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육식의 종말》 - 제레미 리프킨,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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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종말》 - 제레미 리프킨, 시공사
임미정
1986년 맥도날드로 대 표되는 패스트푸드에 반대해 슬로우푸드 운동이 시작된 이후 “우리가 먹는 음식들이 정말 인간과 환경에 유익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최근 SBS의 ‘잘먹고 잘사는 법’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된 이후 채식 열풍이 우리 나라를 강타하고 있다. 산모의 모유에서 허용 기준치의 14배가 넘는 다이옥신(인류가 만든 최악의 독성 물질인 다이옥신 1그램이면 몸무게 50킬로그램의 성인 2만 명을 죽일 수 있다)이 나오는 현실에서 매일 티스푼 두 개 분량의 화학성 식품첨가제를 먹어야 하는 현대인들이 안전한 먹거리를 찾으려고 하는 것을 호사스런 사치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노동의 종말》, 《엔트로피》의 저자 제레미 리프킨이 쓴 《육식의 종말》은 육식 위주의 음식 문화에 대한 비평서다.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몇 주 동안 의학·건강 분야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리프킨은 육류 중에서도 단백질 사다리 꼭대기에 위치한 쇠고기 식생활을 집중적으로 비판한다.
리프킨의 논점은 단순하다. 쇠고기 대량 소비는 근대 산업사회의 특징이다. 쇠고기 위주의 육식 문화는 환경을 파괴하고 인류를 병들게 만들며 기아를 부채질한다. 따라서 육식이 아닌 채식 위주의 식생활로 바꾸자는 것이다. 소를 뜻하는 “cattle”은 자본을 뜻하는 “capital”과 어원이 같다. 근대 산업사회 이전만 해도 소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졌고 소수 유목민이나 특권 지배 계급의 음식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미국 축산업자들은 대규모 축산 단지 건설을 위해 인디언들을 쫓아내려고 인디언들의 식량이 되는 버펄로를 대량 도살했다. 남미의 축산업자들은 열대우림 파괴를 저지하려던 치코 멘데스를 살해했다.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소는 12억 8천마리로 추산한다. 이 소들의 사육 면적은 전세계 면적의 24퍼센트를 차지하며 세계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3분의 1을 먹어치운다. 특히 미국에서 생산된 곡물의 70퍼센트가 소의 사료로 소비된다. 소의 사료로 사용되는 곡물을 인류가 섭취한다면 10억의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한다. 한 쪽에서는 수백만의 인류가 기아로 죽어 나가고 인류의 다른 일부는 과도한 육식 때문에 암, 당뇨병, 심장질환으로 죽어 간다. 1984년 에티오피아는 기근으로 하루에 수천 명이 죽어나가는데도 농경지의 대부분을 가축 사료용 아마씨를 재배하는 데 사용했다.
소가 처음부터 곡물을 먹었던 것은 아니다. 지방질이 촘촘히 박힌 부드러운 쇠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미국의 축산업자들은 소에게 옥수수를 먹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는 원래 초식동물이기 때문에 곡물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위에 농양(고름)과 같은 질병이 생긴다. 그러면 그 쇠고기와 함께 농양도 갈려 햄버거 패티가 된다. 대규모 축산단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메탄가스는 지구 온실가스의 12퍼센트를 차지하며 열대우림을 파괴한다. 햄버거 한 개를 만들기 위해서는 약 0.9제곱미터의 목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는 햄버거 한 개를 만들기 위해 대략 75 킬로그램의 생명체가 파괴되고 20∼30종의 식물, 100여 종의 동물이 파괴된다. 현대 축산업에서 소가 사육되고 도축돼 식탁에 오르는 과정은 인간의 생명이나 안전과는 거리가 멀다. 축산업자들은 어린 송아지를 유순하게 길들이기 위해 거세를 하고 화학연고제로 뿔을 태운다. 6개월에서 11개월 동안 성장한 뒤에 살을 찌우기 위해 기계식 비육장으로 보낸다. 살을 찌우기 위해 소들은 움직일 수 없는 비좁은 콘크리트 우리에 갇히고 최단 기간에 무게를 늘리기 위해 항생제와 살충제, 호르몬제와 스테로이드제가 사용된다. 여기서 사용되는 물질들은 그대로 인체에 축적되어 암을 발생시킨다. 심지어 축산업자들은 소를 살찌우기 위해 마분지와 신문, 톱밥, 돼지나 닭의 분뇨를 사료로 먹이고 시멘트 가루도 먹인다. 1904년 업톤 싱클레어는 〈정글〉이라는 소설에서 시카고의 비위생적인 도축 산업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해 미국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이 소설이 준 충격으로 도축 과정의 위생기준이 강화되었지만 그 뒤 신자유주의의 등장으로 검역 제도와 위생 기준이 대폭 완화되었다. 그 결과 “쥐들은 모두 냉각기 위에 올라가 있다가 밤이면 고깃덩이 위를 내달리며 마구 갉아 먹는다.”이 책은 축산업의 형성 과정, 쇠고기의 생산과 소비 과정을 통해 이윤과 시장 효율성 위주의 사회가 어떻게 인간의 생명과 환경을 위협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저자의 폭로가 워낙 생생하고 다채로와서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상당 기간 고기를 먹기가 어려울지 모르겠다. 그러나 제1세계 선진국 노동자들의 육식 문화 그 자체가 기아의 원인이라거나 쇠고기를 먹는 것이 성차별과 국수주의, 계급 차별을 낳았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예컨대 수많은 유태인을 학살한 히틀러는 열렬한 채식주의자였다. 채식 위주의 식생활이 개인적 선택일 수는 있지만 인위적인 단백질 사다리를 재생산하는 자본주의 식품 산업 구조가 존재하는 한 인류 전체가 채식을 선택하는 것은 비현실적 대안이다. 일반 채소보다 가격이 세 배나 비싼 유기 농산물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소수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안전한 식품을 먹고자 하는 싸움은, 이윤을 위해 건강과 환경에 해롭고 비위생적인 먹거리를 생산하는 자본주의 산업구조 자체를 바꾸는 더 큰 투쟁과 맞물려야 한다.
김정숙
우리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는 빈곤, 착취, 억압이 없는 곳이다. 반면 현재 우리는 60억 인구 가운데 55억 명이 불평등과 박탈감을 강요받는 디스토피아에 살고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성장 신화라는 주술에 최면이 걸린 채 우리의 권리를 잃어가면서 살고 있다. 일자리와 자연 환경, 공동체적 삶, 정치·사회·문화의 자율성, 사생활, 그리고 우리 유전자에 대한 권리까지 시장에 내맡겨졌다. 우리는 언제쯤 가야 효율과 합리성의 가면을 쓴 경제적 놀음에 불과한 신자유주의에 저항해 이윤보다 인간을 우선 순위에 놓을 수 있을까? 진보적 지식인들이 프랑스 진보 잡지 〈르몽드 디쁠로마띠끄〉에 기고한 글을 묶어 펴낸 《프리바토피아를 넘어서》에서 이 질문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대안 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뿐 아니라 과학과 기술의 적자인 인터넷과 유전자 기술이 우리 삶을 어떻게 소외시키는지를 고발한다. 동시에 우리에게 대안이 무엇인지 같이 고민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자고 촉구한다.
인터넷의 발전은 우리에게 사이버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모든 질병의 구원 투수로 혁명적 게놈 프로젝트가 등장했다. 각종 매체에는 내가 원하는 상품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행복해 하지 않을까? 그 이유는 실제 생활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경제적 무능력자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순수하고 완벽한 시장이라는 자유주의 유토피아를 위해 시장논리에 장애가 되는 모든 집단주의적 구조를 파괴한다. 신자유주의는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경제적 단물만 빨아먹으면서 신자유주의에 반발하는 자들은 짓밟는다. 우리가 “혁명의 시대는 갔어” 혹은 “강자가 모든 것을 가지니 어쩌겠어?” 라는 패배주의에 젖어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 미래는 어떻게 될까? 불완전 고용과 해고에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노동자가 되거나, 짜고 치는 고스톱 판과 같은 정치권에 동원되는 ‘하루살이’ 유권자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더 이상 세계화나 과학의 유토피아 같은 허울좋은 이념들을 우리의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 지겹다. 또한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경제협력개발기구, 세계무역기구, 북대서양 조약기구가 사실은 불평등의 심화와 자본과 권력의 집중을 강화시켜 우리 삶을 파탄내는 “오적”인데도 지구를 지키는 독수리 오형제 행세를 하면서 세계를 통제하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하다. 세계적인 실업, 사회복지 후퇴, 사기업화로 인한 삶의 황폐화를 우리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하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신자유주의에 맞설 수 있는 대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국제금융투기과세운동연합을 통한 공공부채 전액 탕감과 투기성 금융 자본에 대한 토빈세 부과를 위해 집단 행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둘째, 인간의 기본권인 노동권과 교육·환경·사회보장 파괴를 막기 위해서는 파업이나 시위 같은 사회 투쟁의 무기를 통해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집단의식이 부족한 서비스 부문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노동운동에 참여시켜야 한다. 셋째, 국가나 민족의 특성에 갇혀서 연대하지 못하는 현실을 지양하고, 노동운동가들이 피지배자로부터 복종을 얻어내려는 사고방식과 단절해야 한다.
넷째, 금융권력, 다국적 기업 그리고 언론이 퍼뜨리는 신자유주의만이 대안이라는 숙명론과도 결별해야 한다.
이 책은 아쉬운 점도 있다. 유럽, 특히 프랑스 중심적 사고가 여기 저기서 드러난다는 점이다. 미국과 세계은행이 그들 자신만의 이해에 따라 세계질서를 지배하려는 것에 반대해 유럽 차원의 새로운 사회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민족·국가적 한계를 넘어선 세계적 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도 유럽 중심의 사고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모순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도 결과는 똑같이 나쁠 것이고, 하물며 대안은 더 나쁘다고 생각하면서 아무 행동도 안 하는 사람들에게 신자유주의를 반대해야 하는 당위를 역설한다. 이윤 추구의 광기만 존재하는 프리바토피아(사유화 천국)는 사회 불평등과 횡포에 맞서려는 의지와 행동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
양인애
우리 나라에서 외국인은 피부색에 따라 사뭇 다른 대접을 받는다. 한국인의 피부보다 하얀 편에 속한다면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지만 불행히도 검은 편에 속한다면 거리를 쏘다니는 게 고역이다. 더구나 후자에 속하는 절대 다수는 3D업종에 종사하면서 고강도의 노동착취를 감내해야만 하는 환경에 처해 있다. 이들에게 ‘귀화’란 하층민 딱지를 떼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지만, 한편으로 그 기회가 얼마나 편협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단적인 예다. 귀화는 일정한 재산을 보유한 자, ‘노동법’, ‘재판’ 등 어려운 한자어를 구사할 수 있고 ‘산유화’ 저자까지 알 정도로 박식(?)한 자에게만 허용된다. 박노자에게 귀화 절차는 “자본주의 국가가 계급적 차별과 억압을 위한 기계에 불과하다”는 마르크스주의의 명제를 검증하는 과정이었다. 백인인데다 한국학 전공자요 대학 교수로 어렵지 않게 귀화인이 된 그는 한국 사회가 자신과 함께 귀화시험을 치렀던 아시아·아프리카인들을 배척하지 않는, 좀더 포용적이고 평등한 사회이기를 바란다. 그러한 염원에서 발간한 책이 바로 《당신들의 대한민국》이다. ‘서로 잡아먹기를 탐내는 사회, 전근대와 국가주의를 넘어서’란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한국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문제점과 대안을 그 나름의 시각으로 서술한 책이다. 더불어 남한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북한 사회를 수시로 거론하는 균형감각도 갖추었다. 박노자는 세계체제론에 입각해 한국을 준주변부 국가(비교적 고부가가치 소비재의 수출국이자 중심부 국가로부터의 자본·기술 수입국)로 규정하고 이 기준에 의거해 정치·사회·문화의 전반적인 구성을 설명한다. 준주변부 국가인 한국에서 “대학 못 가고, 직장 못 구하고, 재산 못 모은” 주변층에 대한 국가와 주류사회의 태도는 극히 폭력적이며 멸시적이지만, 학력·직업·재산을 다 갖춘 중심층에 대해서는 더없이 관대하다. 영어공용어화론이나 학위 수입 풍조에서 드러나듯이 한국 사회는 중심부 사회를 끊임없이 추종하려 하면서도, 이주노동자나 중국과 중앙아시아 등지의 가난한 교포들은 쌀쌀맞게 무시함으로써 주변부 사회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낸다. 즉 한국은 사대주의와 멸시가 뒤섞인, 오리엔탈리즘이 지배하는 사회인 것이다. 저자는 한국이 이러한 기형적인 구조를 갖게 된 것을 박정희 탓으로 돌린다. 박정희는 이 땅에서 근대화를 일궈낸 인물이자 역설적이게도 전근대적인 이데올로기를 토착화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박정희가 ‘조국 근대화’와 ‘체제의 경제적 우월성 획득’에 공이 크다는 박정희 옹호론자들의 논리를 북한 정권의 체제 변호론에 빗대어 비판한다. 천리마 운동과 같은 대중 동원을 통해 민중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줬으면서, 공업화와 강군 건설에 성공하고 남쪽을 앞질러 근대화를 이루었다고 자부하는 북한 정권의 논리와 뭐가 다르냐는 것이다. 박정희식 조국 근대화론은 한국의 전근대적 과거와 외국의 전체주의적 현대 문화가 얽힌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물이 바로 이순신 동상이다. 이 동상은 대외적으로는 열강과 군국주의에의 편입을, 대내적으로는 정통성과 충성 덕목의 강조를 의미한다. 정권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비판을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호소함으로써 원천봉쇄하려는 것이다. 민족주의의 아류작인 패거리 문화는 지역주의를 절대화한 정치판과 선민의식·배타주의에 길들여져 있는 종교계에서 그 영향력을 떨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적 문화를 확대 재생산하는 곳이 바로 군대다. 보수 정치인이 다스리고 재벌이 소유하는 권위주의적인 한국 사회에서 군대는 보스에 맹종할 충견을 기르고 훈련시키는 일종의 양견장 역할을 한다.
박정희식 전근대적 이데올로기는 한국 사회 전체에, 한국인 각자에게 철저하게 내면화되어 있다. 대학이라고 해서 더 나은 것도 아니다. 대학 또한 한국 사회의 축소판에 불과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진보적이고 반체제적인 듯하지만,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군대와 마찬가지로 위계적이고 권위적이라는 것이다. 교수와 학생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상명하달의 원칙이 지배한다. 학생들간의 관계 역시, 나이·학번에 따른 서열과 선배에 대한 복종이 강조된다. 한마디로 대학은 청년들에게 규율과 복종을 가르치는 사회 장치라는 것이다. 게다가 교수들의 종노릇을 해야 하는 조교들, 무관심과 따돌림 속에서 과다하게 노동해야 하는 시간강사들을 보자면 대학 사회 안에도 주변층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노자는 이 책을 통해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날카로우면서도 섬세하게 짚어낸다. 요컨대 그가 일관되게 제기하는 문제는 한국 사회가 전근대적 규범을 어떻게 탈피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그의 문제의식은 전적으로 동의할 만하다. 그러나 이런 과제를 성취하기 위한 동력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미 근대적 정신이 박힌 선진 자본주의 사회가 과연 우리 나라보다 본질적으로 나은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시원한 답이 없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근대’란 무엇이며, 만약 그것이 그가 말한 평등과 인권의 보장이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것이 진정 가능할 것이냐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의 책이 이런 의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그가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는 민족주의·국가주의·패거리문화·군국주의·인종주의 등 지극히 근대적인 현상들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승영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 타라 파커-포프가 쓴 《담배, 돈을 피워라》는 담배 산업에 대한 생생한 진실을 담고 있는 책이다.
담배를 피울 때 많은 사람들은 위안을 얻는다. 마음이 안정되고,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사람들이 담배 피는 것을 보면서 그들 이상으로 흡족해 하는 자들이 있다. 바로 담배 회사 사장들이다. 흡연 인구가 늘어날수록 그들의 부와 권력도 늘어날 것이다. 담배 산업은 자본가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산업이다. 세계적으로 연간 3천억 달러어치의 담배가 소비된다. 이는 멕시코의 국내총생산(GDP)을 능가하는 액수다. 이윤율도 다른 산업보다 2∼3배 높은 40퍼센트에 달한다. 담배 산업의 핵심적인 마케팅 전략은 광고다. 담배 산업은 총투자액의 15퍼센트를 광고에 투자한다. 하지만 담배 산업에는 근본적인 난점이 하나 있다. 바로 사람들이 생리적으로는 담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코카콜라 사는 음료수를 팔 때 사람들이 왜 마셔야 하는지를 설득하지 않아도 된다. 수분 섭취는 당연한 생리적 욕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코틴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담배를 처음 필 때 구역질이나 두통 등의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그래서 담배 산업에서 광고는 매우 중요하다. 담배 회사들은 담배에 자유, 성공, 세련됨 등의 이미지들을 담으려 애쓴다. 말보로는 카우보이 이미지를 통해 남성미를 강조했다. R.J. 레이놀즈는 카멜 담배를 어린이에게 팔기 위해 조 카멜이라는 캐릭터로 만화 광고를 만들었다. 필립 모리스는 영화 〈슈퍼맨Ⅱ〉 제작에 4만 2천5백 달러를 지원하고 그 영화에 간접 광고를 했다. 한편 미국 담배 회사에게 시장을 넓히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자국의 흡연율이 계속 낮아져 28퍼센트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 제3세계에 진출하는 것은 사활적인 일이다. 미국의 ‘빅 토바코’(미국의 거대 담배 회사들)는 제3세계에 진출하기 위해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고 로비를 한다. 그런 로비로 제3세계의 담배 무역에 대한 규제들이 풀렸다. 1971년부터 미국에서 TV 담배 광고는 금지됐다. 그러나 미국은 위선적이게도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담배 시장을 개방하고 광고를 허용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담배 회사들이 노리는 또 하나의 시장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다. 흡연을 빨리 시작할수록 끊기는 더 힘들어진다. 담배 회사들은 학교 주변 가게의 담배 진열을 강화했다. 억압당하고 소외된 청소년들은 숨막히는 사회에 저항하고 싶어한다. 담배 회사들은 그런 청소년들의 마음을 이용하기 위해 담배에 저항적 이미지를 덧칠한다. 담배 자본가들은 그들의 이익을 지킬 수 있다면 사람들의 건강 따위는 무시해 버린다. 그들은 담배가 건강을 해친다는 사실을 계속 부정했다. 담배산업연구위원회(TIRC)를 만들어 자기에게 유리한 연구를 하게 만들었다. 그들에게 고분고분한 과학자·의사에게는 돈을 주었다. 반면 자기에게 불리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연구원은 바로 해고해 버렸다. 미국의학협회(AMA)는 이미 1950년대에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사실을 발견해 놓고도 담배 회사에게 유리한 연구 결과들을 발표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6개 담배 회사로부터 담배 연구 보조금으로 1천만 달러를 받았다. 담배는 폐암을 비롯해 수많은 암을 유발한다. 30∼40대 흡연자가 심장병에 걸릴 확률은 비흡연자보다 5배나 높다. 담배 잎의 독성 때문에 담배 농장 노동자의 1.4퍼센트가 생담배병(GTS)에 걸린다.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면서 현실의 고통·불안·스트레스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려 한다. 담배 회사들은 사람들의 이런 심리를 악용해 자신의 배만 채우려 한다. 이 책은 이러한 담배 산업의 진실을 훌륭하게 폭로하는 책이다.
김명진
“진화론에서는 인류의 조상이 원숭이라고 하는데, 그럼 먼 훗날에는 동물원의 원숭이도 인간처럼 진화할 수 있나요?”진화론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던질 법한 질문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진화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 인간의 조상은 현재의 원숭이가 아니며 예전에 원숭이와 인간은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다른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진화의 과정이 인류를 탄생시키기 위한 방향성 있는 변화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바로 이러한 점, 즉 진화란 사다리를 오르는 것처럼 진보하는 과정이라고 주장하는 ‘인간중심적인 진화론’을 비판한다. 진화를 일정한 방향성을 갖고 움직이는 진보와 동일시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진화는 어떤 실체가 움직여 어디론가 가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풀 하우스)에 걸쳐 일어나는 변이의 확장이나 위축 현상, 즉 다양성의 증가일 뿐이다.
저자는 크게 3가지로 나누어서 이러한 주장을 펴고 있다.
첫째, 진화는 진보가 아니다. 일반 사람들이 진화를 진보라고 착각하는 것은 잘못된 교육의 탓이 크다. 우리는 과학 교과서나 아동용 과학책에서 진화의 역사를 ‘어류-양서류-파충류-포유류의 시대’로 나누고 각각의 시대에 따른 그림을 그려놓은 것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파충류의 시대에서는 하늘을 나는 공룡이나 물과 육지에 있는 공룡 몇마리를 그려놓은 그림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그림은 잘못된 개념을 퍼뜨릴 수 있다고 지적한다. 양서류의 시대든 파충류의 시대든 지구상에서 가장 압도적인 생물은 언제나 박테리아였다.
둘째, 저자는 통계학적으로 제시되는 수치들의 변화를 단순히 받아들이지 말고 시스템 전체를 이해하라고 한다. ‘거짓말, 황당한 거짓말 그리고 통계’가 세상의 3대 거짓말이라는 말이 있다. 저자는 ‘왜 야구에서 4할 타자가 사라졌는가?’라는 문제와 소위 ‘술주정뱅이 모델’이라는 것을 예로 들면서 통계적 수치들로 시스템 전체를 이해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진화의 역사에서 고등한(?) 생물이 증가해 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점은 시스템 전체에서 다양성이 증가해 왔다는 저자의 주장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물이 초기에 박테리아와 같은 형태로 생성된 이후에 다양성이 증가한다면 당연히 좀더 복잡한 생물 형태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덜 복잡한 형태로 진행한다면 더 이상 생물이기를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저자는 진화에서 우연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지구의 역사를 되돌려 다시 비슷한 조건에서 반복한다 해도 인간이 탄생할 확률은 거의 없을 정도라고 말한다. “인간의 탄생은 한순간 우연히 일어난 우주적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백악기 말에 공룡이 대규모로 멸종하고 그 이후 포유류가 증가한 것은 더 나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도킨스나 에드워드 윌슨 등의 사회생물학자들을 ‘적응주의자’라며 비판한다. 예를 들어 인간의 언어 능력은 그 능력이 갖는 장점을 획득하기 위한 적응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 뇌가 커진 결과로 인해 얻어진 ‘우연의 부산물’일 뿐이다인류는 자신을 몹시 사랑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생명 전체를 대표하는 생물도 아니고 동물 종의 약 80퍼센트를 차지하는 곤충류의 대표도 아니다. 생명의 역사를 100년 된 커다란 나무로 보자면 인류는 2~3시간 전에 자라난 자그마한 가지에 불과하다.
《풀하우스》는 인류의 관습적인 오만을 뚫고 진화의 전체 역사를 보여준다. 하지만 어려운 주제와 달리 책은 아주 명료하고 재미있다. 이 책의 독자는 저자의 제안대로 “풀하우스 패를 이길 수 있는 로열스트레이트플러시 패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조승희
법정 스릴러의 대가 존 그리샴의 새 소설 《톱니바퀴》가 나왔다. 이번에도 역시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남은 여생을 플로리다 주 연방교도소에서 보내고 있는 전직 판사 세 명으로 이뤄진 ‘동업자들’. 이들은 자신들한테서 부와 명예를 빼앗은 법과 세상에 대한 분노 때문에 비열하고 추악한 사기극을 벌인다. 그것은 동성애자 잡지에 펜팔 광고를 내어 동성애자들을 유혹해 돈을 뜯어내는 것. 펜팔 대상자가 돈이 많고 잃을 것이 많을수록 ‘동업자들’의 이익은 그만큼 짭짤하다. 이 ‘동업자들’의 그물에, 대통령 후보가 된 아론 레이크가 걸려든다. 하원 국방위원장인 아론 레이크는 14년을 국회에 몸담았지만 워싱턴 바깥에서는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가 자기 고향 주민들의 반대와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방 예산 삭감안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자 CIA는 그를 대통령 후보 비밀 리스트에 1순위로 올린다. 훤칠하게 잘 생긴데다 달변이며 골치 썩을 여자 문제나 마약 문제 따위에서 그 누구와도 비할 바 없이 ‘깨끗한’ 강경파 아론 레이크는 CIA의 마음에 꼭 들었다.
어마어마한 선거 자금, 돈세탁, 선거인단 매수, 냉전적 데마고그들… . 이 소설의 중요한 이야기 축을 이루는 아론 레이크의 선거 운동 과정은 마치 2000년 조지 W 부시의 대통령 선거 운동을 연상시킨다. 미국 기성 정치에 대한 그리샴의 풍자는 이전 작품들보다 더욱 생생하고 훌륭하다.
당선되면 국방비 예산을 두 배로 늘릴 것을 약속받고, CIA는 아론 레이크에게 선거 비용으로 1억 달러(!)를 동원해 주겠다는 거래를 성사시킨다. 냉전이 끝나 앞날을 걱정하던 군산 복합체들에게 “전쟁에 대비하시오. 적의 공격에 대비하시오. 너무 늦기전에 지금 당장!”이라는 광고 메시지를 퍼붓는 아론 레이크는 그야말로 구세주다. 군수 산업체들이 앞다퉈 그에게 선거 자금을 기부한다.
아론 레이크를 당선시키기 위해 CIA는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경쟁자들을 경선에서 조용히 사라지게 하기 위해 결코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될 어두운 사생활 파일을 들추며 위협한다. 수백만 달러를 쏟아 부어 의원들을 매수해 지지 선언을 하게 만든다. “돈으로 안 되는 것은 없다. 민주주의는 시궁창에나 처박으라지.”아론 레이크는 전쟁 위협과 테러 공포를 조장하고 인종주의를 이용한다. 심지어 CIA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 계획을 사전에 알았으면서도 수수방관한다. CIA는 이집트 주재 미국 대사관이 폭파되는 순간까지 모든 것을 숨어서 지켜본다. 검은 연기, 무너진 건물더미, 산산조각나거나 불에 탄 주검들을 재빠르게 워싱턴의 선거 캠페인에 이용한다.
“더 많은 시신이 나와야만 한다. 처참할수록 더욱 좋다. 테러 공포는 더한층 현실감을 갖게 될 테니까.” 죽음과 피를 전쟁과 선거에 한껏 이용하려는 CIA의 연출은 지금의 조지 W 부시와 꼭 닮았다.
냉전주의자들과 군산복합체의 열광적인 지지, 엄청난 돈, 정치적 공포 덕분에 승승장구하던 아론 레이크가 ‘동업자들’의 사기극에 걸려었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 CIA 국장 테디 메이너드는 아연실색한다. 누구든 털끝만큼이라도 켕기는 게 있다면 절대 피해갈 수 없는 CIA의 촘촘한 정보망에 따르면, 아론은 1백 명의 상원의원, 50명의 주지사, 435명의 하원의원 가운데 ‘도덕적으로 가장 순수한’ 사람이었다.
혹시라도 기분 나쁠 동성애자가 있다면 그럴 것 없다. 공화당원 중 동성애자와는 만나지도 않겠다고 공언할 만큼 동성애자들에게 적대적인 부시를 비꼰 존 그리샴의 재치에 동성애자라도 그저 웃음이 절로 나올 테니까.
CIA는 하루 아침에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을 아론 레이크의 비밀이 절대 새어나가지 않도록 살인까지 저지르며 필사적인 게임을 벌인다. 그에 비하면 아무 죄가 없는데도 마약 사범으로 중형을 선고받은 청년 버스터를 탈옥시키는 ‘동업자들’에게서 오히려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정병호
국 가보안법을 자기 자식보다 더 아끼는 〈조선일보〉나 한나라당 같은 우익들이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해 “언론 자유 탄압”이라 부르짖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평소에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한다던 김대중은 왜 9백 명이 넘는 활동가들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했는가? 우리 나라에선 우익들이 ‘자유’를 부르짖고, 자유주의자들이 ‘자유’를 탄압하는 기이한 일들이 벌어진다.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은 한국 최초의 자유주의 경향이었던 개화파와 〈독립신문〉의 행적을 살펴봄으로써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유주의의 본질”을 파헤치는 책이다.
친제국주의적, 반민중적
기존의 많은 연구자들은 〈독립신문〉을 민족주의 경향으로 간주하곤 했다. 그러나 저자 이나미 씨는 〈독립신문〉을 자유주의 경향으로 규정한다. 〈독립신문〉이 강조하는 ‘독립’은 “국가적 차원보다는 개인적 차원의 ‘경제적 자립’의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독립신문〉은 “유교에 의해 경시되었던 이익 개념과 상업”을 높이 평가했다. 또, “개인의 생명권, 재산권, 자유권”을 강조하며, 개인의 “경제적 독립”을 중시했다. 그런데 자유주의 성향을 띠던 개화파들은 나중에 대부분 친일파로 돌아섰다. 이익 추구와 경쟁을 숭상하던 그들은 “경쟁에서 패배할 경우 지배를 받는 것을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였다. 즉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일본과의 경쟁에서 패배한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다. 개화파들의 이런 주장의 논리적 기원은 ‘사회진화론’이다. 사회진화론은 “개인적·민족적 수준에서의 등급 매기기”를 통해, 서구와 같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회”가 “문명화된 사회”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개화파들에 따르면 조선은 “개화”를 통해 서구와 닮아가야 뒤처지지 않을 수 있다. 개화파들은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인종주의도 받아들였다. 이들은 유색 인종들의 외모, 성품, 풍속 등을 비하했다. 이러다 보니, 미국의 인디언 정복을 정당한 것으로 봤다. 한편 이들은 당시 세계를 황인종과 백인종의 싸움으로 여겨, 황인종들끼리 연대해 백인에 대항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이 황인종을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를 정당화한 ‘아시아연대론’과 흡사한 주장이다. 또, 이들 개화파는 근본적으로 민중에 적대적이었다. 저자는 개화파들이 ‘민(民)’의 개념을 대체로 민중을 불신하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들은 민중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민중을 “그들이 바라는 문명 사회[대의제 공화정]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세력”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민중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감싸안을 수도, 그렇다고 그냥 내칠 수도 없는” 딜레마를 가지고 있었다.
한국 지배계급의 본질
이 책은 일제 시대 자유주의자들의 ‘논리’를 통해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지배계급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들은 진지하게 제국주의에 맞서지도 않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를 흔쾌히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결국 한국 지배계급이 옹호하는 ‘자유’는 진지한 의미의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재산 소유의 자유’일 뿐이다. 이 책에서 자세히 다루진 않지만, 이러한 본질은 일제 시대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부르주아 자유주의는 독재 정권에 맞서기는커녕 기업가들의 이윤 획득을 위해 오히려 적극적으로 유착했다. 김대중도 우익들에 타협하기 일쑤거나 국가보안법 같은 문제에서 우익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다 보니, 진지한 자유주의자들이 염원하는 최소한의 자유민주주의적 개혁조차도 지배 계급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동 계급의 광범한 대중 투쟁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다.
결국 이 책의 교훈은 지배 계급 내의 수구파와 개혁파는 본질적으로 ‘한 몸’이라는 사실이다. 책의 가치를 두 배로 활용하고자 한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올해 대선 때 민주당 내 개혁파를 지지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연관지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정구
로자 룩셈부르크가 쓴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개량주의를 해부하고 그 핵심 주장들을 반박하여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이정표 역할을 한 책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무명의 인물로 독일에 막 도착했던 1898년에서 1899년 사이에 이 책을 썼다. 이 책이 쓰여질 당시 독일사민당은 제2인터내셔널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비스마르크의 반사회주의법이 사라진 1890년부터 이 당은 정치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했다. 이런 타락의 중심 인물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었다.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칙들을 현대화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마르크스는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고 외친 철저한 국제주의자였다. 그런데 베른슈타인은 1907년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문명화된 민족이 미개한 민족의 후견인으로 행동할 필요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자는 베른슈타인의 개량주의 주장이 당연시되던 독일사민당에서 수정주의 논쟁을 촉발시키고 이를 이끌었다. 마르크스주의 원칙들을 현대화한다고 주장했던 베른슈타인에 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반박은 직설적이고 통렬했다.
“정치권력 장악과 사회변혁 대신, 그리고 이에 대립해서 법률 개혁의 길을 찬성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같은 목표에 이르는 더 조용하고 확실하고 시간이 걸리는 길을 택한 것이 아니라, 다른 목표를 택한 것이다.”현대의 베른슈타인주의자들인 유럽의 사회민주당 정치가들은 사회변혁이란 몽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체제 내에서 작은 성과들을 하나씩 쌓아감으로써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회민주당 정부는 자본주의의 토대를 전혀 훼손시키지 모했다. 오히려 자기의 지지자들을 배반했던 실패한 역사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로자의 주장이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함을 입증해 주는 사례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나름대로 위기에 ‘적응’하여 그 고유의 모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본 집중의 결과로 나타나는 카르텔과 트러스트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커다란 혼란을 자아냈다. 룩셈부르크는 위기가 자본주의의 주기에서 필수적인 일부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아무런 문제없이 잘 나가는 듯해도 그 표면 아래에는 모순이 엄존한다고 지적했다. 그녀는 위기가 재발할 것임을 정확히 예측함으로써 베른슈타인의 헛된 낙관주의를 조롱했다.
군국주의
국가와 관련된 논쟁에서도 로자 룩셈부르크는 뛰어난 예지력을 보여 주었다. 베른슈타인은 국회에서 노동자 의원들이 다수가 되면 사회주의로 평화적 이행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로자는 국가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형태와는 달리 그 내용은 철저하게 지배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기구라고 주장했다. 로자는 심지어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국가의 외관조차 지배계급의 필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며, 필요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든지 버려진다고 지적했다. 로자는 국가의 성격에 대한 이런 주장과 더불어 국가와 경제의 상호 침투를 분석한다. 로자는 국가가 “다른 민족 집단과 서로 경쟁하는 ‘민족’ 이익의 수호를 위한 투쟁 수단”이자 “금융 자본뿐 아니라 산업 자본의 가장 중요한 투자 수단”이며 “노동 계층에 적대적인 자본의 지배를 위한 도구”라고 지적했다.
로자는 제1차세계대전으로 이어진 외교적 긴장이 아직 드러나기 전에 이 책을 썼다. 그런데 이 주장은 제1차세계대전은 물론이고 심지어 오늘날 조지 W 부시가 벌이는 전쟁의 동학을 설명하는 논리로도 손색없어 보인다. 로자가 베른슈타인에 대항해 벌인 가장 핵심적인 논점은 노동자 운동의 이론과 실천에 관한 것이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에게 변화의 수단, 즉 노동조합과 그 지도자들에 기반한 정당을 제공해 주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최종 목표가 무엇이든 간에 나에게는 항상 무이며, 운동이 전부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그는 노동조합원들이 계속 늘어나서 이들이 사회민주당에게 표를 던지는 것만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로자는 비록 노동조합이 ‘투쟁의 학교’이기는 하지만 이것으로는 자본주의를 파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노동조합을 통해 사장의 이윤을 점진적으로 장악하는 일을 시지프스의 노동이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대중파업론》에서 시지프스의 노동에 대한 독창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그녀의 약점도 드러난다. 그녀는 개량주의의 조직적·사회적 뿌리에 대한 완전한 분석에는 이르지 못했다.
로자는 베른슈타인의 기회주의가 “우리 당에 들어온 쁘띠부르주아적 요소”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의 주요 지지자들을 단순히 ‘쁘띠부르주아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들 지지자들은 사장과 노동자 사이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는 노동조합과 독일 사민당의 4천 명 관료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개량주의라는 오염의 원천은 개량주의 조직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조직 중앙에 있는 셈이다. 이와 관련된 또 다른 문제는 개량주의가 단지 노동조합과 당 관료들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노동자들은 소외와 착취에 저항하며 나름의 저항 사상들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지적대로, 그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의식은 모순적이고 불균등하며 개량주의로 곧잘 표현된다. 로자는 개량주의가 노동자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을 과소평가함으로써 당내 논쟁에서 결국은 패배했다. 비록 약점이 있긴 하지만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불후의 명작이다.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개량주의는 계속 존재할 것이며, 이 책은 그 개량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무기를 제공해 줄 것이다.
김인식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장기적 이행 과정에 놓여 있다 ― 변혁이냐 야만이냐. 국제 지배자들이 밀어붙이고 있는 경제의 세계화가 아무 도전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세계는 야만으로 치닫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국제 지배자들의 의제에 맹렬하게 저항한다면? 변혁의 희망이 싹 트고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결정돼 있지 않은 미래를 둘러싸고 세계적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 자본주의적 세계화냐 반자본주의냐. 반자본주의 운동은 21세기 국제 저항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일부가 됐다. 반자본주의 운동은 놀라운 자생성, 다양한 단체들 간의 상호 협력, ‘사상적 지도자들’의 선전 활동 등이 조화를 이룬 매력적인 운동이다. 반자본주의 운동은 자본주의 체제를 적으로 간주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에둘러 일컫는 말이다. 기업 탐욕은 이윤 체제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다국적 기업은 자본주의 기업과 동의어다. 반자본주의 운동은 단순히 공장 폐쇄나 정리해고나 복지 삭감 하나하나에 반대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의 결과는 물론 그 원인에 대항하려 했다. 그 때문에 다양한 대의들이 공통의 적에 대항해 단결할 수 있도록 했다. 반자본주의 운동은 무엇보다 많은 노동자들의 가슴 속에 담겨 있던 울분을 표현했다. 이 운동은 노동자 대중이 체제의 실패를 초래한 게 아니라 체제가 노동자 대중의 기대를 저버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운동의 성장은 중요한 논쟁들을 제기했다. “제시될 수 있는 대안과 그 대안을 실행할 수 있는 세력들, 그 세력들을 동원하는 데 필요한 전술, 그리고 이 쟁점들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는 더 넓은 체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점 등이 논쟁해야 할 문제들이다.” 지난 1월에 북막스에서 출간된 《저항의 세계화》는 반자본주의 운동과 그 운동을 둘러싼 논쟁들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 소개된 반세계화 서적들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이 책만의 장점이다. 이 책의 저자들인 크리스 하먼과 존 리즈는 영국사회주의노동자당(SWPB)의 지도적 활동가들이자 반자본주의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사회주의자들이다. 크리스 하먼은 반자본주의 운동의 성장을 분석한다. 그리고 운동의 성장이 불러 일으킨 매우 중요한 논쟁들을 다룬다. WTO 폐지를 둘러싼 논쟁, 미국 산업별노동총동맹(AFL-CIO)이 제기한 ‘사회적 조항’의 유효성을 둘러싼 논쟁, 외채 탕감이라는 단일 쟁점을 고수하자는 쪽과 의제를 확장해 더 넓은 체제의 문제들을 다루자는 쪽 사이의 논쟁, 빈곤·개발·생태 파괴를 둘러싼 개발주의자와 환경주의자 사이의 논쟁 등. 하먼은 각각의 논쟁을 다룬 뒤에 이렇게 평가한다. 신자유주의 비판자들(수전 조지, 월든 벨로, 피에르 부르디외, 나오미 클라인, 반다나 시바, 캐빈 대너허 등)은 신자유주의가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줬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들은 체제가 전 세계를 파멸시키는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대안을 제시할 때는 모순적 입장을 취한다. 특히 변화의 주체 문제가 그렇다. 예컨대, 월든 벨로는 제3세계 정부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를 대안으로 삼는다. 수전 조지는 기존 국가에 압력을 행사해 다국적 기업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본다. 어떤 활동가들은 농민이나 비정부기구(NGO)를 변화의 동력으로 여긴다. 그들 모두는 대체로 노동 계급이 사회 변화의 핵심 세력임을 놓치고 있다. 존 리즈는 세계적 차원에서 성장하고 있는 반자본주의 운동이 영국에 미친 영향을 다루고 있다. 영국에서는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에 대한 불만이 정치적 초점이 되고 있다. 그리고 산업 투쟁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리즈는 반자본주의 운동의 영향, 개량주의의 위기, 영국 산업 투쟁의 상태를 분석한다. 또, 사회주의자들이 새로운 개입주의를 위해 활동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영국 상황을 다루고 있지만 한국의 좌파들이 활동하는 데 유용한 길라잡이가 될 만한 글이다. 특히, 공동전선, 선거, 변화된 상황에 적합한 활동 방식 모색 등은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이 창조적으로 적용해야 할 과제들이기도 하다. 《저항의 세계화》는 운동 초심자들에게는 그리 녹녹하지 않을 것이다.(제1장 ‘IMF, 세계화 그리고 저항’은 기초 지식 없이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운동을 건설하고 조직하는 활동가들은 꼭 읽어 봐야 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