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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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40 년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력한 나라인 미국이 조그만 농업 국가인 베트남과 전쟁을 벌였다. 미국이 베트남을 파괴하기 위해 7백만 톤의 폭탄 ― 제2차세계대전 동안 투하한 총폭탄 량의 두 배가 넘는다 ― 을 투하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은 전쟁을 중단시킬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베트남 전쟁 초기에 미국의 반전 운동가들은 맹목적인 국수주의 열풍과, 미국의 군사 개입 확대를 정당화하는 선전 공세에 시달렸다. 1965년 여름 수백 명이 워싱턴에서 반전 행진을 했는데, 행진에 참가한 사람들은 전쟁 지지자들의 야유와 붉은 페인트 세례를 받아야 했다. 초기 반전 운동의 규모는 보잘것 없었다. 1968년에는 반전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들었던 그 모든 것을 부정하는 무엇인가가 당신에게서 솟아나고 있다. … 포기하지 마라.”고 말하게 될 프랑스의 급진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조차도 1965년에는 미국의 반전 집회 연설 부탁을 거절했다. 당시 사르트르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인들이 “정치적 비중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므로 집회 연설은 완전한 시간 낭비라고 말했다. 1965년에 미국 정부는 20만 명 이상의 미군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전면전이 시작됐고 미국은 역사상 유례 없는 규모로 베트남을 폭격했다. 개전 초기에 〈뉴욕 타임스〉는 폭격으로 “베트남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자 하는 환자 네 명 중 세 명”은 베트남 병사들이 아니라 “마을 부녀자들”이라고 보도했다. 이것은 차차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한 계기가 됐다. 전쟁에 대한 의문은 주로 대학가의 토론회에서 제기됐다. 수천 명의 학생들이 처음으로 정치적 논쟁에 참여했다. 미시건 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3천 명, 버클리 대학(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에서는 3만 명이 토론회에 참가했고, 수십만 명이 참가한 워싱턴의 전국 규모 토론회는 1백22개 대학 방송국을 통해 전국에 중계됐다. 거듭되는 토론회에서 정부 대변인들은 참전을 문제 삼는 질문 공세에 시달렸고 논쟁에서 계속 패배했다. 처음엔 전쟁을 지지하거나 정치에 관심 없던 학생들도 토론이 끝날 무렵에는 반전 주장이 옳다고 확신하게 됐다.
전쟁 지지 주장의 허점이 드러날수록 반전 운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수도 점점 더 늘어났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소수였다. 반전 운동은 여전히 정부의 전쟁 노력을 중단시키지 못했다. 미국 정부는 더 많은 병력을 베트남에 투입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여론이 나빠질수록 미국 정부는 군사력 증강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1966년에 20만 명이 추가 파병됐고, 1968년 초에는 50만 명 이상의 미군이 베트남에 주둔했다. 베트남 주둔 미군을 늘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청년들을 징병해야 했다. 1965년 12월 징집 인원은 1950년대 초 한국 전쟁 이래로 가장 큰 규모였다. 대학생들마저 징집 대상이 되자 수백만 명의 학생들이 징집 거부 서명을 했다. 50만 명 이상이 실제로 징집을 거부했고, 약 20만 명이 기소됐으며, 3천여 명 정도가 징집을 피해 달아났다. 징집기피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만 8천7백50명이었다.
초기 반전 운동은 막강한 정부에 맞서 이길 희망이라곤 없어 보였다. 그러나 전쟁의 진실이 드러나자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민간인들이 대량 학살되고 있다. 미국 정부는 국민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부패한 사이공 정부를 지원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고위 관리들의 거짓말이 폭로되자 반전 운동은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다.
1967년 4월에는 뉴욕에서 40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것은 1년 전보다 여덟 배가 늘어난 것이었다. 런던에서는 9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위대한 승리
1968년 1월 말에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군대는 구정 공세를 감행했다. 남베트남 전역에서 미군이 공격을 받았다.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군대는 36개의 주요 도시를 공격했고 미국 대사관을 잠시 점거했다. 구정 공세는 군사적으로는 승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이 압도적인 군사력으로도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파괴할 수 없음도 드러났다. 또, 베트남 민중의 사기와 투지를 꺾지 못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밀리기 시작하자 반전 운동 참가자들은 더욱 고무됐다. 하룻밤 사이에 반전 시위대가 세 배로 늘어나기도 했다. 영국 노동당 소속 총리 해럴드 윌슨은 1968년에 시위대의 규모에 놀라 영국군의 파병을 포기했다. 미군 4만 명이 죽고 25만 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시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이 사람들 앞에 나타나면 늘 반전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대는 “이봐 존슨, 오늘은 애들을 몇 명이나 죽였냐?” 하고 분노 섞인 조롱을 퍼부었다. 이것은 전반적 변화의 일부였을 뿐이다. 1965년 8월에는 61퍼센트의 미국인이 전쟁을 지지했다. 그러나 1971년 5월에 이르면 61퍼센트가 전쟁에 반대했다. 몇몇 도시의 선거는 노동계급 내에서도 반전 분위기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자동차 제조업으로 유명한 미시간 주 데어본에서는 이미 1967년에 41퍼센트가 미군 철수에 찬성한다는 여론 조사 결과가 나왔다. 전쟁을 수행하는 미국 병사들은 대부분 저소득층 출신의 지원병이나 징집병이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낸 세금이 가난한 베트남 국민들을 죽이는 데 쓰이는 것에 반대했다. 1970년 11월 노동계급 도시 디트로이트에서는 63퍼센트가 전쟁에 반대했다. 반전 분위기는 전선에까지 퍼져 나갔다. 1969년 10월 미국에서 시위가 벌어지자 베트남 파병 미군 병사들은 시위를 지지하는 표시로 검은 완장을 착용했다. 병사들은 반전 기사가 실린 지하 신문을 참호 속에서 읽었다. 1970년에 미국 내외에서 발행되던 지하 신문은 50종류가 넘었다. 70만 명의 군인들이 불명예 제대를 했다. 탈영병의 숫자는 1967년 4만 7천 명에서 1971년에는 8만 9천 명으로 두 배가 늘어났다. 집권 민주당은 분열했고 선거에서 패배했다. 1968년 가을, 베트남에서 미국을 구출하겠다고 약속한 공화당 소속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새로운 정부가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발표하자 반전 운동은 주춤해졌다. 그러나 닉슨은 전쟁을 끝내지 않았다. 북베트남 폭격은 더 강화됐다. 1970년 4월에 전선은 캄보디아로 확대됐다.
미국 전역은 다시 항의 시위로 달아올랐다. 더 강화된 융단 폭격과 1971년 초 라오스 침공은 엄청난 시위를 불러일으켰다. 워싱턴에서 50만 명, 샌프란시스코에서 30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군복 입은 병사들도 시위에 참가했다. 미국 정부는 1972년 초 15만 명 남짓 되는 미군만 남기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래도 반전 시위는 끊이지 않았다.
반전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워싱턴에서는 75만 명이 반전 시위에 참가했고 런던에서는 10만 명이 행진했다. 거대한 반전 운동 덕분에 베트남 전쟁은 패배로 끝났다. 이것은 미국이 맛본 최초의 패배였다.
지난 몇 달 간 세계적으로 반전 운동이 일어났다.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이 성장하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폭격에 반대하는 반전 운동은 즉시 대중 운동으로 성장했었다. 미군은 베트남전 때와 똑같은 방식에 의존했다. B52 융단 폭격과 끔찍한 ‘데이지 커터’ 폭탄에 크루즈 미사일의 ‘정밀’ 폭격이 첨가됐을 뿐이다. 만일 미국이 다른 나라로 전쟁을 확대한다면 지금은 30년 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반전 운동을 건설할 수 있다. 중동에서는 대중의 반미 감정이 더 고조돼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정권은 반란에 대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다. 미국 정부는 여전히 베트남 전쟁이 남긴 패배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은 전쟁의 대상과 시기를 결정할 때도, 지상군을 파병해야 할 때도 베트남 증후군을 의식한다. 또, 한번 시작한 전쟁은 짧은 기간 내에 끝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은 대규모 반전 운동이야말로 야만적인 전쟁을 끝낼 수 있음을 보여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