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에세이:
케인스주의인가, ‘21세기 사회주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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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만 해도 NL이다 PD다 하면서 한국 사회 혁명의 전략·전술을 놓고 논쟁했던 사람들이 이렇다 할 ‘과거사 청산’도 없이 시장경제 지지자가 돼, ‘협력적 자본주의’니 ‘개방적 민족경제’니 ‘사회적 시장경제’니, ‘분배에 기초한 성장’이니 하는, 그 자체가 형용모순인 주장들을 펴고 있다.
이들 간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을 함께 묶어 주는 공통분모는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는 점, 그러면서도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인정한다는 점, 대안으로 모종의 케인스주의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1980년대에 사회주의자를 자처했던 이들 중 90퍼센트 이상이 이제 모종의 (‘개혁적’, ‘포스트’, 또는 ‘좌파’) 케인스주의로 넘어갔다. 이들과 노무현의 ‘좌파적 신자유주의’의 경계는 모호하다.
필자처럼 박정희 시대에 마르크스주의에 입문했던 세대에게 케인스주의는 대안이 아니라 박정희 군부독재와 함께 타도해야 할 대상이었다. 당시 주류경제학의 표준적 교과서가 케인스주의자이며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새뮤얼슨의 《경제학》이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케인스 경제학은 부르주아 경제학 그 자체였다.
이 때문에 요즘 진보진영 상당수 인사들이 신자유주의 경제학과 케인스 경제학 사이에 마치 만리장성이라도 놓여 있는 듯이 케인스 경제학을 진보적 대안으로 간주하는 것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자본주의 외 대안 부재?
이 처럼 진보진영이 케인스주의로 경도한 것은 ‘자본주의 외 대안 부재’론의 효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우리 나라 진보진영의 스탈린주의적 뿌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예컨대 1930년대 후반 스탈린주의 코민테른은 반파시즘 민중전선 전술을 채택하면서 각국 공산당에 케인스 경제학과 같은 개량주의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고 이들과 연합하도록 지령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정통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잘못 알려져 있는 스탈린주의 경제학자 모리스 돕이 당시 케인스 비판을 자제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하지만 시장의 필수성을 신봉한다는 점에서, 또 국가의 중립성과 국가의 강화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케인스주의는 시장의 초월과 국가의 폐지를 지향하는 마르크스주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케인스주의는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을 거부하고, 신고전파 가격이론을 수용하고, 공황의 필연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근본에서 다르다.
또, 케인스가 자유주의 경제학에 대해 제기한 비판들, 예컨대 ‘세이의 법칙’에 대한 비판이나 화폐수량설 비판은 마르크스가 이미 더 철저하게 제기한 바 있다. 좌파 케인스주의자들이 애호하는 ‘금리생활자의 안락사’나 ‘투자의 사회화’ 같은 케인스의 명제도 어디까지나 자본주의를 구원하기 위한 방책이지 혁명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이런 케인스의 주장이 세간의 주목을 끈 것은 언뜻 보기에 급진적 반자본주의 주장이 저명한 부르주아 경제학자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는 최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조셉 스티글리츠의 비판이 주목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오늘날 케인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본 통제, 복지 지출 증대와 같은 개혁의 의의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케인스주의의 주요한 성취로 주장되는 복지국가[사회보장제도]는 케인스주의 경제정책의 적용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1930년대 대공황 이후 격화된 자본주의의 위기와 노동자 계급의 혁명 투쟁에 대한 지배계급의 무마적 대응의 산물이다.
케인스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본주의 외 대안 부재’론이라는 문제설정, 즉 ‘좋은’(또는 ‘덜 나쁜’) 자본주의(=‘스웨덴 모델’)와 ‘나쁜 자본주의’(=신자유주의, 미국식 자본주의)의 이분법이다.
케인스주의에 반자본주의적 요소가 있다고 해서 반자본주의 운동이 케인스주의와 무원칙하게 동맹할 경우 연대의 폭이 넓어지고 운동에 현실성이 더해지기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 외 대안 부재’론의 문제설정, 즉 시장 논리, 경쟁력 논리, 성장 담론을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반자본주의 운동의 원칙과 가치를 훼손해 자본주의 헤게모니 강화로 귀결될 것이다.
케인스주의는 20세기 중엽, 자본주의 발전의 특정 국면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고안돼 적용됐던 지배계급의 대응 전략이다. 게다가 지난 1970년대 이후 약발이 다 떨어져 지배계급 스스로 용도 폐기 처분했다.
이것을 21세기에 우파도 아닌 좌파가 자신의 대안이라고 다시 부여잡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