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노동자들이 개발도상국 수탈로 득을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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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여간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져 왔다. 이 운동에서 미국, 영국, 그 밖의 유럽 등 선진국에서 벌어지는 운동은 중요한 한 축이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는 듯이, 한국의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이 주최하는 시위에도 선진국에서 온 유학생이나 노동자들이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는 운동에 참가하면서도 제국주의 나라의 국민으로서 “죄송하다”거나 “도덕적인 책임을 느낀다” 하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선진국의 평범한 사람들이 자국 국가의 제국주의 때문에 죄책감을 느낄 일은 아니다.
오히려 선진국의 노동자 등 천대받는 사람들은 자국 국가의 억압과 차별로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제국주의를 강화하며 군비를 대폭 늘리면서도, 재정 적자 운운하며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삭감하고 복지를 공격하고 있다.
올해 미국 국방비는 8860억 달러에 달한다. 미국인 1인당 2600달러에 달하는 돈이다. 미국인 39퍼센트가 기초생활비도 마련하지 못하는 생활고를 겪고 있다. 국방비를 빈곤 해결을 위해 쓴다면 생활고 문제는 상당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지만, 미국 권력자들한테 그것은 우선순위가 아니다.
게다가 중동 전쟁의 (제한된) 확전은 석유 등 에너지 가격 상승을 유발해 선진국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타격하고 있다. 또, 각국 지배자들의 제국주의 강화는 ‘테러방지법’ 제정 등으로 자국 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인종차별을 강화하며 억압을 심화시키고 있다.
즉, 선진국 지배자들이 제국주의를 강화할수록 (제3세계 민중뿐 아니라) 선진국 노동계급에게도 착취와 억압이 강화되며 고통이 강화된다.
선진국 노동계급도 자국 지배자들의 제국주의에 맞서야 할 이해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릇된 전제
그런데 선진국 국민 모두가 개도국에 대한 자국의 수탈에서 이득을 얻는다는 생각은 좌파 내에서도 적잖히 볼 수 있다.
이런 생각은 1960~7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 발전해 세계적으로 확산됐고, 한국에서도 1970~80년대 민족경제론 등을 통해 좌파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사상은 미국 등 선진국으로 이루어진 중심부가 존재하고, 이들이 주변부 국가들을 수탈한다고 본다. 이로 인해 주변부는 가난과 저발전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 사상이 맞다면 주변부 나라의 노동자들은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 자국의 지배자들과 단결해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대안으로 이끌리기 쉬울 것이다. 또, 선진국 노동자들도 자국 국가를 지지하는 것이 득이 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현실의 검증을 이기지 못했다.
이런 사상은 선진국의 주변부 수탈을 강조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자본 투자는 대부분 선진국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세계은행의 발표를 보면, 1965년 이후 외국인 직접투자의 약 4분의 3이 선진 산업국으로 갔다. 나머지도 극소수 개발도상국들에 집중됐다.(이런 곳들이 바로 신흥공업국들로 불리게 되는 곳들이다)
세계 최빈국들은 선진국의 자본이 투자된 곳이 아니라 (따라서 수탈이 이뤄진 곳이 아니라), 투자에서 배제된 곳이다.
선진국의 자본 투자가 이뤄진 제3세계 나라들이 모두 저발전의 늪에 빠진 것이 아닌 것이다. 중국이 가장 두드러진 사례이다. 지난 40년간 중국으로 외국인 직접투자가 몰려갔지만,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제조업 중심지가 됐고 첨단산업 분야에서도 기존 선진국을 위협할 정도로 발전했다.
중국·한국처럼 경제 성장에서 큰 성공을 거둔 나라들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동남아시아, 인도 등의 일부 제3세계 나라들도 독자적인 자본 축적 기반을 형성했다.
이는 그 나라들에서도 노동계급이 대규모로 형성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한 토론회에서 레바논의 마르크스주의자 시문 아사프는 중동에서도 노동계급이 성장하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1960~1970년대 레바논에서는 인구의 80퍼센트가 농촌에 살았습니다. 지금은 레바논 인구의 90퍼센트가 도시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다른 아랍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례들은 계급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그 내부에 계급적 착취가 있고, 이것이 지배자들인 자본가들이 부를 축적하는 원천이다.
요컨대 제국주의를 빈국들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중심으로 규정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벌인 것도 이라크 석유를 수탈하는 것 자체에 핵심 이해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유럽, 일본, 중국 등 중동 석유에 크게 의존하는 강대국들에게 ‘석유를 안전하게 공급받으려면 미국의 힘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줘, 제국주의적 경쟁에서 자신의 주도권을 공고히 하려는 것에 있었다.
지금 미국이 이스라엘을 전적으로 지원하는 까닭도 열강이 경합하는 중동에서 자신의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제국주의의 핵심 역학은 강대국들 간의 (경제적·지정학적) 경쟁이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발전한 결과로, 규모가 커져서 국경을 넘어 경쟁을 벌이게 된 기업들이 국가와 긴밀히 결합되면서 나타난 것이다.
바로 이런 역학 때문에 제국주의는 선진국 노동계급에 결국 해악적인 압력으로 작용한다. 국가 간 경쟁이 강화될수록 결국 자국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를 강화해야 한다는 압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첨단 산업을 둘러싼 국제 경쟁이 강화되자 최근 한국에서 반도체, 이차전지, 디스플레이 등 국가첨단산업 연구 개발 분야의 노동시간을 주 52시간보다 늘리는 규제 완화 법이 추진 중이다. 이런 성격의 공격이 세계 곳곳에서 강화되고 있다.
“노동귀족?”
노동귀족론도 선진국 노동계급이 빈국 수탈로 이득을 본다는 이론의 하나이다.
20세기 초에 러시아 혁명가 레닌이 제국주의론을 발전시키며 (부차적으로) 노동귀족론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런데 레닌의 노동귀족론은 후진국의 좌파적 민족주의 사상과는 타킷이 다르다. 후자는 선진국 노동계급 전체가 이득을 본다고 말하지만, 레닌은 선진국 노동계급의 극히 일부(노동귀족)가 이득을 본다고 봤다.
노동귀족론을 통해 레닌은 제1차세계대전 때 독일사민당 등 서구의 좌파 정당들이 자국의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며 타락한 원인을 분석하려 했다. 레닌의 주장은 개혁주의가 단지 노동계급 외부로부터 침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혔다는 의의가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 지도층과 고임금 노동자들을 뭉뚱그린다는 점이 약점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은 노동계급 투쟁의 중요한 일부분이었다. 제1차세계대전 종전 즈음 이들의 투쟁은 독일 등 유럽에서 혁명이 전개되는 데 중추적인 구실을 했다.
1950~60년대에 유럽의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은 “노동귀족”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1968년에는 바로 그들이 프랑스에서 당시 세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총파업을 벌이는 데 선두에 섰다. 따라서 선진국 노동자들이 제국주의에 의해 매수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여전히 설득력이 없다.
역사적 경험은 선진국 노동자들도 후진국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착취 체제에 맞서 싸우는 데에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래서 선진국 노동자들의 투쟁과 후진국 노동자들의 투쟁은 서로 고무하며 발전해 온 역사적 경험이 있다.
1917년 후진국이었던 러시아에서 벌어졌던 노동자 혁명은 1918년 선진 산업국이었던 독일 등 유럽의 혁명으로 확산되며 제1차세계대전을 끝낸 바 있다.
2011~13년 아랍에서 독재자들을 몰아낸 ‘아랍의 봄’은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광장 점거 운동’을 고무했다.
노동자 국제주의는 단지 추상적 가치가 아니다. 국제 노동계급의 물질적·정치적 이해관계에 기반한 것이다. 이런 역학을 이해해야 노동계급의 국제적 연대를 효과적으로 건설해 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