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년:
역사유물론으로 본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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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개신교회는 올해를 종교개혁 500년이 되는 해로 기념하고 있다. 특히 10월 31일은 1517년 독일에서 당시 아우구스티누스수도원 수도사 마르틴 루터

그러나 이 기념 행위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그리스도교가 유일한 종교라거나 대표적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는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둘째,
셋째, 교회개혁은 이미 12세기 중엽 프랑스의 발도 파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17세기 중엽 영국의 청교도 혁명이 교회개혁의 대미를 장식했다. 따라서 교회개혁은 약 500년에 걸친 장기적인 역사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루터가 활약하기 한 세기 반 전 영국에서 활동한 존 위클리프와 한 세기 전 체코에서 활동한 얀 후스 등이 교회개혁의 선구자 격인 인물들이었다. 위클리프는 죽은 뒤 이단으로 몰려,
그러나 위클리프는 롤라드 파를 지지자들로 남겼고, 후스도 두 종파
교회개혁은 크게 세 가지 경향으로 나타났다. 국가에 대한 태도가 기준이다. ⑴ 루터와 칼뱅 등에 의한 국가 연계 또는 국가 주도 교회개혁. ⑵ 아나뱁티스트들이 주도한 국가 반대 또는 국가 회피 교회개혁
지면 제약상 이 글에서는 500주년을 계기로 현재 회자되고 있는 루터의 교회개혁에 집중하기로 하자.
루터 사상이 대중적 호소력이 있었던 이유

루터와 교회개혁가들의 시대는 봉건제의 태내에서 시장이 잉태되고 있던
비록 더디기는 했어도 봉건제 전 시기를 아우른다면 생산력이 증대했다. 그 결과 상업용 작물의 수요가 증대했고, 도시 수공업과 매뉴팩처, 원거리 무역, 상업과 금융업 등이 성장했다. 상업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선대 제도를 이용해 관습 가격보다 저가로 팔기 시작했다. 선대 제도는 상인이 가내 수공업자에게 미리 원료와 도구를 대 주고 물건을 만들게 한 뒤에 품삯을 치르고 그 물건을 도맡아 파는 제도였다.
시장과 화폐 경제가 급속히 발달하고, 시장 관계들이 삶의 많은 측면들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이에 가톨릭 교회는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사면부를 상업주의적으로 판매하고, 십일조를 내라고 교인들을 압박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봉건적 힘들과 시장의 힘들은 서로 충돌했다. 전자는 황제와 국왕, 군주, 제후 등의 국가 지도층과 추기경
또, 가끔 도시 빈민이 궁핍화와 기근에 항의해, 그리고 농민이 지대 인상이나 과도한 조세 부담에 항의해 반란을 일으켰다.
구체제는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재래 사상으로는 새로운 사회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근면과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지리상의 발견, 발명, 사업 창업, 인쇄술 발달, 기능 향상 등을 상당히 이룰 수 있었는데, 정태적인 중세 스콜라 신학보다는 르네상스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16세기 전반부에는 라틴어 사용이라는 한계 때문에 소수 지식인 엘리트에 국한된 운동이었다.
반면 루터는 평민들의 언어인 독일어를 사용했다
그의 어떤 메시지가 폭넓은 민중의 지지를 받았을까? 무엇보다, 도덕주의적으로 선행을 강조하면서 위선적으로 사면부 장사를 하는 교회 당국의 부패와 비리를 루터는 신랄하게 규탄했다. 루터의 교회 지도층 비판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당시 지배계급의 매우 중요한 부분에 대한 비판이었다.
또한 루터 사상은 교회 사제들이 인간
이 점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하에서 루터의 인간 해방
루터 사상의 골자
루터에 따르면, 최초의 인간들이 신의 말을 불신하고 신에게 불복종하는 죄를 범하는 바람에 인간은 본성이 완전히 타락했다
하지만 신은 인간 대신에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속죄하도록 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십자가형이라는 극한의 고통과 수난을 감내했다
그리스도는 부활함으로써 인간의 죄악에 승리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정의가 일부 선택된 인간들에게 넘겨진다
이는 신이 일부 선택된 인간들은 정의롭다고 인정해 준 것이고
칭의와 구원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신이 거저 베푼 은혜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의
이러한 루터 사상과 개혁에 대해 마르크스는 이렇게 논평했다.
이러한 개인화된
독일 농민전쟁
독일 농민전쟁

1524년 중엽까지 루터의 개혁은 상공업자 시민들의 선동 덕분에 도시 당국
이제 1524년 말 농민 반란은 도시의 교회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독일 교회개혁이 절정기에 광범한 대중
실제로 독일 농민들은 교회 개혁뿐 아니라 농노제 폐지, 봉건 과세 폐지, 영주의 자의적 재판 폐지 등등 다양한 사회 개혁도 강령에 포함했다.
그러나 농민의 강령은 혁명적이지 않고 오히려 엥겔스가 지적했듯이
농민들은 저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루터가 말한
농민들은 자신들이 처음에 철썩같이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했던 것이다. 그 친구는 저주받을 제후
농민전쟁이 끝나자 교회개혁은 제후들의 지지를 받으며 역사학자들이
제후들은 1529년 슈파이어에서 개최된 제국의회에서 루터 파가 축출당한 것에 항의하며 루터를 지켜 줬다. 이제 루터와 그 지지자들은 교황의 오랜 영적 지배에서는 해방됐지만 그와 동시에 새로운 지배를 받게 됐다.
크리스 하먼은 이렇게 말한다.
이런 미온함과 소심함 때문에 루터의 교회개혁은 겨우 독일 북부와 동부, 스칸디나비아반도에 국한돼 제한된 성공만을 거둘 수 있었다.
제2의 종교개혁?
요즈음 한국 개신교 대부분의 상태를 보고
한국 개신교가 대폭 개혁돼야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루터는 다수 아나뱁티스트들에 비하면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주류 개혁가들인 츠빙글리와 심지어 칼뱅보다도 보수적이었다. 칼뱅조차 공화정에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루터는 여성을 주저없이 비하했다.
루터는 또한 유대인을 혐오했다. 인종적 이유에서라기보다는 신학적 이유에서였던 듯하다. 그는 유대인들이 세상 종말에는 가톨릭 교황의 지도를 받으며 투르크인들과 동맹해 그리스도인들을 절멸시킬 것이라는 피해망상도 갖고 있었다.
그는
루터는 성소수자도 혐오했다.
비록 슬라보예 지젝 등 일부 신종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루터를 우호적으로 전용하는 것을 제안하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건 별로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듯하다. 심지어 루터의 인간 해방 사상도 인간의 자력 해방을 부정하고 오로지 신에 의한 타력 해방만을 찬양
인터내셔널 가의 가사에는 이런 구절이 포함돼 있다.
신도, 황제도, 달변가도.
노동자들아, 우리들 스스로를 구하고,
공동체의 구원을 선언하라.”
노동계급은 신의 선택과 예정, 칭의, 은총이 없어도 자력 해방을 이룰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