정신적 고통을 겪으며 이 끔찍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저와 함께 싸우는 사람들이 있고 제가 겪는 문제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되새길 때 힘을 느낍니다.
사람들이 지금 겪는 고통도 자본주의가 사라지는 순간 갑자기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뒤엎는 과정 속에서 동지를 발견하고 자신이 무력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를 뒤바꿀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 과정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제가 느낀 어떤 힘도 그런 과정 속에서 생겨났습니다.
이번 토론회가 인상 깊었던 분들이 계시다면, 저처럼 혁명적 사회주의 단체인 노동자연대 가입하셔서 활동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자본주의적 의학은 정신적 고통을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습니다”
저는 의사입니다. 자본주의하에서 정신의학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합니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건강 문제를 아예 무시하지는 못합니다. 노동자들 없이는 이윤도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건강을 기계의 고장이나 소모 같은 문제로 여깁니다.
이런 관점은 자본주의하의 의학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수술처럼 정말 기계를 고치듯이 할 수 있는 분야들은 대단히 발전해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다양한 고통들은 근본적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고 따라서 해결도 못 합니다. 특히 그 원인이 사회에 있는 경우 애당초 문제 자체를 직시하기를 회피하기 때문에 문제 해결의 의욕 자체를 잃은 지 오래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대부분 대증 치료라는 이름으로 이뤄지는 시간 끌기에 의존하죠.
노동조건과 직결된 근골격계 질환은 물론이고, 당뇨, 고혈압, 관절염, 갱년기 증상에 적용되는 처방들이 다 그런 식인데, 정신적 고통에 대한 정신의학의 대응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물론 저는 시간 끌기식 처방이 무용지물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인체는 스스로 회복하는 능력이 있으므로 충분히 회복할 시간과 자원을 공급받을 수 있다면, 어설픈 개입보다 나은 효과를 볼 수도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의학이 인체와 정신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키지 않는 상황에서, 섣부른 개입이나 약물 처방은 상황을 개선하지는 못하면서 부작용만 낳기도 합니다.
문제는 노동계급에게는 시간 끌기 처방만 있을 뿐 회복을 위한 지원이 제공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정신적 고통과 관련해서는 건강한 사회적 상호작용이 회복에 필수적인데요. 친구나 동료들 사이는 물론, 가족 사이의 관계도 뒤틀리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압력 속에서 이런 지원을 받으려면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의학의 대처 방식은 자본가에게는 꽤나 효과적일 수 있지만, 노동계급 대부분에게는 치명적입니다. 방치되거나 죽는 날까지 약물에 절어 살거나 둘 중의 하나일 테니 말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건강한 집단에 속해 협력적 관계 속에서 고통에서 회복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정부에 이를 위한 지원을 더 하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급성기의 고통을 경감시켜 줄 약물 사용을 반대할 수는 없지만, 그걸로 ‘땡’ 치거나 그것조차 제공하기를 아까워하는 지배자들을 비판해야 합니다.
근본에서는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사회에서만 정신적 고통은 크게 완화될 것이고, 정신과 육체에 대한 이해를 높일 진정한 과학도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투쟁 동참은 스스로를 구하고 다른 이를 구하는 방법입니다”
집단적 투쟁에 참가하는 게 정신 건강에도 좋다는 발제자의 지적에 크게 공감합니다. 또, 발제자도 언급했듯이 정신적 고통이 차별받는 집단에게 더 심각하다는 점에 대해서도 완전히 공감합니다.
저는 성소수자인데요. 한국에서도 조사를 보면 성소수자는 우울증을 겪거나 자살을 시도할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최근에도 연이은 성소수자들의 죽음이 있어서, 정말 남의 일 같지가 않았는데요.
차별의 파괴적인 효과 중 하나는 차별받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미워하고 또 어느 정도는 차별을 내면화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뭔가 잘못되거나 열등한 존재로 여기게끔 합니다.
저는 10년 전쯤에 〈노동자 연대〉 신문에서 성소수자 차별의 뿌리에 대해서 쓴 글을 읽고서는 굉장히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요. 인류 역사에서 성소수자가 차별받지 않았던 때가 있었고, 우리가 앞으로 해방될 수 있는 사회가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기사를 읽고 당시 큰 위로를 받았어요. 내가 잘못된 게 아니라 세상이 잘못됐다고 얘기해 주는 것 같았거든요.
이후에 저는 사회를 바꾸는 여러 투쟁들에 연대하고, 때때로 그런 투쟁이 승리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것은 저한테 굉장히 해방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이런 투쟁 속에서 내가 무기력하거나 혐오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느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동등한 동지로서 살 수 있다는 그런 연대감이 주는 안정감과 자신감이 굉장히 컸어요.
러시아 혁명가 레닌이 ‘혁명은 억압받는 이들의 축제’라고 얘기한 것에 정말 공감이 갑니다. 역사적으로 혁명 때마다 사회에 가장 천대받았던 성소수자·여성·이주민과 같은 사람들이 혁명에 앞장섰다는 것만 봐도, 이런 투쟁이 우리의 정신 건강에 얼마나 이로운지 보여 줍니다.
자본주의에서 사는 한, 무기력이나 가족에게서 오는 여러 압력이 계속 침투해 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결국 그런 세상에 함께 맞서는 것입니다. 그런 투쟁만이 스스로를 구하면서 또 다른 사람도 함께 구하는 방법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