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이라크 다음 시리아를 공격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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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와 레바논의 역사는 제국주의가 중동 지역에 개입해 온 방식을 보여준다.
2월 14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레바논 전 총리 라피크 알-하리리가 암살되자 미국 정부는 시리아로 초점을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미국은 신속하게 시리아가 레바논의 안정을 해치고 테러리즘을 후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2004년에 미국은 시리아의 바트당 정부가 이라크의 저항 세력을 돕는다면서 시리아에 대한 제재를 시작했다. 몇 달 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시리아 군대의 레바논으로부터의 철군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시리아에 대한 관심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19세기이래 제국주의 국가들은 레반트의 국가들에게 눈독을 들여왔다. 오늘날의 시리아와 레바논은 19세기 당시 오토만 제국의 일부였고, 이스탄불로부터 통치를 받았다. 오토만 제국이 몰락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1916년 사이크스-피코 비밀 협정을 맺고 레반트를 나눠가졌다. 이 협정을 통해 영국은 팔레스타인· 이라크·신생 요르단 왕국에 대한 통제권을 가졌고, 레바논과 시리아는 프랑스의 영향권에 포함됐다. 영국 정부는 프랑스와 중동 국경선을 놓고 다투는 동시에, 아랍 족장들에게 오토만 제국에 맞서 싸우라고 격려했다. 1920년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의 장자인 파이잘 국왕[emir]이 아랍인의 봉기를 이끌었고, 다마스커스에서 아랍 왕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독립을 쟁취하려는 파이잘의 노력은 프랑스 군대에 의해 분쇄됐고, 그는 영국의 후원아래 허둥지둥 바그다드로 도망쳐서 이라크 국왕이 됐다.
이후 25년 동안, 시리아는 국제연맹의 위임 통치령 하에 프랑스에 의해 통치됐다. 프랑스는 분열지배 전략을 사용했고, 식민주의는 시리아 사회에 심각한 종파주의[파벌주의, sectarianism]의 유산을 남겼다. 프랑스는 레바논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면서 자신의 전통적 동맹인 마론파 카톨릭교도들이 인구의 절반 이상[wafer-thin majority]을 차지할 수 있도록 국경선을 그었다. 마론파 카톨릭교도들은 드루즈파·수니파·시아파 무슬림 들에 대해 우위를 보장받았다.
시리아에서는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저항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1925∼26년 동안 식민 통치에 반대하는 거대한 봉기가 발생했고, 프랑스는 수도 다마스커스를 두 차례 폭격한 후에 가까스로 진압할 수 있었다.
마침내, 1946년에 발생한 또 다른 대중 봉기 때문에 프랑스는 군대를 철수해야 했다. 첫 번째 독립 정부를 구성한 지주와 상인 들은 농민의 저항 뿐 아니라, 더 많은 임금과 더 나은 노동조건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에 직면했다. 급진 정당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1954년에는 아랍 세계 최초의 공산당 의원이 선출됐고, 범아랍 단결을 통해 제국주의를 무찌른다는 바트당의 이상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1947년에 시리아 학교 선생이었던 미쉘 아플라크[michel aflaq]가 창당한 바트당은 비록 많은 농민의 지지를 얻었지만, 소수 엘리트의 행동에 기초한 당이었다.
군사 쿠데타
1958년에 시리아 바트당은 수에즈 운하 국유화로 수많은 아랍인의 영웅이 된 이집트의 군사 지도자인 가말 압둘 나세르[나시르]에게 시리아와 이집트로 구성된 통일아랍공화국의 대통령이 돼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통일아랍공화국은 나세르의 토지 개혁에 반대하고, 그의 산업과 금융 국유화 계획을 우려한 일부 시리아 자본가들의 저항에 직면해서 1961년에 붕괴했다.
다마스커스에서 일어난 군사쿠데타로 권력은 다시 한 번 자유주의 민간 정부에게 넘어갔다. 바트당은 1963년 또 다른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바트당은 소련을 본 딴 국가자본주의 경제 정책에 반제국주의 수사와 태동하는 팔레스타인 게릴라 집단에 대한 지지를 결합시켰다.
1967년에 이스라엘이 이집트·요르단·시리아를 공격해서 골란고원을 점령한 것은 바트당에게는 재앙이었다.
1967년의 패배는 바트당 내 군부의 지위를 강화시켰고, 군부의 유력 인사였던 하피즈 아사드는 1970년에 '교정 혁명[corrective revolution]'이라 불린 내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아사는 그의 전임자들의 좀 더 급진적인 국가자본주의 정책을 버리고, 경제를 부분적으로 자유화했다.
그리고 1976년에 시리아 군대는 레바논 내전에 개입했다. 레바논의 성장하는 민족주의 운동은 난민촌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과 레바논 좌파를 포괄했다. 이 운동은 레바논의 친서방 정부를 위협했고, 마론파 카톨릭교도들의 우위를 보장했던 종파주의 체제에 도전했다.
1975년에 이러한 저항이 레바논 내전으로 연결됐고, 처음에는 우파가 패배했다. 미국의 동의 아래 시리아는 민족주의자들의 승리를 가로막기 위해 개입했다. 마론파 민병대들을 지원했던 미국과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레바논 점령을 승인했다.
1976년 4월에는 시리아 군대가 텔 알-자타르에 있는 팔레스타인 캠프를 포위하는 동안 마론파 민병대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했다. 1982년 9월에 이스라엘은 샤브라와 샤틸라의 팔레스타인 캠프에서 같은 짓을 반복했다.
좌파의 패배 이후, 레바논 우익은 시리아에 등을 돌려 이스라엘과 손을 잡았고, 이스라엘은 1978년과 1982년에 레바논을 침략했다.
수년 간의 파벌싸움과 편가르기 후, 1989년에 시리아와 아랍 정부들은 평화 협정인 타이프협정을 중재했고, 내전은 공식적으로 종결됐다. 타이프협정에는 시리아 군대의 점진적 철군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시리아 군대가 레바논 북부와 베카 계곡으로 이동했지만, 시리아는 레바논 정치에서 계속 지배적 역할을 했다.
이 전쟁 기간 동안 시리아 정권에 대한 위협도 생겨났다. 시리아 군대는 레바논 민족 운동의 단호한 저항에 직면했고,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시리아 내부의 분노도 커졌다. 1980년에는 타드무르 근처 사막에 위치한 거대한 수용소에서 봉기가 발생했고, 1천 명의 사망자를 내고서야 진압됐다. 더 심각한 것은 하마에서 수니파 이슬람주의자들인 무슬림형제단이 주도한 반란이었다. 이 반란은 1982년 봉기에서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바트당 정권은 살아남았다. 이 봉기에 대한 보복으로 시리아 군대는 최소한 3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고, 사실상 하마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1980년대에 시리아 경제는 정체했고, 시리아의 초강대국 후원자였던 소련은 쇠퇴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리아에게 1991년 걸프 전쟁은 서방 강대국과 다시 손을 잡을 수 있는 기회였다.
아사드 정부는 미국이 주도하는 반이라크 연합에 가세했다. 이런 편바꾸기로 미국의 지원이 곧장 재개돼지는 않았지만, 유럽연합과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를 호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석유 생산의 확대 또한 1990년대 경제 성장에 기여했다. 쉘, 토탈피나와 엘프-아퀴텐느 등이 새 유전에 투자했다. 시리아 지배계급은 해외투자를 장려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대다수의 평범한 시리아인들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았다. 시리아 노동자 가운데 4분의 3이상이 다섯 가족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최저임금보다 적게 받았다.
1990년대에는 시리아와 레바논 사이의 경제 협력이 증가했다. 1991년에 그들은 레바논 정치에서 시리아의 지배적 역할을 승인하는 '우애와 협력협정'을 체결했다.
경제 정체
레바논 지배계급의 일부는 시리아 경제의 자유화를 최고의 투자 기회로 여겼다. 최근 시리아와의 불편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라피크 하리리는 오랫동안 이러한 협력 관계를 옹호해왔다.
또, 레바논 자본가들은 값싼 시리아 노동력으로부터 혜택을 입었다. 거의 1백만 명에 가까운 수의 시리아 노동자들이 레바논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레바논의 실업율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경제가 정체하고 있다. 하리리의 장례 행렬에 거의 2십만 명이나 참가한 배경에는 이러한 요인도 있다.
2000년에 시리아 지도자 하피즈 아사드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바샤르에게 권력이 순조롭게 이양되면서 경제적·정치적 자유화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 처음에 뱌샤르 정부는 좀 더 개방적으로 보였고, 정치 사상을 논하는 포럼[토론 집단]이 시리아 전역에서 우후죽순으로 생겼다. 하지만 이러한 신혼기간은 오래가지 않았고, 정부는 2001년 초에 시민사회포럼을 폐쇄하고 이 운동의 많은 주도적 활동가들을 체포했다.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관계는 여전히 모순적이다. 팔레스타인 단체들은 시리아 정부로부터 종종 정치적·재정적·군사적 지원을 받아 왔지만, 시리아 지배자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운동의 독립성을 억제해 왔다.
시리아의 지배자들은 팔레스타인 이슬람주의 단체 하마스가 다마스커스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조직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여러 명의 하마스 지도자들이 시리아에 근거해 있다. 하지만 미국과 이스라엘의 압력 때문에, 시리아 정부는 하마스가 자국에서 공개적 활동을 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
조지 W 부시는 시리아가 헤즈볼라(신의 당)을 지원한다고 비난한다. 헤즈볼라는 남부 레바논의 시아파에서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고, 1982년 이스라엘 침략에 맞선 저항을 조직하기도 했다. 2000년 5월에 이스라엘 군대가 남부 레바논으로부터 철군했고, 헤즈볼라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의 군사적 패배를 안겼다.
미국은 시리아 지배자들이 저지른 범죄에는 이의가 없다. 그 때문에 부시가 전쟁 위협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이유는 시리아가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에 반대하면서 말뿐이지만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레바논의 헤즈볼라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시리아는 부시의 이라크 침략을 지지하지 않았다. 미국의 시리아 공격은 중동에서 미국의 이해관계에 충분히 굽실거리지 않은 세력들에게 타격을 입히는 것이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