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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리뷰 <러시아 혁명>:
스탈린주의의 본질

5부는 스탈린 치하에서 일어난 끔찍한 억압의 사례들 ― 까레이스끼[고려인]를 비롯한 소수민족 강제 이주 정책·’제5열’[내부 스파이] 공포를 이용한 고참 볼셰비키와 해외 혁명가들 탄압 등 ― 을 아주 생생하게 잘 다뤘다.

는 ‘왜 스탈린은 대공포(대숙청)가 필요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스탈린의 “편집증에 가까운 의심”과 당시 러시아의 안보 위기 상황을 이유로 제시했다. 물론 둘 다 부분적 진실을 담고 있지만, 이것이 스탈린 공포 정치의 근본 이유를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스탈린주의는 러시아혁명과 레닌주의의 자연스런 연장선이 아니었다. 스탈린은 내전 이후의 어려운 조건 속에서 레닌과 트로츠키가 지켰던 세계 혁명의 이상을 저버렸다. 스탈린은 외부 압력에 맞서 살아남으려면 제국주의 국가들과 동일한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탈린 정부의 외무장관이었던 막심 리트비노프는 “소련의 방어 능력은 더는 국제적 단결이 아니라 육·해·공군력의 가차없는 증강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런 군사력 증강을 위해서는 급속한 공업화가 필요했다. 가 인용한 스탈린의 유명한 지상명령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소련은 선진국보다 50∼1백 년이나 뒤져 있다. 그 간격을 10년 안에 좁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소련을 짓밟을 것이다.”

1960∼70년대 남한도 경험했듯이, 이런 무자비한 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독재와 지도자 숭배가 어느 정도 필요한 법이다. 가 잘 보여줬듯이, 이를 위해 스탈린은 1917년 혁명에 헌신했던 사람들을 모두 숙청해야 했다. 스탈린주의와 볼셰비즘 사이에는 피의 강물이 흘렀던 것이다. 스탈린 치하의 극심한 억압은 후진국들의 ‘자본의 본원적 축적’ 과정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근본으로 다르지 않았다.

5부는 러시아 혁명이 세계에 미친 영향도 다뤘다. 첫째, “소련 공산주의는 히틀러와 독일 나찌즘의 탄생에 기여했다.” 둘째, 식민지 해방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셋째, 냉전기 미국과의 대결 국면에서 한국전쟁, 쿠바혁명과 베트남전쟁 등에 영향을 미쳤다.

히틀러

그러나 는 각 내용을 간단히 지나치듯 다룬 데다 부적절한 설명도 있었는데, 여기서는 지면관계상 첫 번째 주장의 문제점에 대해서만 다뤄볼까 한다.

는 리처드 파이프스 같은 냉전주의 우익의 권위에 기대 이런 주장을 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유산이 남아 있던 1920년대 초·중반에 독일에서 히틀러의 영향력은 보잘것없었다. 1923년 11월 히틀러의 ‘비어홀’ 폭동(뭔헨 폭동)은 웃음거리였을 뿐이다.

나찌가 득세할 수 있는 사회 상황을 조성한 것은 자본주의의 엄청난 위기와 독일 혁명의 패배였지, 러시아 혁명이 아니었다. 오히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1918∼23년 독일 혁명을 고무했다.

나찌가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29년 대공황 이후였다. 이 때 소련에서는 강제 공업화와 강제 농업 집산화 등 스탈린 반혁명이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스탈린주의는 나찌의 정권 장악에 부분적 책임이 있다. 스탈린이 장악한 코민테른의 방침 때문에 독일에서 나찌에 맞서는 사민당과 공산당의 공동전선이 건설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에서 일어난 반혁명의 한 결과이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산물은 아니었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역사적 분석과 그것의 영향에 대해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가 보여준 사실들을 한 줄로 꿸 수 있는 이론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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