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비판 - 구별되는 야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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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를 단지 전체주의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 숙청, 처형, 굶주림, 정치적 억압 등. 요즘 민주노동당 사이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스탈린주의 논쟁’을 봐도 그렇다.(논쟁이라고 하기에는 언쟁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스탈린주의를 파시즘과 동일시한다. 둘 모두 학살에 책임이 있는 전체주의 체제라는 식이다. 이를테면, 진중권 씨는 북한이 “아주 극악한 파쇼 체제”(〈참여사회〉 2002년 4월호)이며, 스탈린주의와 파시즘 “양자 사이의 유사성과 친화성은 부정할 수 없다.”(〈한겨레 21〉 1999년 11월 4일치)고 말한다. 심지어 “공산주의[스탈린주의]야말로 파시즘보다 극악한 정치 체제”일 수도 있다고 암시한다.(〈한겨레 21〉 1999년 11월 25일치.)
물론 스탈린이 대량 학살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다. 옛 소련이 붕괴한 뒤 모스크바 보안 경찰의 파일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그 덕분에 R W 데이비스(E H 카의 대작 〈소비에트 러시아사〉의 뒷부분을 공동 집필한 역사가)와 알렉 노브 같은 역사가들은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에서 발생한 전체 사망자 수를 처음으로 사실에 기초해 파악했다. 그들은 스탈린 체제가 매우 유혈적인 체제였다고 결론내렸다. 1937년에 35만 3천 명이, 1938년에 23만 9천 명이 처형당했다. 1944~1948년에 소수 민족 강제 이주 과정에서 14만 명이 죽었다.
여기에 덧붙여, 굴락(강제 노동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의 숫자가 1933년 2백50만 명에서 1953년에 5백50만 명으로 늘어났다. 수용소 내 사망률은 자유민들에 비해 5~9배나 높았다. 마지막으로,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의 강제 집산화에서 비롯한 기근 때문에 5백만 명 이상이 숨졌다.
그러나 우익 역사가, 일부 자유주의자, 서방 언론 들은 스탈린의 학살 규모를 지나치게 과장했다. 데이비스는 이렇게 지적한다. “우리는 아직 스탈린 시대에 처형, 가혹한 수용소 조건, 기근으로 사망한 실제 숫자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옛 소련의] 문서 보관소 자료는 … 러시아 텔레비전과 대중 일간지들이 확고부동한 사실로 끊임없이 인용하고 서방 언론들에 의해 흔히 검증된 사실로 인정받는 매우 높은 수치와 크게 다르다.”
스탈린과 히틀러를 단순히 등치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잘못됐다. 물론 둘 다 살인마이자 진정한 사회 변혁에 대한 사악한 반대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는 그래도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스탈린의 야만주의는 영국 같은 서방 국가들이 산업혁명을 밀어붙이는 데 사용했던 유혈낭자한 방법을 모방해 러시아를 공업화하겠다고 결정한 결과였다. 그러한 방법에는 무력을 사용해 농민의 토지를 빼앗기, 성장하고 있는 도시를 부양하기 위해 농촌을 약탈하기, 노예 노동의 등장, 소수 민족 지배, 아동 노동, 이런 정책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테러 따위가 포함됐다.
스탈린은 영국에서 3백 년에 걸쳐 진행됐던 일을 20년 만에 끝내려 했다. 그 결과가 단기간에 매우 집중된 사망자 수였다. 예컨대 노동 수용소 사망자 수는 대서양 노예 무역 사망자 수보다 적었다. 다만 이것은 3백 년이 아니라 25년 동안 일어났다.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의 아사자 수는 아일랜드와 인도에 대한 영국의 약탈로 인한 아사자 수보다 적었다.
소수 민족에 대한 스탈린의 억압은 끔찍했다. 1944~1945년 코카서스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체첸 인과 여타 소수민족들 가운데 4분의 1이 죽었다. 그러나 미국 자본주의는 이보다 더 끔찍하게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했다.
게다가 소수자들에 대한 스탈린의 야만은 나치의 홀러코스트 같은 것이 아니었다. 나찌는 인종적 특징을 이유로 유럽의 유대인들을 할아버지와 손자에 이르기까지 거의 싹쓸이했다. 이것이 히틀러와 스탈린의 진정한 차이다.
나치즘은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발전한 정치적 운동이었다. 나치의 야만주의는 정적이나 착취 강화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들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경제 위기로 타격을 입은 중간 계급의 좌절을 유럽 전체에서 유대인·집시·게이·정신장애자 등을 물리적으로 박멸하는 ‘십자군’ 전쟁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노동 수용소를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아예 죽음의 공장을 만들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다.
오늘날 스탈린주의가 위협하는 야만적 공포는 그리 심각하지 않다. 스탈린주의의 공포는 역사의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다 ─ 적어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과 많은 신흥공업국들에서는. 반면, 나치즘은 위기와 실업과 불안정성이 증대할 때마다 위협적인 세력으로 재등장한다.(진중권 씨는 “적어도 유럽에서 파시즘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됐다.”고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하고 있다.) 따라서 나치의 위협을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게 아니라 홀러코스트의 비할 데 없는 공포를 사람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한편, 진중권 씨는 스탈린의 정책이 레닌에서 비롯했다고 말한다. “스탈린의 정책은 레닌의 구상을 수미일관하게 실현한 것이다.”
그러나 1917년 직후 혁명적 시기에 억압의 규모와 1930년대 억압의 규모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1921년에, 혁명 정부는 여전히 반혁명 군대의 잔존 세력과 서방 정보 기관들의 암살 음모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전체 사형 집행 숫자는 1937년의 3퍼센트도 안 됐다.
사형 집행과 억압의 규모가 대폭 증가한 것은 단순히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질적으로 다른 문제다. 1936년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인원은 1928~1929년보다 1백 배나 많았다. 1936년은 스탈린이 고참 볼셰비키에 대한 지배력을 최종 완성했던 해다. 요컨대, 스탈린주의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최종적으로 패배했음을 뜻했다.
진중권 씨는 이데올로기(“국가주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북한 스탈린주의 관료와 남한 스탈린주의자(주사파)를 구분하지 않고 싸잡아 비난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심지어 주사파와 극우파는 서로 닮은 “쌍생아”라고까지 말한다. “극우파는 주사파가 필요하고 주사파는 극우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점이 진 씨 주장에서 가장 해악적인 대목이다. 왜냐하면 실천에서 지독한 종파주의를 낳기 때문이다.
남한 스탈린주의자들이 북한의 국경수비대(진 씨의 말을 빌면, “북조선 외교노선을 정당화시켜 주는 운동”)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엔엘이 역사의 반동”(〈참여사회〉 2002년 4월호)인 것은 아니다. 주사파가 북한 관료들을 지지하더라도 이 둘을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
북한 관료는 북한의 지배 계급이고, 주사파는 우리 운동의 일부다. 주사파가 국가보안법 철폐나 주한 미군 철수를 위해 우리의 지배 계급에 맞서 투쟁할 때 우리는 그들과 함께 싸울 수 있다.
남한에서 극우파와 주사파는 “쌍생아”가 아니다. 전자는 지배 계급의 일부이고, 후자는 전자가 끊임없이 박해하는 피지배 계급의 일부이다.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아니라 비할 데 없이 근본적인 계급 분단이 가로놓여 있다. 극우파의 주사파 탄압을 반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