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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15주년 - 피억압 민중이 군사독재를 무릎 꿇리다

6월 항쟁은 1980년 광주항쟁과 그 이후의 소규모 투쟁들의 연장선에 있다. 비록 광주의 무장봉기가 패배로 끝났지만 운동 전체로 볼 때 그것은 전혀 패배가 아니었다. 광주항쟁에서 커다란 심리적 충격을 받아 아주 급진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군사독재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대중의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사람들이 급속하게 늘어났다. 1985년 봄의 대우자동차 파업과 6월의 구로 연대파업, 1986년 5·3 인천 사태 같은 노동자와 학생의 저항이 누적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6월 항쟁의 직접적인 운동사적 배경이다.

경제적·사회적인 배경으로는 첫째, 당시 남한 경제가 대단한 호황이었다는 점이다. 1960∼70년대의 경제 성장이 1980년대에도 지속됐고, 특히 1986∼88년은 3저호황이라는 굉장한 호황기였다. 그런 호황기 때 얻은 대중의 자신감이 작용했다.

둘째, 장기적인 호황을 거치면서 그 동안 국가와 유착 관계에 있던 사기업들이 국가로부터 일정하게 독립하려는 동기가 작용했다. 더 이상 군부독재에 의해서 모든 것을 일일이 규제당하는 것을 사적 자본가들은 원하지 않았다. 국가와 대부분의 재벌들에 반대해서 나머지 자본들이 민중의 지지를 얻어 군부독재 정권에 저항했던 것이 6월 항쟁의 한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셋째, 남한 자본주의는 국제 경쟁력 저하를 막기 위해 경제구조 개편이 필요했다. 일부 자본가들은 순전한 억압 통치가 남한 자본들의 장기적인 경쟁력에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러한 자본가 야당들, 김영삼과 김대중이 대표한 야당 세력들이 국가로부터 자유를 얻고자 하는 동기와 결합해서 자기들 나름의 장기적 안목, 자유주의적인 시각에서 군부독재에 반대했다.

6월 항쟁의 전개 과정

6월 항쟁 기간은 대중의 자생성이 충만하던 시기였다. 대부분의 투쟁은 어떤 계획이나 지시에 따라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또 엄청나게 전투적인 투쟁이었다. 군부독재가 감히 군대를 푼다는 생각을 실행은커녕 구체적으로 논의하지도 못할 정도로 대중의 폭발성이 엄청났다.

그러나 군부독재에 항거한 광범한 민중 사이에는 아직 분화되지 않은 다양한 생각들이 존재했다. 서로를 이어주고 있는 것은 반독재나 민주, 자유 같은 모호한 관념들뿐이었다.

물론 당시 부르주아 자유주의는 민중에게 수용되면서 훨씬 급진적인 민중주의 이데올로기로 나타났다. 그러나 구체적인 정치적 요구 자체는 자유 민주주의의 틀을 넘어서지 못했다.

군부독재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들은 6월 13일께 첫 번째로 군대를 풀까 양보를 할까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 뒤 6월 16일, 18일, 21일, 23일, 26일에도 그들은 망설이고 주저하고 동요했다. 이들이 갈팡질팡 하는 사이에 투쟁은 계속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군부독재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군대를 푼다면 군대가 어떤 방식으로든 분열할 것이었다. 군장성들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날 수도 있는데, 탄압이 성공하리라고 확신하는 자들은 강경 탄압을 하려 할 것이고 탄압이 성공하지 못하리라고 의심하는 자들은 그에 반대해서 분열을 할 것이다. 심지어 사병들이 민중 편으로 넘어가 버릴 수도 있었다.(1974∼75년 포르투갈 항쟁 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결국 군부독재는 군대를 풀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군대가 아니라 부르주아 야당을 풀어서 민중을 통제하도록 하는 방법을 썼다. 이것이 바로 6·29의 진정한 배경이다. 그래서 6·29의 양보 내용이 대통령선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것이다.

또 노동자들의 참여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성남이나 안양 같은 경우에는 처음부터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와서 싸웠다. 전국적으로 볼 때 6월 13일쯤부터 노동자들의 참여가 눈에 띄기 시작해서 갈수록 노동자들이 많아졌다. 주로 미조직 사무직 노동자들이나 서비스 부문의 노동자들이 상당히 많이 참여했다. 정부는 노동자들의 참여가 늘어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국민운동본부의 성격

당시 투쟁 지도부였던 국본은 중간계급의 자유주의와 민중주의 이데올로기가 득세했던 조직이었다.

당시 재야라고 불렸던 ― 당시 재야는 민추위 같이 야당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정치재야’와 문익환 목사가 이끌던 민통련 같은 ‘순수재야’로 크게 나뉘어 있었다 ― 쪽이 국민운동본부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당시 중간계급은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고 정치적 대안 자체가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자본가 야당에서 정치적 대안을 찾았다.

광범한 민중이 군부독재에 맞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민중주의 이데올로기가 당시로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이데올로기였다고도 할 수 있다.

김영삼과 김대중 중에서 투쟁적 대중의 선택은 분명했다. 선진 부문은 군부독재 이후 새 정부의 지도자로 김대중을 선호했다. 심지어 당시 좌파는 김영삼을 ‘민간파쇼’라고까지 불렀다. 물론 ‘민간파쇼’라는 말은 부정확한 말이지만, 김영삼이 군사독재와 별 다를 바 없는 작자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반면에 김대중은 유신체제 때부터 굉장히 박해를 받았고 재야쪽과 연대해서(예컨대 1980년의 민주회복국민회의) 박정희에 맞서 싸웠기 때문에 그에 대한 환상이 상당히 컸다.

자신감

6월 항쟁 전에 좌파의 정세관은 다소 비관적이었다. 예컨대 당시 고대 총학생회장 이인영은 “학생운동은 침체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변혁적 상황이나 거대한 봉기 직전에 좌파가 보수적이거나 심지어 다소 비관적인 생각을 갖는 것은 역사에서 여러 번 있었던 일이다. 더구나 가장 선진적인 사람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상황을 판단하기 쉬운 관성이 있다. 당시에도 가장 각성돼 있는 학생이나 재야, 반정부 투사들은 전두환 정권이 최후 발악적인 탄압 ― 1천2백여 명이 구속된 86년 11월 초의 건대 사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국민들의 개헌 열망을 정면으로 거스른 4·13 호헌 조치 ― 으로 강경하게 나오는 것을 보면서 저항 운동이 그토록 강력하고 전투적으로 폭발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훨씬 더 광범한 대중 속에서는 굉장한 분노가 끓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 대호황에서 얻은 자신감과, 일단의 지식인들이나 자본가 야당조차도 전두환 정권에 대해 공공연하게 반대하는 상황에서 커다란 자신감을 얻은 상태였다.

당시 군사독재를 힘으로, 다시 말해 혁명적 방식으로 무너뜨려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좌파의 대부분이 공감하고 있었다. 군사독재를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설사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공공연히 자기의 생각을 발설할 수 없을 만큼 분위기는 전투적이었다.

1986년 5·3 인천사태 직후에, 당시 수배중이었던 장기표가 잡혔을 때 그의 호주머니에서 무장봉기에 관해 메모를 한 쪽지가 발견됐을 만큼 중간계급 재야조차도 혁명이나 무장봉기에 대해 얘기를 할 정도의 전투성이었다.

그러나 군사독재를 무너뜨린 다음에 무엇을 세울 것인가에 대해서는 견해가 달랐다. 일단 자본가 야당이 집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또 어떤 부분은 민중적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주로 개헌 문제가 중심적인 쟁점이었는데, 야당이 먼저 권력을 잡아야 할 필요성을 얘기했던 사람들은 직선제 개헌을 주장했다.

투쟁의 방향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실제 거리의 투쟁을 주도한 세력은 학생들이었고, 그들의 정치는 급진 민중주의였다.

당시 학생 좌파를 지배한 이데올로기는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였다. 특히 주체사상이 NL에 상당히 강력한 영향을 미쳤고, CA라는 훨씬 작은 소수파에게는 북한이 아니라 주로 러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던 또 다른 종류의 스탈린주의가 영향을 미쳤다.

그들 사이의 논쟁은 직선제냐 제헌의회냐 하는 논쟁이 대표적이었다. 당시에 민중은 선거로 군부독재를 제거하길 원했기 때문에 좌파는 직선제를 지지해야 했다.

그러나 이 투쟁이 승리로 끝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참여가 결정적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요구를 제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전술이었다. 특히 실제로 거리에 나온 민중의 구성 부분에서 노동자들이 갈수록 많아졌기 때문에 노동자의 요구를 계속 제기하면서 민주주의의 기본권 요구에 결합시킴으로써 투쟁을 계속 확대하는 것이 승리의 결정적인 열쇠였다.

6월 항쟁의 성격

6월 항쟁을 ‘시민항쟁’이나 ‘학생들의 투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민중항쟁이었다. 군사독재의 억압에 반대하는 모든 피억압 민중이 군사독재라는 표적을 공유하면서 일어섰던 운동이었다. 거기에는 노동자 계급뿐 아니라 중간계급, 심지어 부르주아 계급의 일부도 동참했다.

또 요구와 이데올로기 면에서 보면, 민주적 자유와 권리들을 중심적으로 제기하고 그 요구들을 쟁취하자마자 일단락됐다는 점에서 이 투쟁 자체의 성격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틀을 넘어서지 못했다.

따라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동시에 민중적인 투쟁이었다는 게 6월 항쟁에 대한 가장 정확한 규정일 것이다.

하지만 비록 조직화된 방식이 아니라 개인으로, 시민으로 참여하기는 했지만 노동자들이 참여를 했다는 점 때문에, 6월 항쟁은 단순히 6·29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다음으로 이어질 내재적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6·29라는 전두환 군사독재의 항복 선언은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고무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군사독재가 물러선 그 틈을 비집고 선제력을 발휘해서 7월 초부터 싸움에 돌입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7∼9월 노동자 대파업의 배경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대중파업에 관한 책에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결합에 대해 얘기했는데, 비록 6월 항쟁이 파업은 아니었을지라도 정치투쟁과 7∼9월 경제투쟁으로 이어지는 이런 양상은 6월 항쟁이 노동자 투쟁의 성격을 부분적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다.

6월 항쟁은 억압에 반대하는 피억압 민중의 저항이었다. 따라서 근본적 사회 변혁가들과 노동자 계급은 그 투쟁을 전폭 지지해야 했다. 왜냐하면 근본적 사회 변혁가는 인간에 대한 억압과 소외가 없는 인간 해방을 지지하기 때문에, 또 탄압은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정치적·시민적 자유들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6월 항쟁은 단지 부르주아 투쟁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대단히 종파주의적인 주장이다. 역사와 계급투쟁의 복잡다단성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사람들의 주장이다.

6월 항쟁의 진정한 교훈

6월 항쟁에서 민중적 방식으로 거대한 대중이 투쟁을 해서 군사독재를 물러나게 했던 것은 커다란 성과다. 그러나 그 성과로 나타난 6·29 항복 선언을 굳혀 버린 것, 더 이상 독재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엄두도 못 내게 했던 것은 그 뒤에 벌어진 노동자 계급의 투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의 투쟁만이 군사독재를, 자유민주주의의 권리조차 억압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이 6월 항쟁에서 얻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교훈이다. 즉 노동자 계급이 열쇠라는 것이 6월 항쟁의 근본적인 교훈이다. 노동자 계급이야말로 억압에 맞서 가장 일관되게 싸울 수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가장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 세력이다. 왜냐하면 억압을 하는 이유가 바로 착취 때문이고 억압은 착취를 강화해 주는데, 이러한 착취에 타격을 가함으로써 억압자들을 효과적으로 마비시킬 수 있는 세력이 바로 노동자 계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 계급의 독립적 요구·활동·투쟁·조직 들을 고무하는 데서는, 중간 계급의 소자본주의적 이해관계와 노동자 계급의 근본적으로는 사회주의적 이해관계를 최소공배수로 조화시키려는 민중주의적 방식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동시에, 이와 연관된 다른 교훈도 있다. 6월에서 7∼9월로 이어진 이 과정 자체가 보여 준 것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중파업 이론이 그대로 적용됐다는 것이다. 정치적 투쟁과 경제적 투쟁이 결합된다는 것, 정치적 요구와 경제적 요구가 결합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정치로 튀었다가 경제로 튀었다가 하면서 효과적으로 대중을 동원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끌어냈던 교훈을 6월 항쟁으로부터 확인하고 그것을 계속 이어받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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