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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즈볼라와 레바논의 반제국주의 항쟁

주류 언론은 헤즈볼라를 “테러 조직”으로 매도한다. 그러나 영국의 혁명적 반자본주의 주간지 〈소셜리스트 워커〉 기자 시문 아사프와 베이루트 주재 프리랜서 기자 크리스쳔 헨더슨은 헤즈볼라에 관해 주류 언론과는 사뭇 다른 설명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왜 그토록 헤즈볼라를 증오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헤즈볼라는 레바논 남부를 점령하고 있던 이스라엘 군에 맞서 1982년부터 시작된 저항 운동의 선봉에 있었다. 그리고 2000년 5월, 마침내 저항 운동이 이스라엘 군대를 레바논에서 쫓아냈다. 그 이후로 줄곧 헤즈볼라는 제국주의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 노선을 지켜 왔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이번 이스라엘의 철수를 “미국의 베트남 패전에 비견할 만한 수모”로 묘사했다. 〈BBC〉의 제러미 보우언은 레바논 국경에서 직접 보도하길, “[이스라엘의] 점령이 이처럼 순식간에 파탄나리라곤 아무도 상상 못했다”고 했다. 〈인디펜던트〉의 로버트 피스크가 베이루트에서 쓴 기사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이 “마지막에는 몰래 도망치듯 빠져나왔다”고 한다.

이스라엘이 쫓겨난 뒤 레바논 국경 지역에서는 승리를 축하하는 대중 집회가 열렸다. 헤즈볼라의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가 그 곳에 나타나자 사람들은 그를 뜨겁게 맞이했다.

그들이 몰아낸 것은 장장 18년 동안 레바논 남부를 점령하면서 수만 명을 죽인 중동 최고의 강대국이었다. 그 동안 이스라엘은 레바논에서 철수하라는 UN 결의를 무시한 채 끊임없이 레바논 마을들을 폭격했다.

그러나 점령 비용이 너무 커지고 갈수록 거세지는 저항세력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이스라엘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운동

이스라엘은 자국 군대가 국경을 넘어 철수하는 동안 레바논에 있는 동맹 세력 ― 남부레바논군(SLA)이라는 우익 민병대 ― 이 헤즈볼라의 추격을 막아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군과 SLA는 서로 경주하듯 이스라엘 쪽으로 도망쳤다.

십자군 요새였던 보포르에 주둔하고 있던 이스라엘 병력들은 헤즈볼라 전사들이 지뢰 매설 지역을 돌파해 요새를 공격하는 동안 콘크리트 벙커에 피신해 있다가 야음을 틈타 헬기에 몸을 싣고 가까스로 탈출했다.

헤즈볼라 전사들과 레바논 민간인들을 가득 실은 차량들이 도망가는 이스라엘 기자들을 뒤쫓았다. 그 때 이스라엘 탱크가 BBC의 제러미 보우언이 타고 있던 차를 고의로 포격했다. 보우언은 생명을 건졌지만 운전수는 그렇지 못했다.

5월 25일 늦은 오후에는 레바논 사람들이 떼 지어 이스라엘 국경에 몰려와 이스라엘 군에게 야유를 퍼부으며 레바논·헤즈볼라·팔레스타인 깃발을 흔들었다. 이스라엘 군이 주둔했던 보포르 요새는 레바논인 가족들의 나들이 장소로 변했고 얼마 전까지 점령군의 최전방 지대였던 리타니 강에서는 사람들이 나룻배를 타고 놀았다.

헤즈볼라는 비교적 협소한 이슬람주의 강령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그들의 목표는 이스라엘을 레바논 남부에서 쫓아내고 1967년 이전(즉,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지방과 가자지구와 골란고원을 점령하기 전)의 국경선까지 철수시킨다는 것이었다.

점령 경험 때문에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적으로 성장했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스스로 뿌린 씨를 거두고 있는 셈이다.

이스라엘의 대응은 헤즈볼라 지도자들에 대한 표적 암살이었다. 1992년에 이스라엘의 무장 헬기가 헤즈볼라 지도자 압바스 무사위를 태우고 있던 차량 대열을 공격했다. 그 공격으로 무사위 자신과 그의 부인과 아들, 그리고 네 명이 더 사망했다.

지도자를 잃은 헤즈볼라는 하산 나스랄라를 중심으로 한 젊고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했다. 나스랄라는 이스라엘을 몰아내려면 종교의 차이를 뛰어넘어 더 광범한 세력을 규합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한 인물이었다.

1990년대를 거치며 헤즈볼라는 이스라엘 점령군에 저항하는 주도 세력으로 성장했다. 1960년대 이래 저항의 선봉에 섰던 레바논공산당 일부도 옛 소련이 붕괴한 뒤 헤즈볼라에 합류했다.

공산당원들은 헤즈볼라에 입당하면서 저항 운동 투사들의 방대한 네트워크도 함께 갖고 들어왔다. 이어 헤즈볼라는 학교와 병원을 짓는 등 복지 사업들을 추진했다. 그렇게 해서 헤즈볼라는 시아파 무슬림 지역에 깊이 뿌리내린, 전국적인 지지를 받는 사회운동으로 성장했다.

1996년에는 이스라엘 군이 카나 마을의 UN 건물을 포격해 1백 명 이상의 난민들을 죽였다. 레바논 전체를 경악시킨 이 사건 때문에 사람들이 줄지어 헤즈볼라에 가입했다.

인기가 치솟는 것과 함께, 헤즈볼라는 가난에 찌든 지지자들의 갈수록 늘어가는 문제들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서 다른 좌파 정당들의 사회 정책들을 차용했고, 역대 레바논 정부들의 신자유주의 조처들에 반대했다.

나스랄라는 이러한 사회·정치 쟁점들에 대처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다른 곳의 반제국주의 운동들과 공통점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는 부자와 가난한 자들로 나뉜 두 개의 미국을 언급하며 9·11 테러를 비판했고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를 “투쟁 속의 형제”라고 했다.

그러나 헤즈볼라의 정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타협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이스라엘의 최근 만행이 있기 전에 헤즈볼라는 자신의 전투원들을 레바논 군대에 통합시키는 방안을 놓고 정부와 협상중이었다. 가혹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와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헤즈볼라는 이러한 정책들에 대한 불만의 확산을 누그러뜨리려 애썼고, 7월 30일 베이루트에서 UN 사무소를 습격한 시위대의 경우처럼 대중 운동이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이 뜻하는 바는, 헤즈볼라가 불의와 불평등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불의의 근원에 대한 정면 도전을 회피할 수 있고, 그 점에서 다른 이슬람주의 조직들과 똑같은 한계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레바논인들의 저항에서 헤즈볼라가 하는 영웅적 구실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가산 파란은 레바논 티레 시에 사는 49세의 의사다. 그는 시아파 가정에서 자랐지만 자신이 세속주의자이고 좌파라고 자칭한다. 그의 집은 7월 말에 파괴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이스라엘에 맞서 싸우거나 레바논을 떠나는 것뿐입니다.” “레바논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여기 남아야 합니다. 여기 남으려면 저를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저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군대는 헤즈볼라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