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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와 ‘아메리카를 위한 볼리바르 식 대안’(ALBA):
신자유주의에 도전하는 ALBA

노무현 정부는 한미FTA를 강행하며 세계화 시대에 자유무역협정(FTA)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미주자유무역협정(FTAA)이 사실상 파탄났다.

그리고 최근의 제5차 ‘아메리카를 위한 볼리바르 식 대안’(Alternativa Bolivariana para la America: ALBA) 정상회담에서 베네수엘라·볼리비아·니카라과·쿠바·아이티의 정상들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에서 탈퇴하기로 합의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이런 반(反)신자유주의 흐름에는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거듭된 투쟁뿐 아니라, 각국 자본가들의 이익 다툼 ― 예컨대 미국 농산물 시장을 더 많이 차지하기를 원하는 브라질 농업 자본가들의 반발 ― 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 하지만 FTAA의 대안으로 ALBA를 주창해 온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의 노력도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

ALBA는 차베스가 2001년에 처음 제안한 라틴아메리카 통합 구상이다. 2004년 12월 베네수엘라와 쿠바가 ALBA 협정문에 서명한 것을 계기로 본격화했고, 그 뒤 볼리비아와 니카라과가 가입했다. 에콰도르와 아이티도 적극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아직 가입하지는 않은 상태다.

사회적 필요

ALBA의 자세한 내용과 성격은 2004년 말 차베스와 카스트로가 서명한 협정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비교우위”나 “경쟁력” 등을 앞세우는 기존 무역협정들과 달리 ALBA는 베네수엘라와 쿠바의 협력이 “연대의 원칙”과 “양국의 경제적·사회적 필요에 가장 유익하게 재화와 서비스를 교환하는 원칙”에 바탕을 둘 것이라고 밝혔다.

그래서 베네수엘라는 쿠바에 국제 시장 가격보다 싼 가격에 석유를 공급하고 쿠바는 베네수엘라가 무상의료를 실시할 수 있도록 1천여 개의 의료시설 설립과 의사 4만 명 육성을 지원했다. 또, 쿠바 의사 3만 명이 베네수엘라에서 무상의료 활동을 벌이고, 쿠바에서 베네수엘라인 10만 명에게 무상 안과 수술을 실시했다.

그리고 쿠바의 교사들이 베네수엘라에 파견돼 베네수엘라인 1백50만 명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등 베네수엘라의 문맹 퇴치와 무상교육을 위해 서로 협력했다.

차베스는 ALBA가 “사회적 관심사”를 가장 먼저 고려하는 라틴아메리카 통합의 유연한 모델이라고 강조했고, 베네수엘라 해외통상은행(Bancoex)도 “ALBA가 빈곤과 사회적 배제에 반대하는 투쟁을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베네수엘라 볼리바르주의 정부는 우리 국민이 양질의 필수 서비스를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국가와 정부가 정책들을 구상하고 집행하는 능력을 제한하는 자유화·규제완화·사유화 과정에 반대한다. 베네수엘라 볼리바르주의 정부는 공공 서비스가 통상과 경제적 이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ALBA는 신자유주의를 정면으로 거슬러 적어도 케인스주의로 돌아가자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말에 전 세계 주류 경제학의 정설로 득세한 신자유주의와 달리 ALBA는 시장과 기업의 역할이 아니라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고, 사회적 서비스를 불확실한 시장의 힘에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사회 복지를 확대·심화하고, 에너지 산업 등 국가 기간산업을 사유화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통제하고, 국제 시장에서 경쟁력이 없다는 이유로 국내 취약 산업이나 소농들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려 한다.

더 나아가 ALBA의 어떤 측면은 신자유주의뿐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논리에도 도전한다. 예컨대, “현물 교역”의 가능성을 제도화한 것은 자본주의의 등장 이래 세계를 지배해 온 화폐 기반 교역망에 대한 직접적 공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금융 시장을 거치지 않고 재화를 교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그래서 베네수엘라와 쿠바가 석유와 의사·교사를 교환하는 것을 두고 마이클 레보위츠는 “사용가치가 교환가치를 압도한 사례“라고 불렀다.

이것은 양국이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토대 위에서 교역과 경제 관계를 발전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 되면, 각국이 시장의 가격 등락에 종속되지 않고 저마다 경제적 필요 영역들을 공개적으로 논의해서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화폐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교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은행이나 환투기꾼, 자본가들이 끼여들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자본 축적이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 국민들의 절실한 필요가 전면에 부각될 것이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남미 컨센서스

그러나 차베스는 반신자유주의를 넘어 “21세기의 사회주의”를 주창하면서도 자신의 핵심 동맹 세력으로 여기는 브라질의 룰라나 아르헨티나의 키르치네르 정권이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곤 한다.

또, 케인스주의 자체는 결코 자본주의라는 한계를 넘지 못하고, 역사적 경험은 국유화나 국가 통제가 자본주의 시장 논리와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오늘날 베네수엘라의 석유 산업도 국가 자본, 베네수엘라 민간 자본, 다국적 민간 자본이라는 세 축에 의존하고 있고, 베네수엘라 석유·천연가스 산업에 뛰어든 다국적기업이 50개가 넘는다.

차베스가 아르헨티나·브라질과의 파이프라인 합작 사업이 “워싱턴 컨센서스의 종식”과 “남미 컨센서스의 시작”을 뜻한다고 주장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국가 주도 경제 개발과 사회복지 향상은 분명히 워싱턴 컨센서스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와 모순된다.

그러나 그것은 차베스가 주창하는 “21세기의 사회주의”에는 아직 많이 모자란다. 국가자본주의와 사회복지 개혁은 세계 경제 호황기 동안에는 투쟁이 따른다면 노동자와 빈민의 생활조건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불황기에는 이런 개혁의 성과가 공격받기 십상이다.

국가는 개혁을 선사하고 대중의 생활조건을 개선할 수 있지만 그 개혁의 성과를 도로 가져갈 수도 있다. 그리고 국내 자본가들의 반발 때문이든 제국주의 외세의 개입 때문이든 그런 개혁이 공격당할 때 국가는 기껏해야 변변찮은 방어막 구실을 했을 뿐임을 역사는 보여 준다. 최악의 경우에는 국가가 다국적기업들과 손잡고 그런 공격에 가담해서 대중의 생활조건을 오히려 악화시킨다.

이 때문에 베네수엘라에서는 이제 “아래로부터 ALBA를 건설하자”는 말이 나오고 있다. 정부간 협정뿐 아니라 각국의 노동자·농민 등 직접 생산자들 사이의 교역을 촉진하자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제5차 ALBA 정상회담에 참가한 각국 정상들이 온두라스·페루·엘살바도르·칠레·쿠바 등지의 사회운동 지도자들을 만나 ALBA 각료회의, ALBA 정상회의와 함께 ALBA 사회운동회의를 창설하기로 합의한 것은 ALBA의 의사결정 과정에 기층의 사회운동들이 참여할 수 있는 조직적 구조를 마련한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지금 ALBA는 베네수엘라에서 진행중인 각종 사회 개혁 조처들과 동의어로서, 라틴아메리카의 급진 사회 변혁 염원의 상징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세계의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대중적 여망에 공감함과 동시에 충실히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구축해야 한다. 국가가 위로부터 사회 개혁을 대중에게 선사하는 것과 대중이 자주적 행동으로 그런 개혁을 쟁취하는 것, 그래서 자신감을 얻고 독자적 조직을 건설하는 것은 결정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개혁이 대중의 자주적 행동을 바탕으로 쟁취한 것일 때만 그런 개혁을 지킬 수 있는 확고한 토대가 형성된다. 그리고 진정한 권력이 직접 생산자들에게 있는 새로운 사회의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