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권리 옹호론에 대한 재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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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권리 옹호론에 대한 재반론
이정구
나의 글(《다함께》 2002년 1월호에 실린 “보신탕 논란”)에 대해 바라 씨가 반박글을 보내 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바라 씨가 나의 글에 많은 관심을 보여 주었고, 또 그의 반박글을 계기로 동물 권리 문제에 관해 심층적인 토론과 논쟁을 할 기회를 갖게 됐기 때문이다. 바라 씨의 글에는 몇 가지 논쟁할 만한 게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점은 동물에게 권리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라 씨는 “동물 권리란 윤리적 권리를 의미한다. 즉, 동물들도 존중돼야 할 권익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동물에게 권리가 있다는 말은 모순이다. 고양이가 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며, 매도 토끼의 권리를 용인하지 않는다. 쥐나 토끼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바라 씨가 암시하는 것처럼,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이 말하는 ‘권리’란 사실은 동물을 존중해 줘야 할 인간의 윤리적 의무를 뜻한다. 동물에게도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 갖는 논리적 모순은 이전의 나의 글에서 밝혔기 때문에 반복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인간이 동물을 존중해 줘야 할까 하는 점에서는 생각해 볼 점이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인간의 가치 판단 문제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우리 인간이 다른 동물에 대해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현대 자본주의가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에 대한 의무감을 철저하게 짓밟아 버렸다는 비판에 반대할 생각도 전혀 없다. 사실 우리는 인간과 동물을 포함한 자연 사이에 조화로운 관계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의 필요 때문이지 동물의 권리라는 신비스런 개념 때문이 아니다.
피터 싱어 같은 좌파 동물 권리 옹호론자든 아니면 우익 동물 권리 옹호론자든 공통으로 갖고 있는 생각이 바로 동물이 권리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자연 세계는 이들의 생각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한 동물의 권리 옹호는 다른 동물의 권리 침해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든 유기체가 경쟁 관계와 동시에 협력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생물학의 근본 원리이다.
육식과 모피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신체 안에서도 다른 많은 유기체가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한다. 인간이 존재하기 전에도 이런 현상은 있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여러 종들이 진화했고 어떤 종들은 사라졌다. 생명체의 진화 과정은 각종 동물의 권리가 서로 협력하기도 하지만 또한 충돌하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바라 씨를 포함한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이 동물도 권리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선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즉, 우리는 인간 이외의 동물의 삶과 인간의 삶 사이에서 가치 판단을 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불필요하게 동물을 학살하거나 학대하는 것에 반대한다. 하지만 나는 인간으로서 인류가 질병과 빈곤과 기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물의 고기를 먹고 그 가죽을 이용하는 것에 찬성한다. 또한 동물 실험도 피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인간이 아니라 동물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인류가 존재하기 위해 불가피한 일일 뿐 아니라 자연의 법칙이기도 하다.
인간으로서
바라 씨가 주장한 것 중 두번째 문제는 과학에 대한 입장이다. 바라 씨는 “과학은 이데올로기다. 이윤을 창조하는 행위,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과학이 존재할 수 있는 법칙인 것이다.” 하고 주장했다.
바라 씨는 자본주의에서 과학이 하는 역할 가운데 매우 중요한 측면을 올바르게 지적했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학에 투입되는 기금의 95퍼센트 이상은 군사적 목적이나 이윤 추구 또는 이 둘 모두를 위한 연구에 사용된다. 그래서 나 자신도 과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것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병원과 제약회사들은 인간의 필요보다는 이윤을 위해 신약 개발을 하고, 질병 치료보다는 특허권 획득에 더 열을 올리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바라 씨의 주장처럼 모든 과학이 단순히 이데올로기인 것은 아니다. 아스피린과 페니실린 개발은 인류를 질병과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또한 많은 의약품과 의료 행위는 동물 실험 덕분에 인류의 질병을 치유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었다.
바라 씨는 과학이 이데올로기라고만 여기기 때문에 동물 실험이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한편, 톰 리건이나 피터 싱어 같은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은 동물 실험을 통해서 인간의 질병 치유에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당뇨병 같은 질병의 치료, 면역 지식, 장기 이식의 기초가 되는 면역 조치, 그 밖의 많은 예방 의약품이 동물 실험 덕분에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과거뿐 아니라 현재에도 동물 실험 외에 달리 대안은 없어 보인다. 어떤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은 동물 실험 대신 조직 배양이나 박테리아를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예컨대 현대 산업 사회의 질병이나 사망의 주된 이유가 되고 있는 정신 분열증, 우울증, 불안, 신경성 질병, 뇌졸중 등을 연구하기 위해 뇌를 가진 동물을 실험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닐까? 마지막으로, 바라 씨는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양하기 때문에 한묶음으로 다룰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나도 정치적 견해의 차이와 관계 없이 그들 사이의 공통점인 동물 권리 옹호라는 측면에서만 비판했다. 바라 씨는 지배계급의 동물 보호론과 좌파의 동물 권리 옹호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것처럼 주장했지만 동물의 권리 문제에 대해 어떤 차이가 있는지 밝히고 있지 않아 아쉽다. 그리고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 중에서 그 좌측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바라 씨의 주장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1930년대 나찌 독일에서 동물 실험을 금지했던 것을 동물 권리 옹호론과 연결시키는 것은 상당한 논리적 비약”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물론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 중에서 피터 싱어 같은 정치적 좌파 인물들은 나찌에 반대할 것이다. 하지만 동물 권리를 옹호하는 단체들 내에는 공공연하게 히틀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자본주의에서 과학이 하는 역할 모두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우리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과학을 창조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물의 권리 때문에 인류가 직면한 도덕적·정치적·사회적 선택의 문제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