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모아둔 〈다함께〉신문들을 이번 설 연휴에 좀 읽어보았습니다. 공감 가는 주장들이 많이 있었고, 간혹 동의하기 쉽지 않은 내용도 있었습니다.
이건희 항의시위 관련 기사들은 굉장히 좋았습니다. 그리고 〈다함께〉에서 주장하는, 노동계급이 중심이 돼서 해방된 사회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사회가 고도화할수록 직업이 다원화하고 있습니다. 망치질하고 나사 돌리는 일 등을 하던 전통적 의미의 노동계급은 현재 많은 분화가 이뤄졌습니다. 그래서 서유럽의 좌파 정당도 노동계급성을 많이 탈피하고 있고, 민주노동당 내에서도 노동계급성을 탈피하고 국민정당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함께〉에서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를 따르고 있는 것 같은데, 노동계급이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와 달리 많이 분화되고 있는데 노동계급이 중심이 돼 해방된 사회를 이룬다는 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호동에서, 이동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노동계급의 범주는 “망치질하고 나사 돌리는” 생산직 노동자들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란 ‘생계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뿐 아니라 사무직·간호사·교사·공무원 등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새로 성장한 부문도 노동계급의 일부입니다. 이렇게 보면 노동계급의 수는 전보다 비할 데 없이 많아졌습니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살던 19세기의 전 세계 노동자의 수를 다 합해도 오늘날 한국의 노동자 수보다 적습니다.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노동자들의 직종이 다양해지더라도 노동계급의 처지는 마르크스가 살던 19세기나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도 근본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서로 다르고 경제 상황이나 계급 투쟁 수준에 따라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도 어느 정도 차이가 나긴 하지만 자신의 노동 시간·강도·조건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이들 모두가 같고 마르크스가 살던 19세기의 노동자들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부문의 노동자들도 전통적 생산직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노조를 결성하는 등 고용주에 맞선 저항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된 요구도 임금 인상, 고용 안정입니다.
끝으로 노동계급이 사회 변혁을 이끌 수 있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다수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노동자들만이 생산을 멈춰 자본주의의 심장인 이윤 체제에 결정적 타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