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의 물결에 휩싸여 있는 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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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물결에 휩싸여 있는 아르헨티나
이정구
아르헨티나 대통령 에두아르도 두알데가 집권 7개월 만에 위기에 처했다. 두알데는 비상경제대책안 14개 항을 내놓았지만 경제 공황은 해결되지 않았다. 두알데는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다. 현재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이것뿐”이라고 토로했다.
두알데는 지배자들 내에서 숱한 반발에 부딪히고 있다. 전임 경제장관이 국가 재정 파탄과 금융 체계 마비를 막기 위해 은행 예금을 5∼10년 만기 공채로 대신 지급한다는 정부안을 제시했다. 의회에서 이 안을 부결했다. 이 때문에 호르헤 레니코브 경제장관이 사퇴했다.
두알데는 예금 동결과 일시적인 모라토리엄(외채 상황 무기 연기)을 선언했지만, 연방법원은 예금 동결 조치가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연방법원 판사들은 대기업과 연계된 메넴이 1990년대에 충원한 자들이다.
처음에 두알데가 시장 규제적 조치들을 일부 취하자 아르헨티나 대자본들이 신성동맹을 맺고 두알데 흔들기에 나섰다. 자본가들의 반격에 손을 든 두알데는 대기업들의 이익을 보호해 주고 있다. 결국 은행 예금 동결과 페소화 평가 절하는 중간계급과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큰 타격을 주었다. 아르헨티나 지배계급 내 어느 분파도 현 상황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지배계급 내에서 갈등이 더욱 불거지고 있다. 달러화에 연동된 페소화의 평가절하가 한 예다. 금융 자본가들은 페소화 평가 절하를 반대했지만 산업 자본가들은 국제 경쟁에서 가격 우위를 위해 페소화 평가절하에 찬성했다. 한편,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를 조장한 국제통화기금(IMF)은 아르헨티나에 대한 긴급 융자 90억 달러(약 11조 원) 제공을 거부했다. IMF는 더욱 철저한 긴축 재정을 강요하고 있다.
약점
경제 공황과 정치 불안정에 시달리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거의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식량과 일자리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런 격렬한 시위는 남부 추부트, 북부 산타페, 북서부 투쿠만, 수도 부근 멘도사 등 주요 도시들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거리 곳곳에서 냄비를 두들기며 거리 행진을 하는 시위와 주로 실업자들로 이뤄진 피케테로스 시위를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식량과 일자리를 요구하고 예금 동결에 항의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는 작업장과는 연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 냄비 투쟁을 벌이는 사람들은 정치인들의 부패와 외국 자본의 사악함에 분노를 집중하고 있다. 냄비 투쟁은 자생적으로 생겨난 대중 의회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고 자본주의 체제에 분노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계급 구성이 다양하다. 투쟁의 성격도 모순적이다. 이들은 국기를 흔들며 국가를 즐겨 부를 정도로 민족주의적이다.
나날이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자 정부는 중간계급 일부를 이 운동에 끌어들여 빈민과 실업자 운동에 물타기를 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두 노총도 취업 노동자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런 특징은 아르헨티나 노동운동이 페론주의 정당에 종속돼 왔던 역사를 반영한다.
매우 높은 실업률, 소기업과 중간계급의 파산, 빈곤이 낳은 원자화와 고립감이 한편으로는 빈민과 실업자 투쟁을 낳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계급 사상이 널리 퍼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경제 공황에 환멸을 느낀 일부 사람들은 일부 선거에서 극우파를 지지하거나, 칠레나 볼리비아나 파라과이 출신 이민자들을 비난한다. 최근 여론 조사는 이런 인종 차별이 지난 10년 이래 급속도로 자라고 있음을 보여 줬다.
투쟁의 분출은 절망감에서 나오는 이런 인종 차별이 민족주의 데마고기를 잠재우고 있다. 의미있게도, 지역 대중의회가 통과시킨 결의안은 이민자들에 대한 연대를 표시한다. 하지만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투쟁이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다른 대안을 제공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인종주의나 극우 민족주의가 득세할 수 있다.
과제
아르헨티나 좌파는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다. 그러나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대중의회에서 제기되는 정치적·사회적 요구를 일반화하는 것이다. 임금 삭감 없는 일자리 나누기, 민중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는 복지 정책, 은행의 국유화, 사유화된 기업의 재국유화, 민중에게 식량을 제공하기 위해 농업 관련 기업과 슈퍼마켓의 식료품 통제하기 등.
둘째, 이러한 요구들을 실행에 옮기려면 노동자 대중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아르헨티나에서 위의 요구를 시행하려면 여전히 투쟁 회피적 노조 지도자들이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취업 노동자들을 투쟁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실업률이 높아져 고용돼 있는 노동자들의 수가 전보다 줄어들긴 했지만 그 수는 여전히 많다. 특히, 이들은 지금의 아르헨티나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데 핵심적인 구실을 하고 있다. 실업률이 높은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이기기 힘든 싸움에 뛰어들기를 꺼릴 수 있다. 또, 노조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까 봐 두알데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설득한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은 대중 행동이 정부를 어떻게 무너뜨렸는지를 잘 기억하고 있다. 더욱이 노동자들은 나날이 벌어지는 투쟁에 조직으로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연루하고 있다. 일부 노동자들은 피케테로스 운동에 동참하고 있으며, 다른 노동자들은 인플레로 인한 생활수준 하락에 저항하고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이런 투쟁을 통해 전에는 이루기 힘든 것처럼 보이는 요구들을 쟁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작년 말부터 시작한 아르헨티나의 격변은 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하루가 다르게 바꿔 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