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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 알레그레 -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향해

포르투 알레그레 -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향해

장석준(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 교육부장)

흔히 ‘다보스 포럼’으로 알려져 있는 ‘세계경제포럼’이 올해에는 미국의 뉴욕에서 열렸다. 해마다 스위스의 산간 휴양지 다보스에서 열렸기 때문에 다보스 포럼으로 불렸는데, 이제부터는 그렇게 부를 수 없게 됐다. 그 이유는 스위스 정부가 더 이상 이 행사 참여자들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작년에 다보스는 자본 주도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시위대들로 떠들썩했다. 부자들의 휴양지에서 뭐 하는지도 모르게 진행되던 이전의 다보스 포럼이 일말의 신비감을 갖고 있었던 데 반해, 뉴욕 한복판에서 열린 이번 세계경제포럼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세계경제포럼이 대명천지에 나오자 사람들은 그게 전 세계 부자들의 칵테일 파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흡혈귀들’에게 햇빛은 해롭다는 것을 다시 입증해 보였다.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남쪽에서는 오히려 작렬하는 태양 속에서 생명력을 떨쳐 보인 또 다른 잔치가 열렸다. 작년부터 세계경제포럼에 대항하며 시작된 ‘세계사회포럼’ 2차 대회가 그것이다.

6배로 커진 잔치, 6배로 더 강해진 세계 민중의 힘?

세계사회포럼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이미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애초에, 시애틀 투쟁을 통해 기염을 토한 세계화 반대 운동을 자본주의의 대안을 벼리는 수준으로까지 발전시킬 계기를 고민했던 것은 브라질의 민주노총 CUT와, 땅 없는 농민들의 유휴지 점거 운동으로 유명해진 농업노동자조직 MST였다. 이들은 프랑스에 본부를 둔 반세계화운동 단체 “금융거래과세시민연합(ATTAC)”(프랑스의 유력 진보지인 〈르몽드 디플로마티끄〉가 주도하고 있다)으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 냈다. 이렇게 해서 브라질과 프랑스의 진보세력을 양대 축으로 ‘세계사회포럼’ 1차 대회가 작년 2월에 브라질 남부 도시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렸다. 포르투 알레그레는 브라질 노동자당(PT)이 10년 이상 시정(市政)을 장악하고 있다. 또한 시민들이 예산 작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참여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있는 곳이다. 올해도 세계사회포럼은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개최됐다. 그런데, 내용 면에서나, 규모 면에서나, 국제적 관심 면에서나 이번 대회는 불과 1년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성장했다. 전 세계 4천9백여 개 단체에서 1만 9천 명이 공식 참가했다. 주최측이 배정한 1만 2천 명의 공식 참가단 규모를 훨씬 넘어섰다. 총 참가자는 5만 명 이상이었다. 첫날인 1월 31일에 열린 가두행진에는 7만 명이 참가했다. 27개의 큰 회의와 1백30개의 세미나가 진행됐고, 수많은 주제들을 다룬 7백 개의 워크숍이 있었다.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좌파 인사들의 참여도 늘었다. 노엄 촘스키를 비롯해서 지구상의 웬만한 좌파 이론가·운동가들은 그 시간에 다 포르투 알레그레에 머물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심지어 프랑스에서는 우파 정치인들까지 세계경제포럼을 마다하고 이 곳으로 날아 왔다. 주최측의 평가에 따르면 1회 대회에 비해 6배의 성장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포르투 알레그레는 대안 세상을 꿈꾸고 실제 그것을 향해 한 발 내딛고 있는 자들의 ‘소우주’였다. 아마도 10년 이상 참신한 진보정치를 추진해 온 이 도시의 저력이 아니었다면, 감당하기 힘든 잔치였을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 행사 안내를 받고, 거리 곳곳에서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는 대회 구호가 적힌 가로 현수막을 보고, 1백50여 페이지짜리 컬러판 무료 일정 안내서를 받으면서, “과연 국가 권력을 잡아야겠구나” 하고 느꼈다는 한 미국 운동가의 소회가 장난스럽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향해

첫날의 가두시위에서 리우 그란데 두 술의 주지사 올리비우 두트라(노동자당 좌파 지도자)는 “미국의 전쟁 광기와 아르헨티나 위기야말로, 바로 지금, 세계화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포문을 열었다. 그는 이러한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사회운동, 노동운동, 지역 민중의 힘”이라면서, “민주주의의 심화, 대중의 참여는 자본과 시장의 독재를 끝장내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두트라의 연설은 대회 전체의 음조를 잘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놓고 급진적이면서 진지한 논쟁이 꽃을 피웠다. 예를 들어, 제3세계 외채 위기에 대한 토론은, 대회 장소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르헨티나에서 외채 문제로 인해 정권이 두 번이나 바뀌는 가운데, 유례 없는 열기를 띠며 진행됐다. 많은 이들이 ‘외채 상환 재협상’이 아니라 ‘외채 탕감’에 손을 들어 주었다. 윗동네[뉴욕의 세계경제포럼]에서 생색내듯 이야기되는 일부 제3세계 국가들의 외채 경감 조처는 비웃음만 샀다. 포르투 알레그레가 상징하는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토론도 뜨거웠다. 이탈리아 공산주의재건당 서기장인 파우스토 베르티노티는 참여예산제 실험을 “자본주의 틀 내에서 미래 사회주의의 제도를 구축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참여예산제를 처음 추진한 이 도시의 전 시장이며 브라질의 저명한 그람시 연구가인 라울 폰트는 참여예산제가 “중앙정부의 권력과 자본의 힘에 대항해 대중을 일으켜 세우고 민중 민주 정부의 건설로 나아가는 ‘한’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입장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러시아의 좌파 논객 보리스 까갈리쯔끼는 포르투 알레그레의 경험을 아무 데나 이식할 수는 없으며, 자본주의 내에서 참여민주주의 시도는 결국 일정한 단계에서는 결코 점진적 방식으로 이뤄질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전반적인 토론의 분위기는 지난 몇 년 새에 세상의 이념추가 어느 정도나 방향을 틀었는지 잘 보여 줬다. 이제 다시 진보세력은 ‘반대’가 아니라 ‘대안’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이번 대회에서는 선진 자본주의 나라의 NGO들이나 프랑스 사회당 같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참여 때문에 야기될 수밖에 없는 모호한 수사나 이념의 물타기에 대해서도 명확한 문제 제기와 정정의 노력들이 있었다. 가령, “시민사회”라는 모호한 말을 대신해 많은 이들이 의식적으로 “민중의 저항”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캐나다의 세계화 반대 운동가인 나오미 클라인은 “더 이상 시민사회를 이야기하지 말고 이제는 시민불복종을 이야기하자”고 제안했다.

대회 시작 전에 촘스키는 “세계사회포럼이 새로운 인터내셔널로 발전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때 많은 이들은 이 노학자의 지나친 이상주의에 대해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2차 대회가 끝난 지금, 사람들은 주저 없이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말할 수 있다는 분위기다. 그 정도의 규모가, 그 정도의 수준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럴 때가 됐다.

이제는 ‘다른 세계’의 적들을 직시할 때

초기에 한 번만 하고 끝내는 것으로 시작됐던 세계사회포럼은 이제 매년 열리는 인류의 축제로 정착했다. 앞으로 한 동안 이 정도 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곳으로 브라질 남부만한 데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9·11 테러 이후 아메리카 제국의 공안 한파가 휘몰아치는 가운데에도 세계사회포럼은 불과 1년 만에 괄목한 만한 발전을 이뤘다. 또한 노동자·민중의 역량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지구 곳곳에서 제2, 제3의 포르투 알레그레가 등장할 것이다. 이번 대회에서, 월드컵 대회 기간 중 세계 민중의 행동의 날을 갖자고 제안해 박수를 받은 한국도 유력한 후보 중의 하나임을 우리는 믿는다. 하지만 세계사회포럼 2차 대회가 암시한 우리의 미래가 꼭 장밋빛만은 아니다. 첫번째로 주시해야 할 것은 세계사회포럼이 보여 주는 사회운동의 생명력과 그것을 대변해 줄 정치적 대안 사이에는 커다란 ‘어긋남’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회운동이 발산하는 활력과 다양성에 부응하는 정당이 세계에는 브라질 노동자당 정도뿐이다. 세계사회포럼 이전에 노동자당이 추진하던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치세력간 연대 시도인 ‘상파울루 포럼’이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컨센서스’ 등이 모두 실패로 끝나고 난 뒤의 성과물이 세계사회포럼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씁쓸하게 시사해 주는 바가 있다. 두번째로 직시해야 할 것은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구호의 반대쪽 면이다. 우리가 “대안이 없다”는 자조에서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자신감으로 돌아서는 순간, 그 “다른 세계”의 적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세계사회포럼이 진행되는 바로 그 순간, 노동자당이 여당으로 있는 상파울루 주에서 노동자당 지도자들에 대한 살인 테러가 계속됐다는 사실은 우리가 잊고 있던 적의 실체를 다시 보여 주었다. 그리고 세계 노동자·민중의 대안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이 순간, 그 적은 아메리카 제국주의임을 우리는 목격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그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제 이러한 과제들을 직시해야 한다. 세계사회포럼 2차 대회는 전 세계 노동자·민중으로 하여금 이를 확인케 했다는 점에서도 확실히 뜻깊은 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