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반동적 이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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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동이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크게 띄우고 있지만 6만 원이 넘는 이 책을 사는 것은 사기당하는 일에 가깝다. 대다수의 논문이 기왕에 나와 있던 것을 편집한 것에 지나지 않아 새로운 내용도 없다.
주요 편집자인 이영훈은 강정구 교수 마녀사냥을 촉구한 ‘2차 원로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이런 작자가 이 책에서 ‘좌파 민족주의’ 역사관을 비판한답시고 “역사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절거리는 것은 정말이지 역겨운 일이다.
이 책은 우파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반동적 이중주라 할 만하다. 물론 몇몇 논문은 딱히 우파적이지 않은 것들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식민지근대화론과 같은 성장주의와 탈식민주의의 우경적 버전, 미국식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우월성론 등을 방법론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계급 적대와 민족 모순은 희석되고, 피억압 민중의 자기 해방은 설 자리가 없다.
이들이 쓰레기 같은 잡담들을 책으로 엮을 수 있던 데는, 좌파 민족주의와 도식화된 스탈린주의적 역사 해석의 약점이 크게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좌파 민족주의와 스탈린주의 역사관은 소련 점령과 이를 바탕으로 한 북한 정권의 성격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해 왔다. 그러나 소련군은 미군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제국주의적 점령군이었고, 북한에서 수립된 정권 역시 노동자 계급의 자기 해방과는 거리가 먼 국가자본주의 체제였을 뿐이다.
한편, 우파들은 분단의 책임, 이에 따른 한국전쟁의 책임을 대부분 소련과 북한에 돌린다. 그러면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질에 눈감는다. 이런 점에서 사실, 스탈린주의 역사관과 전통적인 우파의 역사 인식은 서로 거울영상이다.
이정식의 논문은 분단의 책임을 소련에 돌리기 위해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먼저, 1945년 9월 20일자로 된 스탈린의 지령이다. 이 지령에서 스탈린은 북한 지역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 “이 지령은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것이었다.”
둘째, 이 지령에 따라 북한 지역에서 먼저 분단 정권이 성립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10월에 들어서자 소련군 사령부는 이북 5도행정위원회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설립했”고 “북조선중앙은행의 창설을 결정했다.” 이 사실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정식은 그림의 한쪽 면만 보여 줌으로써 미국의 책임을 면제하거나, 미국의 점령 정책이 소련의 선제 행동에 수동적으로 반응한 것처럼 말한다. “스탈린이 북한에서 단독 정부 수립을 결정한 이상 남북한의 통합을 위한 미국의 노력은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분단의 책임은 소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국은 38선을 사이에 둔 분할 점령을 소련에 제안함으로써 분단의 원인을 제공했다. 북한 지역에서 먼저 독자적인 지배 체제가 구축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소련의 점령이 한 달 앞섰다는 사실의 반영이다.
박명림은 “미군정의 국가기구 창설 노력은 1945년에 이미 그 초기적 준비가 완료되었”고, “45년 11월 13일에는 〈군정법령 제28호〉에 의거, 이미 군정청 내에 국방사령부가 설치되었고, 정부 조직으로서 군무국과 산하 육군부와 해군부가 설치되었다”고 썼다(《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2》). 또, 미국은 처음에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를 “이미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는 사실상의 정부”라고 평가했지만, 점령하자마자 이들을 탄압하고 우파와 친일파를 지배 체제의 파트너로 삼았다.
일단 점령이 시작되자 미국과 소련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신의 점령지에서 독자적인 지배 체제를 구축했던 것이다. 스탈린이 유고슬라비아의 밀로반 질라스와 나눈 대화는 제2차세계대전의 본질을 정확히 보여 준다. “이 전쟁은 과거와 같은 전쟁이 아니다. 한 영토를 점령한 자는 누구라도 그 자신의 사회 제도를 그 곳에 강요한다.”
이 책의 또 다른 편집자인 박지향은 “미군정이 남한에서 허용한 공간은 북한에 구축된 전체주의적 동원 체제와는 질적으로 다른, 다양한 선택지가 보장된 공간”이었다며 전평이 “그 공간을 이용하지 못한 채 … 이념 편향적 정책만을 추구하다 실패”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주장한다. “국내 연구는 미군정 내 자유주의자들과 완고한 반공주의자들 간의 차이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 “자유주의자들”이 조선의 노동자들에게 “가르치려” 했던 노동조합 운동은 정치와 경제를 분리한 “미국식 노동 운동”인데, “만일 전평이 정치우선주의를 떠나 … 경제 투쟁을 추구했다면 군정으로서는 … 억압하려 해도 적절한 구실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을 어렵게 만든 계기는 1946년 조선공산당의 ‘신전술’에 따른 9월 총파업과 그 이후 벌어진 일련의 정치 파업들이다.
그 근거로 박지향은 1946년 여름에 이르러 “미 국무부와 군정 내 자유주의자들은 한국에서 중도 좌파를 수용할 준비”가 됐다는 것과 미군정이 “전평을 체제 내에 끌어들이려는 유화 정책”으로 전환했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당시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실상 제국주의의 지배를 인정하라는 궤변이다.
먼저, 당시 모든 사회·경제 지표를 종합해 볼 때 노동자들은 분명히 급진화하고 있었다. 사소한 경제적 쟁점을 둘러싼 투쟁조차 곧잘 미군정과의 대결로 비화하고 있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미군정의 노동 정책이 억압적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군정은 1945년 9월 “사유재산 보호”를 내세운 법령 제2호로 공장 자주관리 운동을 억압했고, 10월의 법령 제19호를 통해 일체의 파업 행위를 금지할 수 있게 했다.
또한, 미·소 양대 제국주의가 한국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분단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 투쟁을 배제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1946년 중반에 미군정이 중간파를 활용하려 한 것은 오히려 국내외 차원에서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양극화 때문에 중간파 활용 정책은 단명했다. 조선공산당의 오류는 미군정과 부질없는 타협을 추진하다 뒤늦게 “정당방위 역공세”를 표방하며 ‘신전술’을 채택했다는 점이다. 미군정 내 자유주의자들이 중간파 활용을 택한 것은 급진화를 차단해 점령 정책을 원활히 추진한다는 것이 목적이었고, 미국의 패권 전략의 일부라는 점에서 ‘강경파’와 근본적 차이가 없다.
박지향이 전평의 ‘정치적 과도함’을 나무라는 또 다른 근거는 노동자들의 의식 수준이다. 노동자들은 “정치 투쟁에 별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혁명적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가 보기에 조선의 “공장 관리 운동은 계급의식적 행위가 아니었다.” 그래서 조선인 사업장으로 확대되지 않고 “대부분 일인[일본인] 소유 공장에서 발생했다.” 관리위원장으로 선출된 사람들은 “일반 노무자보다는 상급 지위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러시아에서도 2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노동자들이 공장을 접수하는데 그 때도 목적은 볼셰비키혁명이나 노동자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고] … 그냥 공장이 망가지지 않게 노동자들끼리라도 운영하자는 것이었는데, 그걸 역사가들이 포장하는 것”이라고 한다.
박지향은 자신이 그토록 비난하는 도식화된 스탈린주의적 ‘계급의식’ 개념을 사용해 노동자들의 투쟁을 폄하하고 있다. 그녀는 명백히 의도적으로 공장 자주관리 운동을 왜곡·축소하고 있다. 접수 운동이 대부분 일본인 소유 사업장에서 벌어진 것은 당연하게도 식민지 시기 주요 사업장이 일본인 소유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운동은 일본인 소유 사업장에 국한되지 않고 화신백화점, 경성방직, 조선비행기 등 조선인 사업장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물론 모든 자생적 운동이 그렇듯이 자주관리 운동에는 불균등성이 존재했다. 일부는 매우 급진적이었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았다. 많은 경우 관리위원장은 현장노동자들에 기반한 노동자들이 선출됐지만, 일부에서는 관리자들이 추인되기도 했다.
이런 불균등성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이 미군정이 강요하려 했던 자본주의적 질서와 충돌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미군정이 이 운동을 탄압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아래로부터 새로운 질서가 탄생할 가능성을 폄하하고 기각한다는 점에서 지배자들의 역사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