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에세이:
21세기 사회주의와 민주적 계획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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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양극화가 심화되고 빈곤이 확산되면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분노가 자본주의 시장경제 자체에 대한 대중적 반감으로 점차 고조되고 있다.
하지만 대중은 21세기 조건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없애고 민주적 계획경제 방식으로 더 나은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다. 이들 분노한 대중은 사회주의보다는 좌파 케인스주의의 사회적 시장경제론이나 시장사회주의와 같은 개량주의를 대안으로 여긴다.
따라서 오늘날 21세기 조건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필요성뿐 아니라 가능성, 나아가 우월성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급진좌파의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마르크스적 의미의 계획경제로서, 생산·분배·소비 등 인간의 경제생활이 시장이나 국가와 같은 어떤 외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율적으로 통제되는 참여계획경제다.
그렇다면, 흔히 계획경제의 모델로 여겨지는 소련 동유럽 블록 경제는 마르크스적 의미의 계획경제가 아니라, 일종의 관료적 명령경제였을 뿐이라는 사실이 먼저 지적돼야 한다. 소련 동유럽 블록의 붕괴를 두고 오늘날 마르크스적 의미의 계획경제가 불가능함을 증명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 시장을 폐지하고 민주적 계획경제 방식으로 경제를 조절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21세기 조건에서 시장 폐지의 불합리성 또는 계획경제의 불가능성 명제는 우리 나라 진보 학계에서는 거의 ‘공준’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 나라 진보 학계를 장악하고 있는 좌파 케인스주의자들이나 시장사회주의론자들은 21세기 세계화·정보화와 같은 변화된 조건에서 시장 폐지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효율성 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물론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스탈린이 강변했던 ‘일국사회주의’를 건설하기가 점점 어렵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국사회주의’는 고전 마르크스주의가 지향하는 국제적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세계화는 각국 자본주의의 상호연관을 증대시켜 국제적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더 성숙시키고 있다.
한편, 정보와 복잡성이 천문학적으로 증대한 조건에서 시장이 아닌 계획에 의거해 자원을 배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엄청난 비용을 수반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21세기에 고도로 발전한 IT 기술 덕분에 지난 20세기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상세한 계획의 입안과 실행이 가능해졌다. 예컨대, 오늘날 모든 상품에 부착된 “바코드”를 활용한다면, 전국적·전세계적 수준에서 대부분의 재화의 생산과 재고, 물류의 통합 관리와 소비자 수요 조사가 가능하다. 실제로, 개별 기업 수준에서 이와 같은 계획은 이미 첨단 수준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이와 같은 계획이 개별 기업 수준에 국한되고 사회 전체에서는 극심한 경쟁과 생산의 무계획성이 득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령 모든 기업들의 재무제표를 웹사이트에 공개하는 것이 의무화된다면, “구글”과 같은 검색엔진을 통해 이를 수집·분석해 전국적·전세계적 규모에서 생산과 투자를 계획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고타강령 비판〉에서 제안한 구상, 즉 화폐와 가격을 폐지하고,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자원을 배분하고 소득을 분배하는 구상은 오늘날 실제로 실행 가능하다. 즉, 마르크스적 의미의 경제 계획 입안에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로 구현된 노동시간의 계산 작업도 오늘날 발전된 컴퓨터 기술을 이용한다면 단 몇 분이면 충분하다.
이를 통해 각자는 자신이 수행한 노동시간만큼 “노동증서”를 받고(물론 교육·의료와 같은 “사회적 소비”와 투자·기술혁신에 필요한 “사회적 축적”기금 부분은 공제돼야 한다), 이 “노동증서”를 가지고 이와 똑같은 노동시간이 구현된 소비재를 구입한다는,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 초기 단계”의 평등주의적 분배 원리를 실제 현실로 만들 수 있다.
나아가, 오늘날 정보화의 핵심인 인터넷에 기반한 네트워크의 발전은 마르크스적 의미의 계획, 즉 진정한 의미의 참여계획, 아래로부터의 계획을 가능하게 한다. 예컨대, 온라인 토론과 인터넷 투표를 결합할 경우, 고대 아테네와 같은 직접민주주의 원리를 경제와 정치 영역에 광범하게 적용할 수 있다.
따라서 계획경제에서는 개성과 자유가 억압되고, 민주주의의 후퇴와 계획 기구의 비대화·관료화가 필연적이라는 하이예크의 비판이나, 이와 같은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서 시장 기구의 도입이 필수적이라는 알렉 노브나 존 로머 같은 시장사회주의론자들의 주장은 인터넷 네트워크에 바탕을 둔 참여계획경제의 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한편,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최근 알렉스 캘리니코스도 주목하는 앨버트의 《파레콘》이나 드바인의 ‘협상조정’모델은 아래로부터의 참여계획을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적 의미의 계획경제의 정신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고타강령 비판〉에서 마르크스가 제안한 노동시간 단위 계산을 배격하고, 신고전파적 “지시가격”앨버트)이나 리카도적 “생산가격”드바인)에 의거한다는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그들은 결국 시장사회주의론으로 퇴행할 가능성이 있다.
마르크스적 의미의 계획경제에서는 분업의 폐지를 통해 노동 소외가 극복돼 노동 의욕이 비약적으로 증대되고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향상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생산자들이 아래로부터 참여하므로 오늘날 기술 혁신에 결정적인, 생산현장의 ‘암묵적 지식’과 정보 동원이 극대화된다. 그럼으로써 자본주의에서보다 훨씬 역동적인 기술혁신이 가능해진다.
또한 이와 같은 생산성 향상과 기술 혁신의 과실이 자본의 이윤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풍요로운 삶으로 나타날 것이다. 계획경제에서는 혁신과 생산성 둔화가 불가피하다는 하이예크 등의 비판은 마르크스적 의미의 참여계획경제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모델에 대한 급진좌파의 대안적 경제 모델은 케인스주의적 사회적 시장경제나, 그 자체가 형용모순인 시장사회주의가 돼서는 안 된다. 시장경제 자체를 지양하는 마르크스적 의미의 계획경제, 즉 참여계획경제여야 한다. 이에 바탕을 둠으로써만 “노동자 계급의 자기 해방”과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으로서 “아래로부터 사회주의”가 건설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