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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선거연합의 문제들

지난 몇 달 새 〈맞불〉에 실린 진보 선거연합 관련 기사는 한편으로 김인식과 다른 한편으로 한규한 사이에, 또 이들이 상이한 시기에 쓴 기사들 사이에 뉘앙스가 다르곤 했다. 핵심 문제는 ‘창조한국 미래구상’(이하 미래구상)과 열우당 탈당 국회의원 천정배를 어떻게 볼 것인가였다.

5월 15일, 미래구상은 ‘통합·번영국민운동’(이하 국민운동)과 통합해 ‘통합·번영을 위한 미래구상’(이하 통합번영미래구상)을 창립했다. 이들은 최열 환경재단 대표를 공동 대표로 선출했다. 통합번영미래구상은 사회운동에 참가하는 일부 주요 NGO 지도자들의 정당이다.

‘다함께’는 이들 진보적 NGO를 노무현 정권의 외곽 기구나 중간계급 자유주의 단체로 보는 것에 반대해 왔다.(얼마 전 분신한 노동자 허세욱 동지가 몇몇 NGO의 회원이었다는 사실은 예외적 현상이 아니다.) NGO를 가장 잘 정의하는 것은 개혁(개량)주의의 우파라는 관점이라고 언제나 우리는 주장했다.

노무현의 개혁 미사여구와 알량한 개혁이 그의 반(反)개혁적 실체보다 두드러져 보였을 때 NGO는 마치 노정권의 외곽 기구인 양 비쳤을 것이다. 가령 한나라당 등 우파의 노무현 탄핵을 반대하는 거대한 대중운동이 일어나고 NGO 지도자들이 이 운동을 이끌었을 때 많은 좌파들이 NGO가 “바로 자신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봤다. 그러나 이후 노무현이 점차 우경화하자 많은 NGO들이 노무현과 대립하는 입장에 서게 됐다. 그래서 마침내 지금은 통합번영미래구상이 “반FTA 신당”(정제혁 〈레디앙〉기자)을 표방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NGO 자체와 NGO를 정치적 기반으로 한 정당은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만약 통합번영미래구상이 범여권 일부 또는 전부의 정당이 된다면 그것은 ‘다함께’가 그 동안 배격해 온 “열우당 후신이나 아류”일 것이다. 이 경우 통합번영미래구상의 사회적 기반은 자본가 계급의 일부(소수파이고 덜 주요한 부분이 될 듯하다)인 것이다. 정치적 기반이 NGO 지도자들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만약 통합번영미래구상이 자본가들에게 퇴짜맞아 범여권 일부의 정당이 되는 것을 거부당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범여권 일부의 정당이 되기를 포기하고 그냥 NGO 시절의 사회적 기반에 의존하기로 한다면 그 때는 민주노동당의 오른쪽에 있는 우파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건설되는 것이다.

통합번영미래구상의 이러한 모호한 태도와 두 길 보기는 그들이 동참을 기대하고 있는 천정배의 모호한 두 길 보기 자세와 맥락을 같이한다. 통합번영미래구상이 천정배가 자신들의 지도자가 돼 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보진영 단일후보 세우기를 위한 선거연합이 결성될 경우 통합번영미래구상은 참가시키려 노력하고 천정배는 배제하려 노력한다면 그것은 부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자의적이고 심지어 치졸한 자세로 여겨질 것이다. 통합번영미래구상이 천정배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한 변혁적 반자본주의자는 둘을 분리 대응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둘을 동일시해야 한다.

이들이 어느 길을 택할지는 지금으로선 알기 힘들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범여권의 정당이 되기를 택한다면 이번 대선에서 필패(必敗)하리라는 것이다. 범여권에 대한 대중의 환멸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기존의 사회적 기반(NGO의 사회적 기반)에 의존하기로 하고 대선에 참가한다면 민주노동당으로서는 그들을 단순히 경쟁 대상으로만 취급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이 때 진보진영 단일후보 마련 문제가 발생한다. 열우당 와해로 빚어진 정치적 공백을 이들이 민주노동당보다 유리하게 메우고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개혁 배신과 대중의 기대 좌절 사이에 생겨난 간극을 그저 선전만으로 메울 수는 없다. 이것은 김종철 민주노동당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 도전 좌절 경험에서도 드러났다.

레닌이 《‘좌익’ 공산주의 ― 철부지 같은 혼란》(1920년)에서 역설했듯이 “사실상 전체 계급, 곧 자본에 의해 억압당하는 광범한 근로 인민 대중이 그러한 입장(전위를 직접 지지하거나, 적어도 전위에게 우호적인 중립을 취하고 적을 전혀 지지하지 않는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선전과 선동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것을 위해서는 대중 자신의 정치적 경험이 있어야 한다.”

선전과 선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선전과 선동은 대중의 정치적 경험에 바탕을 둬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사회주의자는 광범한 대중에게 실천에서 입증해야 한다.

그래서 레닌은 자본주의적 의회 제도가 “역사적 폐물”이 됐다고 주장하는 독일 공산당원들이 “우리에게 폐물이 된 것을 계급에게 폐물이 된 것으로, 대중에게 폐물이 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바로 계급 전체의(계급의 전위인 공산주의자들뿐 아니라), 또 바로 노동하는 민중 전체의(대중의 선진적 인자들뿐 아니라) 의식과 준비 정도의 실제 상태를 예의 주시해야 한다.”(강조는 모두 레닌 자신의 것)

그래서 사회 변혁 운동가들에게는 폭로와 강령 선전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들의 계획과 제안은 대중의 정서와 감정에 맞아야 하고, 그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변혁적 반자본주의자들에게 이것이 뜻하는 바는, 이라크 파병안과 비정규법안에 찬성하고 법무장관 시절에 한미FTA에 찬성한 천정배의 전력과 포퓰리스트로서 그의 실체를 우리가 간과할 수는 없지만, 또한 그가 지금은 노무현과 충돌하고 있고 한미FTA 반대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광범한 대중과의 접촉점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레닌이 인용한 러시아 사회주의자 체르니셰프스키 말대로 “정치적 행동은 네프스키 간선도로[상트페체르부르크의 넓고 일직선으로 뻗은 가장 주요한 도로] 같은 것이 아니다.”

정치인들의 변신과 대중의 환상

혹자는 대중이 자신의 정치적 경험을 통해 노무현은 물론 천정배·김근태 등 여권의 개혁파 정치인들에게 더는 환상을 갖지 않게 됐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들의 낮은 지지율이 증명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천정배가 아주 최근까지도 여권의 중심 인물 중 하나였고 대중이 여권 전체에 환멸을 느꼈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논의하는 대상은 여권의 대표적 또는 부차적 후보가 된 경우의 천정배가 아니라, 여권의 자본가 기반에게 퇴짜맞거나 아니면 스스로 그것을 거부하고 진보 쪽으로 넘어온 경우의 천정배인 것이다.

이 경우 대중의 환상은 되살아날 수도 있다. 노동자 투쟁의 수위가 충분히 높지 않은 상황에서 기성 주류정치권에 대한 환멸이 광범하다면 말이다. 지난해 멕시코 대선에서 민주혁명당(PRD) 후보로 출마했으나 부정선거로 패배했다고 여겨지는 로페스 오브라도르도 1980년대 말 여당인 제도혁명당 내 반대파로 출발해 곧 사회민주주의적 야당 PRD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1백 년 국제 사회민주주의 역사를 보면, 천대받는 계급들의 운동에서 배출되지 않은 주류 출신자가 선거를 앞두고 급속히 운동 진영의 주요 대변자로 떠오른 경우가 수두룩했다. 기독교 대학생 단체 출신이자 부유한 변호사인 토니 블레어가 1990년대 중엽 영국 노동당의 대표로 떠오른 과정은 그 한 예이다.

따지고 보면, 정태인도 바로 얼마 전까지 청와대 비서관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를 동지로서 환영한다. 진보 인사의 과거가 문제 되느냐는 그가 현재 또는 미래에 진보진영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 예비 대선후보들의 지지율도 천정배보다 더 높지 않다. 승리의 전망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대중은 정치적 방향감각을 잃어 사기가 낮아지고 그들의 정서는 방황하기 쉽다.

17대 대선, 민주노동당, 그리고 변혁적 반자본주의자의 전술

16대 대선을 앞둔 2002년 이맘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현 정세의 단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드러난다. 그것은 여권이 단말마의 위기에 처해 있고, 여권의 위기만큼은 아닐지라도 우파 야당도 위기에 처해 있고, 진보세력은 그 때보다 강력하다는 것이다.

2002년 초 여당인 민주당은 노무현을 대선후보로 선출하고 집권 연장의 꿈을 꾸고 있었다.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 때는 한나라당도 이회창을 대선후보로 세워 정권 탈환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지금 그들은 박근혜와 이명박 두 예비 대선후보 간의 첨예한 충돌과 갈등을 봉합하기에 급급하고, 분열 때문에 〈조선일보〉가 우려하듯이 정권 탈환 가능성이 불확실하다.

진보진영의 선두주자 민주노동당은 10만 당원의 정당으로, 지지율 10퍼센트 안팎의 정당으로 자리를 잡았고, 강력한 반(反)한미FTA 운동의 기반에 의존할 수 있다. 이제 민주노동당의 과제는 더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독자적인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 디딤돌을 놓는 것이 아니다.

이제 당은 한때 여권 개혁파의 포퓰리즘적 미사여구에 고무돼 희망에 부풀었다가 잔뜩 실망해 의기소침해 있는 광범한 청장년층 대중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들은 대부분 노동계급의 미조직 비정규직 종사자들이거나 모종의 천대받는 사회집단 성원들일 것이다.

그들의 사상은 급진적 요소들과 보수적 요소들이 섞여 있고, 현실 정치 면에선 민주노동당과 NGO를 포함한 다양한 진보 정치 요소들을 절충한 상태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과의 접촉점을 마련하기 위해서 민주노동당은 다른 진보 단체들과 모종의 대선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

그 과정이 꼭 당의 우경화나 기존 원칙의 실용주의적 수정을 수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당 내의 변혁적 반자본주의자는 자신의 원칙과 조직을 유지하면서도 전술의 융통성을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운동을 전진시킬 수 있다. 미래는 개혁과 혁명의 변증법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난 후, 아래 연결 기사들을 함께 읽으시기 바랍니다.

연결기사 1 : (남는 문제 1) 선거연합은 연립정부 구성으로 이어져야 하는가?

(남는 문제 2) 진보 선거연합이 계급연합이 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