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중생 압사 항의 운동, 탄핵 반대 투쟁, 이라크 반전 운동,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평택 미군기지 반대 투쟁 등에 그는 항상 앞장섰다. ‘그날이 오면’ 서점 대표 김동운 씨는 “서점 앞은 항상 동지가 가져온 포스터로 도배됐고 책상에는 동지가 가져오신 각종 투쟁을 알리는 선전물이 끊일 날이 없었지요” 하고 추억한다.
어렸을 때 서울로 상경해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아 온 허세욱 동지는 철거 반대 투쟁을 겪으며 운동에 동참했다. 그는 “빈민운동을 하던 여자 간사가 용역깡패들에게 얻어맞는 일이 벌어졌는데 나는 그냥 구경만 했어요. 그 뒤 많은 걸 깨달았죠” 하고 말한 적이 있다.
허세욱 동지는 민주노동당 당원이자 민주노총 조합원이었고 NGO인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과 ‘참여연대’의 모범적인 회원이기도 했다. 그는 1백20만 원 정도의 많지 않은 월급 중 10퍼센트를 꼬박꼬박 당비·회비·지지금 등으로 지출했다.
그는 “1만 원 아껴 봐야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당에 1만 원을 내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1만 원 아껴 봐야 못 배운 한을 못 풀지만, 당에 1만 원을 내면 세상의 이치를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아무리 어린 활동가에게도 꼬박꼬박 ‘동지’라고 부르며 존칭을 쓰던 그는 항상 겸손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번에 서울시당 대의원으로 출마하며 “한미FTA의 모순점을 시민들에게 홍보하고, 한미FTA를 몸으로 저지할 것”이라고 약속했고 이를 철저히 실천했다.
그는 택시를 운전하며 하루에 1백 장 정도의 한미FTA 반대 유인물을 승객들에게 나눠주며 토론했고, “나머지는 퇴근 길에 집집마다 돌렸”다고 한다. 그는 “한미FTA 반대 유인물을 주었더니 거스름돈을 받지 않는 손님도 있었다”고 좋아했다.
그는 신문과 책에 밑줄을 쳐가며 한미FTA의 문제점을 탐구했고 분석했다. 그래서 직접 한미FTA를 조목조목 폭로하는 팻말을 만들어서 1인시위를 하고 집회에 참가했다.
동지의 이같은 삶과 투쟁은 많은 사람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허세욱 동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노무현 정부가, 동지의 시신을 빼돌리는 등 사망과 화장 과정까지 더러운 개입을 했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는 허세욱 동지가 죽음으로 호소한 투쟁의 과제가 남겨졌다. 한미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는 “고인의 영정 앞에서 한미FTA 체결 저지 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할 것을 약속”했다.
동지는 4월 1일 분신 과정에서 화기가 몸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무릅쓰고 계속 “한미FTA 폐기”와 “노무현 정권 퇴진”을 외쳤다. 강력한 대중 투쟁을 건설해 이 과제를 완수하는 것이 동지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