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법 개정:
대기업들의 호들갑 때문에 법안에 진보 색칠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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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일 여야가 상법 개정안을 본회의에서 처리했다. 지난 4월 대통령 권한대행 한덕수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됐던 법안을 여야가 합의해 다시 통과시킨 것이다. 이 점에서 ‘이재명 정부 1호 협치 법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번 개정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기업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기존의 ‘회사’에서 ‘회사와 주주’로 확대, 감사위원 선임 시 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을 3퍼센트로 제한하는 ‘3퍼센트 룰’ 확대, 대기업의 전자 주주총회 의무화, 사외이사의 독립이사 전환.
소액주주의 권리 보호를 위한 법적 장치를 강화하고, 기존 대주주 중심의 지배구조를 견제하겠다는 것이 주된 취지다. 예를 들어, 감사위원회 구성에 대한 대주주의 의결권이 제한되면 외부 감시 기능이 강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지난 3월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본회의에서 통과시킨 상법 개정안보다 센 내용이다. 당시엔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와 ‘전자 주주총회 개최 의무화’ 등만이 담겼다.
민주당은 추가적인 상법 개정도 예고하고 있다. 민주당의 ‘코스피5000 특별위원회’는 최근 기업의 자사주 의무 소각 방안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취임 한 달 기자회견에서 “자본시장 선진화를 통해 코스피 5,000 시대를 준비하겠다”고 다시금 강조했다.
이처럼 민주당과 이재명 정부가 상법 개정을 계속 추진하자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의 기업주들까지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소액주주들이 제기하는 온갖 소송에 휘말릴 것이라는 둥, 신속한 경영 판단을 내릴 수 없어 경제 전반의 활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둥 우려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한덕수가 지난 4월에 거부권을 행사했었던 것이고, 국민의힘 의원 상당수가 이번 법안 통과에 찬성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상법 개정안이 기업들의 이윤 추구를 방해할 것이라는 우려는 침소봉대된 것일 뿐이다. 이번 개정안은 경영권을 가진 대주주의 권한을 일부 제한하고 소액주주들의 권익을 조금 높여 주는 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재벌 총수 일가를 비롯해 한국 기업들의 대주주들은 자신들의 막대한 경제 권력을 이용해 소액주주들을 등쳐 먹는 일을 흔히 벌여 왔다.
자신들의 기업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 제멋대로 계열사들을 합병하거나 분할하고, 자신들이 세운 기업에 일감을 몰아 주고, 기업의 돈으로 자사주를 사들여 자신들의 경영권을 방어하는 일 등을 해 온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액주주들은 주가 하락이나 배당 감소 등의 손해를 입었다. 문재인 정부 동안에 한국의 주식시장 투자자 수가 1,400만 명까지 늘어났는데, 아마 이들 중 상당수는 대주주들의 횡포로 주가가 폭락하는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법 개정은 노동계급 사람들을 위한 개혁이 아니다. 상법 개정 논란은 대주주와 소액주주가 기업 이윤을 어떤 비율로 나눌 것인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상법 개정으로 주가가 오르고 배당이 좀 더 늘어나, 약간의 돈을 쥐게 되는 개미 투자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외의 소득이 노동계급 대중의 삶을 크게 바꿔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어지간한 큰손들이나 국내외 사모펀드들이 대주주를 위협해 이득을 얻는 게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번 상법 개정은 ‘주주를 위해’ 기업이 더 공세적으로 이윤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화해 노동자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다. 최근 홈플러스 노동자들을 고통에 빠트리고 있는 MBK파트너스의 행태도 주주 이익 극대화 행태의 한 사례다.
실제로, 이번 상법 개정안이 통과될 조짐을 보이자 한국전력과 가스공사 같은 공기업의 주가가 대거 올랐다. 소액주주의 권익을 위해 상법 개정까지 추진하는 정부이니, 앞으로는 전기·가스 요금 인상을 억제해 한국전력과 가스공사의 이윤을 제한하는 정책을 쉽사리 쓰지 못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말이다.
‘재벌 개혁’ — 국힘의 반대가 구역질 나도 지지할 만한 것은 못 된다
위에서 설명한 이유로, 진보당과 민주노총·한국노총이 다른 야당의 국회의원들, 참여연대 등과 함께 이번 상법 개정을 지지한 것은 잘못이다.
특히, 참여연대는 그동안 기업의 소유·지배 구조 개편 같은 ‘재벌 개혁’을 주요 개혁 의제로 내세우며 민주당과의 협력을 중시해 왔다.
반면, 진보당과 민주노총 등은 미국식 ‘주주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해 왔다. 그러나 이번 상법 개정 논란에서는 이와 관련된 문제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기업의 소유·지배 구조 개편 같은 재벌개혁론은 대주주와 소액주주 사이에, 그리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이윤 분배를 좀 더 ‘공정하게’ 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의제이지, 노동자들에게는 별다른 득이 될 게 없는 문제다.
물론 자신들의 막대한 경제 권력을 이용해,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부를 가로채 온 재벌 총수 일가나 기업 대주주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더 많은 일자리·임금·복지를 위해 계급투쟁 방식으로 싸우는 것이어야 하지, ‘주주 권리 보호’ 같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 요구는 독과점만 없다면 시장은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작동한다는 환상만 키워 노동자들의 투쟁과 계급의식을 무디게 만들 뿐이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진정한 대안이 아니다
한편, 정의당(민주노동당)은 이번 상법 개정에 관한 성명에서 “노동자, 협력업체, 소비자, 지역주민”의 이익은 빠졌다는 점을 옳게 비판했다:
“주주 자본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 주주의 이익만을 고려한다면, 은행이 가계부채로 막대한 이윤을 얻어도 배당만 잘하면 되고, 사모펀드가 기업 수익만 빼먹고 달아나도 문제가 없다. 서민들의 삶이 어려워지고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을 수 있는데 주식시장만 살아나면 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러한 주주 자본주의 강화보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와 독일식 ‘공동결정제’ 같은 노조의 경영 참여를 정의당은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와 노조의 경영 참여가 가장 높은 수준이라는 독일에서도 그 제도들은 노동자들의 이익을 지키는 구실을 하지 못해 왔다.
독일 대기업들에는 노사가 동수 참여하는 ‘감독이사회’가 구성돼 ‘경영이사회’의 주요한 결정을 감독하도록 하는 ‘공동결정제’가 법으로 보장되고 있다.
그러나 감독이사회 의장은 사용자 측 인물이 차지하고 노사 간에 동수로 맞설 때는 의장이 2표를 행사하기 때문에, 노조가 기업 경영에 실질적인 결정권을 갖지 못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물론 독일 기업주의 상당수는 공동결정제 같은 노조와의 협의 과정이 꽤나 거추장스럽다고 불만이다. 하지만 공동결정제가 노조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점도 동시에 이해하고 있다.
공동결정제는 노조도 기업 경영에 책임을 져야 한다며 시장의 압력을 전달하고 계급 협력 정치를 강화하는 구실을 할 수 있다.
예컨대 독일의 자동차 대기업 폭스바겐은 공장 이전을 위협하며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는 데에 공동결정제를 이용해 왔다.
최근에도 폭스바겐의 수익성이 떨어지자 독일 내 공장 폐쇄를 위협해 노조 측으로부터 일자리와 임금 삭감 양보를 얻어 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대안은 노동계급이 투쟁에 나설 때 오히려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