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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인가 이윤인가

글리벡은 작년 5월 미국 식품의약품안정청(FDA)이 승인한 후 전 세계에서 판매되는 만성골수성백혈병 치료제다. 만성골수성백혈병은 인구 10만 명당 1명이 걸리는 희귀질환으로 우리 나라에는 5백여 명의 환자가 있다.

지금까지 만성골수성백혈병의 치료는 질병의 진전을 막을 뿐인 인터페론 치료와 성공률이 낮은 골수이식밖에 없다. 생존율이 25퍼센트에 불과했다. 작년 11월 미국혈액학회 실험에서 글리벡은 백혈병 원인 유전자 77퍼센트를 소멸시키는 효과를 냈다. 이런 이유로 글리벡은 백혈병을 완치하는 ‘기적의 신약’이라 불린다.

글리벡을 개발한 스위스 다국적 제약회사 노바티스는 국내 글리벡 가격으로 한 알에 2만 5천 원을 요구했다. 하루에 4∼6알을 먹어야 하는 환자들은 한 달 약값으로 3백만 원 이상을 내야 한다. 보험이 적용되더라도 입원 환자는 60만 원, 외래 환자는 90만 원 이상 약값을 내야 한다. 환자들은 약값 말고도 기본적 치료 비용으로 한 달에 50만 원 이상을 지출하고 있다. 더구나 전체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초기(만성기) 환자들은 의료보험 적용에서 제외돼 한 달 약값 3백만 원을 고스란히 부담해야 한다. 환자들의 더 큰 비극은 이 약을 3∼5년이나 평생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백혈병 환자들은 약이 있어도 그 약을 먹을 엄두도 못 낸다. 더구나 노바티스는 한국 정부가 고시한 1만 7천 원을 거부하고 있어 9개월째 글리벡의 정상 공급이 중단된 상태다. 공급 교란의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들에게 돌아갔다.

노바티스는 글리벡의 불법 유통을 막기 위해 전 세계 동일 가격으로 한 달에 최소 2천4백 달러 이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기준은 경제 규모가 작고 소득이 낮은 국가에 더욱 큰 부담이 된다.

실제 우리 나라 환자들이 부담하는 비용은 선진국에 비해 훨씬 높다. 국민보건서비스(NHS) 제도를 시행중인 영국에선 낮은 본인부담률 덕분에 환자들이 우리 나라의 5.8퍼센트 정도만 부담해도 글리벡을 먹을 수 있다.

게다가 세계 동일 가격은 시행되지도 않고 있다. 미국의 글리벡 가격은 2만 1천 원이고, 영국은 2만 3천 원, 브라질은 1만 7천 원 수준이다.

한 제약회사는 글리벡 생산 원가가 8백45원이라고 밝혔다. 노바티스 요구 가격인 2만 5천 원은 원가의 30배에 이르는 가격이다. 지적재산권이 보장하는 독점권을 이용한 횡포다.

지적재산권이 보장하는 독점 덕분에 노바티스는 글리벡 시판 8개월만에 투자 자금을 모두 회수했다. 지난 1분기 글리벡 매출액은 1억 1천1백만 달러(1천4백18억 원)였다. 정부는 다국적 기업의 횡포를 수수방관하고 있다. 지난 5월 3일 제2차 약제전문위원회에서 정부는 정부 고시가(1만 7890원)를 어기는 노바티스에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6개월 더 기다려 보겠다고만 밝혔다. 환자들과 ‘글리벡 문제 해결과 의약품의 공공성 확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글리벡공대위)’가 계속가격 인하를 요구하자 노바티스는 약값을 겨우 1천 원 내렸다. 환자들이 비싼 약값으로 고통받는 것이 노바티스의 탐욕과 세계무역기구(WTO)의 지적재산권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나라는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진료과목이 적고 본인부담률도 높아 환자들의 경제 부담이 매우 크다.

작년 11월 정부는 모든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들에게 글리벡 사용을 허용하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초기(만성기) 환자들을 보험 혜택에서 제외했다. 초기 환자는 증상이 심하지 않고 약 반응도 좋아 완치율이 높다. 그렇지만 초기 환자가 중기(가속기), 말기(급성기)로 갈수록 약 반응성이 떨어져 2∼6개월 내에 사망하게 된다. 정부는 약으로 완치할 수 있을 때는 약을 못 쓰게 하고는 환자들이 죽기 직전에야 글리벡 사용을 허가한다. 다국적 제약회사의 탐욕을 보장하는 WTO의 지적재산권협정(TRIPs)을 보면 세계 무역 체제의 비인간성과 자본주의(이윤 지상주의)의 적나라한 논리를 알 수 있다. 제약회사의 탐욕에 대한 반감은 체제 논리에 의문을 품는 것으로 이어진다. 글리벡 가격 인하와 보험 적용 확대, 글리벡 강제 실시 허용 등을 요구하는 환자들과 글리벡 공대위의 활동은 ‘반이윤지상주의’ 운동의 일부다.

6월 15일에 ‘한국만성백혈병 환우회’가 창립했다. 환우회는 그 동안 글리벡 투쟁을 벌여온 ‘만성골수성백혈병환자 비상대책위원회’의 새로운 이름이다.

환우회는 창립 성언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누구든 빈부에 의해 지위에 의해 질병에 의해 차별받지 않으며, 또 차별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만천하에 선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