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사냥의 전형 ─ 1692년 세일럼 마녀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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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세일럼에서 벌어진 마녀사냥의 배경에는 체제 위기에서 비롯한 정치 불안정이 있었다. 지배자들은 위기에 빠진 낡은 질서를 지키려 ‘내부의 적’을 만들었다.
지배자들의 광기 어린 속죄양 찾기는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단’ 종교, 집시처럼 사회 주변 집단들, 정치적 반대파, 심지어 지배계급의 소수파도 종종 체제를 위협하는 ‘마녀’로 몰렸다.
이런 일들은 오늘날에도 벌어진다. 이른바 ‘일심회’ 사건이 그렇다.
장기 침체한 경제, 심각한 빈부 격차, 미국 제국주의의 잔혹한 패권 전쟁이 부른 전통적 친미 이데올로기 붕괴, 기성 정치의 불안정 심화 등 ‘마녀’를 찾아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이른바 ‘일심회’ 사건은 남한 지배자들이 사회 양극화 속에서 급진화 분위기를 차단하고 이데올로기적 지형을 다시 오른쪽으로 끌고가기 위해 ‘친북 좌파’를 속죄양 삼은 전형적인 ‘마녀사냥’이다.
남한 지배자들에게 북한 핵실험은 기회였다. 그들은 북한의 위협이라는 공포심을 조장하는 데 ‘친북좌파’를 먹잇감으로 이용했다.
세일럼의 ‘마녀’들이 엉터리 재판을 받았듯이 ‘일심회’ 사건의 피해자들이 저질렀다는 ‘범죄’의 내용은 보잘 것 없다. 검사는 “국가기밀 유출” 운운했지만 ‘피고인’들이 넘긴 기밀은 기껏해야 민주노동당과 민중 운동의 내부 동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지도부와 일부 당내 의견그룹들은 마녀사냥을 방조했다. 심지어 일부 당원들은 ‘마녀’에게 돌을 던지기까지 했다.
이 점에서 세일럼 마녀사냥은 우리에게 유용한 교훈을 던져 준다. 지배자들이 벌이는 마녀사냥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일럼은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작은 마을이었다. 세일럼 마녀사냥은 1692년에 벌어졌다. 미국 극작가 아서 밀러는 이 사건을 소재로 유명한 희곡 《세일럼의 마녀들》(The Crucible:이하 《세일럼》)을 썼다. 이 희곡을 바탕으로 만든 훌륭한 영화가 다니엘 데이-루이스 주연의 〈크루서블〉이다.
세일럼 마녀사냥은 발작을 일으킨 소녀 몇 명이 자신들에게 마을 주민 세 명이 마법을 걸었다고 고발하면서 시작됐다. 이 소녀들은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에서 엄격한 청교도 도덕을 거부하는 행동들을 했다.
영화 〈크루서블〉에는 소녀들이 숲 속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이 낡은 수정 구슬을 이용해 미래의 남편을 점쳐 보는 장면도 나온다. 어른들은 소녀들에게 죄를 고백하라고 강요했다. 에비게일 윌리엄스가 주도해 소녀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마법 탓으로 돌렸다. 몇 달 동안 2백 명 이상이 마녀로 고발됐다.
20명이 세일럼 외곽에 있는, 훗날 ‘갤로스 힐’[교수대 언덕이라는 뜻]이라고 불린 곳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들의 시신은 바위틈에 버려졌다. 마녀 재판을 거부한 80세 할아버지는 무거운 돌로 눌리는 고문을 받다 죽었다. 4살 먹은 여자아이를 비롯해 수백 명이 쥐가 득실대는 감옥에 몇 달씩 갇혀 있었다. 밧줄로 목과 발이 묶이는 고문을 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사회적 낙오자 취급받던 여성 세 명이 가장 먼저 고발됐다. 티투바는 카리브 해 출신의 노예였다. 그녀는 이미 마을에서 “악마”, “마귀”라고 조롱받고 있었다. 세라 굿은 “비참한 상황과 나쁜 평판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진, 의지할 데 없고 버림받은 불쌍한 피조물”이라고 묘사된 거지였다. 세라 오스본은 교회에 나가지 않는 병든 노파였다.
그러나 머지않아 마을에서 존경받는 사람들도 박해받았다. 재판은 엉터리였다. 고발당한 사람들은 뜬소문과 험담, 에비게일 윌리엄스를 비롯한 소녀들의 요상한 얘기 따위를 근거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들은 자백하고 다른 ‘마녀’의 이름을 대거나 아니면 사형을 당하는 끔찍한 선택을 강요받았다.
사람들이 고발될 때마다 더 많은 자백이 강요되고 더 많은 고발이 뒤따랐다. 세일럼에서 가장 크고 힘센 가문인 퍼트넘 가(家)의 정적(政敵)들 또는 그 관련자들이 감옥에 갇히는 경우가 늘어났다.
‘귀신 들린’ 소녀의 아버지인 토머스 퍼트넘이 마녀사냥에 앞장섰다. 그와 마을 유지 세 명이 마녀 행위 관련 고소를 대부분 제기했다. 그는 마녀 재판을 이용해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복수를 했다.
예를 들면, 사형당한 세 자매 ― 레베카 너스, 메어리 이스티, 새러 클로이스 ― 는 탑스필드 가문의 딸이었는데, 탑스필드 가와 퍼트넘 가는 오랫동안 토지 분쟁중이었다. 피고인들의 토지와 재산은 정부(흔히 지방 보안관)가 몰수했다. 나중에 퍼트넘은 그 중 많은 재산을 헐값에 사들였다. 다른 명망가들도 마녀사냥을 부추겼다.
판사 윌리엄 스토턴은 “이 땅에서 마녀들을 제거하겠다”고 장담했다. 그는 마녀사냥 광기가 가라앉은 이듬해에도 사형에서 면제된 임산부를 교수형에 처하라고 요구했다. 스토턴은 나중에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됐다.
그러나 세일럼에는 처음부터 마녀사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무고한 피고인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에 서명했다. 마녀로 고발당할 수 있는데도 용기 있게 자신의 생각을 밝힌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세일럼》의 주요 등장 인물인 선술집 주인 존 프록터였다. 존경받는 지역 명망가 상당수가 사형당하는 것에 항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영국인 총독은 두려움을 느꼈고, 결국 마녀사냥은 중단됐다.
그러나 피고인들의 다수는 여전히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달 동안 감옥에 갇힌 채 토지와 집을 잃었다. 감옥에 있는 동안 터무니없이 많은 소송비용을 대느라 가난해진 사람도 많았다.
왜 세일럼에서 이런 사건들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을까? 당시 메사추세츠 주는 정치·경제적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사람들은 두렵고 불가사의한 세상사를 이해하고자 종교에 의탁했다.
많은 사람들이 ‘악마’가 살아있는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닌다고 생각했고 인간의 불행을 악마 탓으로 돌렸다. 전쟁과 질병, 가난으로 요절하는 경우가 흔했다. 마녀사냥이 있기 전에도 몇 년 동안 천연두가 여러 번 세일럼을 덮쳐 많은 사람들, 특히 많은 아이들이 죽었다.
청교도 정착민들은 원주민 부족들과 오랜 전쟁을 벌여 원주민 땅을 강탈했다. 고발인 가운데 한 사람인 머시 루이스는 그런 전투에서 부모가 죽는 것을 목격한 17세의 하녀였다.
영국 식민지인 매사추세츠는 정치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했다. 1684년 영국은 식민지 자치를 허용한 조례를 폐기했다. 1689년 민중항쟁이 일어나 증오의 대상인 영국 총독 에드먼드 안드로스 경을 몰아냈다. 이 때문에 마녀사냥이 일어나기 전 3년 동안 매사추세츠에는 총독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1692년 세일럼을 휩쓴 두려움과 의심, 광기의 분출을 위한 비옥한 토양이 됐다. 이 광기의 분출에 기름을 끼얹은 것은 마을 유지 일부가 마녀사냥 열풍에 뛰어든 것이었다.
옛 유지들인 청교도 농장주의 다수는 신흥 상업 자본가들의 성장에 위협을 느꼈다. 기존의 소수 특권층은 마녀사냥을 이용해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고 사회 질서를 지킬 수 있다고 여겼다.
세일럼 마녀사냥은 자본주의가 막 발전하기 시작한 3백여 년 전에 일어났다. 자본주의는 합리적 주장이나 과학적 논쟁과 맞물려서 성장했다.
그러나 마녀사냥은 사라지지 않았고 현대 세계에서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나이를 먹어서도 젊은 시절의 만행을 되풀이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자유가 아니라 굶주림·빈곤·절망을 가져다줬다.
힘이 없어 모든 것을 빼앗겼다고 느낀 사람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부른 전쟁·공황·불안정 앞에서 속죄양을 찾으려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체제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1930년대 초 독일에서 나찌는 그런 절망감을 자양분 삼아 성장했다. 소수 특권층이 부추긴 유대인 속죄양 삼기는 대공황기에 광적인 수준에 달했다. 아서 밀러는 또 다른 세일럼 식 마녀사냥이 한창이던 1952년에 《세일럼》을 썼다.
1950년대에 미국의 우익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는 좌파를 탄압하기 위해 자백을 강요하고 피의 사실을 조작했다. 다른 수많은 사람들처럼 밀러도 매카시의 속죄양으로 ‘비(非)미국인적 활동조사위원회’에 소환됐다.
밀러는 매카시 마녀사냥과 세일럼 마녀사냥의 유사점을 보여 줬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비슷한 일들을 볼 수 있다. 일례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저주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해마다 수백 명이 죽는데, 특히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 그런 일이 많다. 사람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이 상황이 나빠지는 것을 ‘악마’ 탓으로 돌릴 수 있다.
가난에 짓눌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노던 프로빈스 주(州)에서는 1985~95년에 2백 명이 넘는 ‘마녀’가 살해됐다. 인도네시아의 많은 섬에서는 경제 위기로 민족 분쟁과 마녀사냥이 동시에 폭발했다.
마녀사냥은 가진 것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타나지만, 서로 경쟁하는 권력자들도 위기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를 속죄양에게 돌리려고 마녀사냥을 이용했다. 최근 영국의 소아성애자 마녀사냥도 정도는 덜하지만 비슷한 경우다.
〈뉴스 어브 더 월드〉[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이 소유한 보수 언론]의 편집자 레베카 웨이드는 자본주의 체제에 짓눌린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심을 이용한다. 그러나 그런 속죄양 삼기가 자본주의 체제의 불안정에 반응하는 불가피한 방식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 때문에 삶이 망가진 사람들이 부자들과 권력자들에 맞서 함께 행동하는 집단적 대응을 건설하는 것이 대안이다. 소외된 사람들의 집단적 행동을 건설하려면 궁극적으로 지배자들만 보호하는 비이성적 속죄양 삼기의 진정한 본질을 폭로해야 한다.
이 글은 영국의 혁명적 반자본주의 주간지 〈소셜리스트 워커〉2000년 8월 26일치에 실린 글을 번역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