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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진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에세이:
'좌익 공산주의'강시

최근 ‘좌익 공산주의’가 ‘평의회 공산주의’와 함께 우리 나라 일부 좌파 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 새롭게 유행하고 있다. 반면 한동안 뜨던 ‘자율주의’ 바람은 주춤한 듯하다. 최근의 ‘좌익 공산주의’는 1920년 레닌이 ‘순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라는 허상을 좇는 자들이라고 비판한 독일·네덜란드·이탈리아 등의 ‘좌익 공산주의’를 원조로 한다. “소아병” 환자로 사망한 줄 알았던 것이 ‘강시’가 돼 나타난 것일까?

물론 족보를 따져 보면, ‘좌익 공산주의’는 1920년대 이후 혁명정당의 의의까지 부정하는 ‘평의회 공산주의’로 분화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다시 1968년 5월 혁명 후 이탈리아에서 ‘자율주의’와 합류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나라에서 이 흐름들을 수입해서 유행시키고 있는 것은 주로 과거 스탈린주의 ‘PD’들이다.

스탈린주의만이 ‘정통’으로 간주되고, 그 밖의 좌파 사상들은 ‘이단’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배격된 1980년대에 비하면, 최근 우리 나라 좌파의 ‘백가쟁명’, ‘백화제방’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물론 좌파의 전체 규모가 당시보다 줄어든 것, 또 이들 상당수가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으로의 복귀와 발전보다는 끊임없이 새로운 유행을 따르고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들 중 일부는 신자유주의, 미국 제국주의, 노무현 정권, 한미FTA보다는 ‘다함께’ 같은 고전 마르크스주의 경향을 공격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데(예컨대, 우리 나라 ‘좌익 공산주의’ 그룹인 ‘빛나는 전망’은 트로츠키주의를 근거없이 헐뜯는 팜플렛을 최근 출판했다), 이를 그냥 지나치는 것은 좌파의 도리가 아닐 것이다.

논쟁의 활성화를 통해 좌파 담론의 전체 판을 키우고, 또 우리의 정치를 더 명확하게 한다는 차원에서, 최근 우리 나라 ‘좌익 공산주의’ 그룹의 리더인 오세철 교수가 발표한 “노동자(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에 대하여”(2007.3.17. http://spri.jinbo.net. 이하 ‘좌익 공산주의’로 줄임)를 검토해 보자.

공동전선

‘좌익 공산주의’는 일국사회주의론과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노동자 국제주의를 좌파의 기본 원칙으로 천명한다. 또, ‘좌익 공산주의’는 옛 소련·동유럽 블록의 사회 성격을 국가자본주의·제국주의라고 규정한다. 이는 ‘구PD’의 스탈린주의 문제 설정의 핵심인 일국사회주의론과 소련 사회주의론을 청산한 것으로서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민족문제와 국제주의에 대한 이해 방식,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의 제국주의론 이해 방식, 트로츠키주의와 스탈린주의에 대한 평가, 최근 대안세계화 운동에 대한 평가 등에서 보이는 ‘좌익 공산주의’의 입장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먼저, ‘좌익 공산주의’는 “오늘날 노동계급에게 열린 유일한 전선은 자본에 대항하는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선”뿐이며, “국제주의는 어떤 민족운동에 대해서도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또, “민족투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지는 노동자 운동에 영향을 주는 특별한 경우, 즉 부르주아 혁명이 아직 가능한 경우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아직 역사적 의제에 오르지 않았을 때만 의미가 있다”고 한정한다.

그러나 ‘억압 민족’과 ‘피억압 민족’의 구별, ‘피억압 민족’의 민족운동에서 혁명적 요소의 인정, 피억압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자의 공동전선 필요성에 관한 레닌의 민족문제론의 합리적 핵심은 제국주의와 민족문제가 엄존하는 21세기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이 대중운동으로 현존하는 경우, 사회주의자들이 이와 연대하는 것은 필수적이며 이를 거부하는 것은 공동전선 전술의 의의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또, 대중투쟁을 노·자 간의 투쟁으로 환원하는 것은 자율주의처럼 국가 권력의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며, ‘정치의 부재’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국제 생디칼리즘’이다. 레닌은 일찍이 ‘좌익 공산주의’에는 노동조합·의회·개량주의에 대한 전술이 없다고 비판한 바 있는데, 이 비판은 오늘날 우리 나라 ‘좌익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여전히 해당된다.

또, ‘좌익 공산주의’는 자본과 국민국가의 관계, 노동계급의 국민국가적 존재 형식의 현실을 정당하게 고려하지 않고, 자본을 “지구적 사회관계”로서만, 또 노동계급을 “하나의 세계계급”으로만 이해하는데, 이는 ‘추상적 국제주의’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좌익 공산주의’는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로자 룩셈부르크의 제국주의론으로 대체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불균등발전과 위계적 구조,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정치·군사 경쟁 및 ‘약한 고리’로 요약되는 레닌 제국주의론의 합리적 핵심은 21세기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제국주의론이야말로, ‘시초 축적’의 지속성 등 몇 가지 빛나는 통찰에도 불구하고 자본축적의 모순을 잉여가치 실현의 문제로 환원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 체계와 상충된다.

그리고 ‘좌익 공산주의’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종하여, “세계시장의 포화” 상태를 근거로 “민족해방 투쟁은 더는 가능하지 않고”, “제국주의적 환경에서 민족 방어 전쟁은 있을 수 없다”며 민족자결권을 부정한다.

그러나 이는 레닌이 비판한 “제국주의적 경제주의”의 오류를 되풀이한 것이다. 실제로 ‘좌익 공산주의’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데카당스 시대[원문 그대로]에 모든 민족국가는 제국주의 권력”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즉, 21세기 자본주의 나라들은 중심부든 주변부든 모두 제국주의 국가들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오늘날 세계적 양극화 현실과도 맞지 않고,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위계 구조에 관한 레닌 제국주의론의 합리적 핵심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좌익 공산주의’는 “스탈린주의·트로츠키주의·마오주의가” 모두 “민족자결권”에 관한 “레닌의 텍스트를 완전히 잊어버렸다”며 레닌을 지지하는 척한다. 그리고 트로츠키주의를 스탈린주의·마오주의와 함께 도매금으로 반레닌주의로 몬다.

그런데 민족문제에 관한 트로츠키의 노동자 국제주의적 접근이 스탈린의 대러시아 제국주의나 마오의 쁘띠부르주아적 민족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은 마르크스주의자의 상식에 속하는 것 아닌가? 오히려 로자 룩셈부르크를 좇아 민족자결권을 무차별 부정하는 ‘좌익 공산주의’야말로 스탈린주의에 거꾸로 공명하는 것 아닌가?

현실의 운동

또 ‘좌익 공산주의’는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을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내세운 소련의 엄청난 경제 성취를 찬양”한 책이라고 왜곡하는가 하면, 제2차세계대전 당시 트로츠키주의자들 일부가 반파시즘 차원에서 “소련 방어”를 주장한 사실을 두고 트로츠키주의가 “국제주의를 포기”하고 “그들 조국의 민족 이해를 방어”했다고 비난한다. 트로츠키의 《배반당한 혁명》이 ‘관료적으로 퇴보한 노동자국가론’의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핵심 논지는 소련 “찬양”이나 “소련 방어”가 아니라 정치혁명에 의한 스탈린주의의 타도였다.

필자가 보기에 우리 나라의 ‘좌익 공산주의’를 포함한 ‘포스트스탈린주의’ 경향들(알튀쎄르주의, 자율주의, 평의회 공산주의 등)은 겉으로는 스탈린주의 청산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스탈린주의의 본질적 요소의 하나인 반트로츠키주의를 물려받고 도리어 더 강화함으로써, 스탈린주의를 뒷문으로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무엇보다 ‘좌익 공산주의’를 포함하여 요즘 우리 나라에서 유행하는 각종 ‘포스트스탈린주의’ 경향들의 반스탈린주의는 트로츠키가 계승·발전시킨 고전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스탈린주의 사이에 흐르는 ‘피의 강’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진정성이 없는 ‘과거사 청산’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좌익 공산주의’는 1999년 시애틀 투쟁 이후 “반세계화 운동”(‘대안세계화 운동’이 정확한 용어법이다)이 “자본주의는 유일한 가능한 체제이고 그 개혁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부르주아적”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고 폄하한다. 물론 대안세계화 운동에 ATTAC처럼 “잘 규제된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개량주의 조직들이 포함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안세계화 운동 조직에는 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나 프랑스의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LCR) 같은 반자본주의적·혁명적 사회주의 경향도 강력하게 존재한다.

또, 1999년 시애틀 투쟁 이후 대안세계화 운동이 지난 세기 말 이후 득세한 ‘자본주의 이외 대안부재론’(TINA)을 분쇄하고 ‘21세기 사회주의’의 전망을 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좌익 공산주의’가 최근 범세계적인 반미 투쟁과 베네수엘라 차베스의 “국유화” 조처 등을 “미국 자본과 민족 자본의 대립에 근거한” “새로운 유형의 민족해방 투쟁” 정도로 깎아내리고, 이들에 포함된 ‘21세기 사회주의’의 잠재력을 외면하는 것도 온당치 않다.

‘좌익 공산주의’는 최근 대안세계화 운동, 반제국주의 투쟁, 반전 운동이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통한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명시적으로 천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면·배격한다. 심지어 이들 운동에 매진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을 겨냥해 “자본주의에 봉사하고 있는 이른바 ‘노동자당’”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들 운동이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의 운동으로서 공산주의”(마르크스)의 일부라면, 이 “현실의 운동”과 함께하는 것이 모름지기 공산주의자의 임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좌익 공산주의’는 거꾸로 이 생동하는 “현실의 운동” 밖에서, 또 이 “현실의 운동”을 비난하는 것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는다. 21세기 ‘좌익 공산주의’가 “소아병” 환자를 넘어 강시처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좌익 공산주의’ 동지들이 ‘순수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라는 망상을 하루 빨리 접고, 노동조합·의회·민주노동당 같은 ‘불순한’ 조직들과 기꺼이 뒤섞이면서 “현실의 운동”에 적극 동참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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