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논쟁’- 쟁점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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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진보 논쟁’이 뜨겁다. 최장집·조희연·손호철 교수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논쟁에 노무현이 가세하자 사회 전체의 의제로 떠오른 느낌이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지난 21일, ‘민주노동당집권전략위원회’가 주최한 ‘위기의 진보진영, 대반전 가능한가’ 토론회(이하 ‘대반전 토론회’)는 매우 열띠게 진행됐다.
이날 토론회를 포함해 최근의 ‘진보 논쟁’을 살펴보면, 눈에 띄는 몇 가지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대선을 맞아 진보진영이 단결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제법 광범하다는 점이다.
최근 〈진보정치〉의 조사 결과가 보여 주듯이, 민주노동당 안에서도 진보진영 후보 단일화에 대한 지지는 매우 크다(66.7퍼센트). ‘대반전 토론회’에서도 손석춘 새사연 원장과 지금종 미래구상 사무총장이 ‘진보대연합’을 강력히 주장했고, 이상현 민주노동당 집권전략위원과 손호철 교수도 그 필요성을 인정했다.
둘째는 노무현 정부 4년간 심화한 사회양극화 때문에 반신자유주의 의제가 그 어느 때보다 부각됐다는 점이다.
지난 2002년 대선 때와 비교해 봐도 이 점은 도드라진다. 당시에는 김대중 정부 5년간 추진된 가혹한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NGO들까지 아우르는 광범한 연합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반신자유주의 의제는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을 연결하는 핵심 고리가 되고 있다.
셋째, “21세기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차베스 개혁’이 한국 진보진영 사이에서 대안 모델로 거론되고 있다는 점이다.
조희연 교수는 ‘차베스 개혁’을 “진보적 민중주의”라 칭하며 진보진영이 “제도 정치로 수렴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 대중 자체를 급진화”하는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석춘 원장과 지금종 사무총장도 ‘차베스 개혁’이 한국 사회에 유효하다는 데 공감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노무현 정부를 경험하며 대중의 의식과 운동이 급진화했음을 알 수 있다.
차베스
그럼에도 진보진영의 대선 전략과 향후 과제를 둘러싼 논쟁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첫째, 노무현 정부 실패의 원인과 책임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이다.
손혁재 참여연대 운영위원장은 노무현 정부의 실패 요인을 “포위된 개혁”에서 찾았다. 보수층의 반발과 진보 세력의 외면이 노무현 정부 실패의 주된 요인이라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 비판적인 조희연 교수도 “[노무현 정부에서 심화한 양극화는] 이전 체제에서 물려받은 것도 있고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라는 세계 체제적 조건의 제약도 있다. … 일정 부분 진보 일반의 한계도 있다”고 제약 조건을 강조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개혁 실패에는 ‘선택’이라는 측면이 훨씬 더 강하다. 열우당에 몸담았던 임종인 의원도 “헌정 사상 처음으로 행정부와 입법부를 함께 장악한 좋은 조건에서도 … 기득권 세력에 맞선 강력한 사회·경제 개혁을 추진하지 못했다”고 노무현 정부를 비판했다. 이른바 ‘4대 개혁’ 입법과 부동산 정책에서는 우익의 반발에 쉽게 타협했고, 평택 미군기지 이전이나 이라크·레바논 파병 등 친제국주의 정책은 앞장서 추진했다. 비정규직 개악·노사관계로드맵·한미FTA 등 신자유주의 정책 추진은 “가히 혁명적”(최장집)이었다. 그나마 유일한 성과라고 자랑하는 사학법 개정조차 2월 국회에서 한나라당과 개악을 약속하고 있다.
요컨대, 한나라당과 “사실상 내용적 대연정”(임종인)을 하며, “민주 개혁엔 무능하고 신자유주의 개혁엔 유능”(손호철)했던 것이 노무현 정부 실패의 핵심 요인이었던 셈이다.
둘째, ‘진보대연합’의 범위이다.
손호철 교수는 ‘민주-반민주’ 구도는 해체됐고 ‘반신자유주의’가 핵심 전선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조희연 교수는 반신자유주의가 중요하지만 “반수구” 전선을 기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부르주아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비판적 지지’라는 일부 운동 세력의 잘못된 전략에 반대하는 손호철 교수의 문제의식은 옳다. 그러나 전술 면에서는 반수구가 가장 중요한 과제일 때가 드물지만 엄연히 존재한다. 가령 2004년 봄 우익의 노무현 탄핵 사태가 그런 경우였다. 한국 사회는 이른바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조차 불안정한 사회다. 국가보안법이 온존하고 기본적인 시민적·정치적 자유조차 억압받고 있다. 한나라당과 우익들은 기본적 민주 개혁조차 가로막고 있다. 그러므로 민주-반민주 구도가 해체됐다는 손호철 교수의 주장은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환원하고 있다는 점을 제쳐놓더라도 오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조희연 교수는 열우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에 반대한다면서도 “중도 자유주의” 세력과의 ‘연합’을 언급하는데, 이 때 연합의 범위와 방식이 모호한 측면이 있다.
‘테러와의 전쟁’
한편, 손석춘 원장은 “반신자유주의, 6·15 공동선언”을, 지금종 사무총장은 “반신자유주의, 남북평화, 민주주의 심화·발전”을, 정대화 교수는 “자본주의 비판, 직접민주주의 실현, 분단체제 극복” 등을 ‘진보대연합’의 조건으로 제시한다.
이 입장들도 진보진영의 단결을 염원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열우당 개혁파의 후신 정당에 대한 태도가 분명치 않다. 한국의 진보는 노무현 정부·열우당 후신 정당에 대해 분명히 선을 긋는 것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이 모호하면 이른바 ‘신판 비판적 지지’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
열우당 개혁파 후신 정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와 계급 연합 전술은 우익에 맞선 투쟁을 강화하기는커녕 약화시킨다. 김대중 정부 5년과 노무현 정부 4년이 이 점을 생생히 보여 줬다. 부르주아 포퓰리스트 세력에게서 정치적·조직적 독립을 유지하며 아래로부터의 대중 행동을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진영이 우익에 맞서 가장 효과적으로 투쟁하는 길이다.
그런데 임종인 의원을 제외하면 ‘진보 논쟁’을 벌이는 논자들 모두 반전 의제를 간과하거나 단지 한반도 중심으로 협소하게 제기하는 것은 아쉽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상시적 전쟁의 시대에 반전 의제는 정치 지형을 급변시킬 폭발력을 갖고 있다. 실제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한 많은 정부들이 위기를 겪거나 심지어 실각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진보대연합’의 기준에는 ‘테러와의 전쟁’ 반대가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지금, 노무현은 정치적 식물인간이고, 열우당은 붕괴했으며, 불안정한 반사이익에 기댄 한나라당 안에서는 이명박과 박근혜가 진흙탕 개싸움을 벌이고 있다.
따라서 진보진영은 “열우당 왼쪽의 블루오션”(정대화)에 뛰어들어 진보적 지지층을 흡수할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반신자유주의, 반전, 주류정당 반대’를 기치로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킬 선거대안이 필요하다.
이 선거대안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특히 민주노동당은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 점에서 이상현 위원이 “민주노동당 중심”을 마치 진보대연합의 전제처럼 주장한 것은 부적절했다. “민주노동당 중심”은 경험을 통해 대중에게 입증돼야 할 과제이지 선험적 전제로 내세우거나 선언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대중적 입증을 통해 민주노동당의 영향력과 지지 기반 확대를 도모하는 것이 현명하다.
동시에 진보진영은 한미FTA, 레바논 파병 등 노무현·열우당·한나라당이 합심해서 추진하는 신자유주의·친제국주의 정책에 맞선 대중 행동 건설에 주력해야 한다. 강력한 대중 행동만이 개악을 저지하고 진정한 개혁을 쟁취할 수 있는 힘이며, 그 결과 더 좌경화한 이데올로기 지형은 진보진영과 민주노동당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