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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15주년 - 거인이 잠에서 깨어나다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15주년 - 거인이 잠에서 깨어나다

이정구

1987년 7월 5일 현대엔진 노동조합의 건설에서 시작한 대중파업은 거의 세 달 동안 전국을 파업 물결로 뒤덮었다.

7∼9월 동안 3천3백11건, 하루 평균 30건 이상 파업이 발생했다. 이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 발생한 쟁의를 모두 합한 것보다 많은 수였다. 그야말로 ‘십 년을 하루에 뛰어넘은’ 거대한 대중파업이었다. 이 기간 동안 기존 노조의 38퍼센트에 해당하는 1천60개의 새로운 노동조합이 생겼다.

7월 한 달만 해도 2백70여 건의 파업이 벌어졌고 1백20여 개의 신규 노조가 만들어졌다. 8월 들어 파업은 울산과 남동해안 공업 지대에서 구미·대구·포항을 거쳐 강원도 광산 지역과 호남 지역, 그리고 중부의 경공업 지역을 휩쓸며 수도권으로 이어졌다. 파업은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중화학공업에서 경공업으로, 광공업에서 운수·부두·사무직·전문직·판매서비스직 등 전산업으로 파급됐다. 투쟁이 절정에 오른 8월에는 2천5백여 건의 파업이 벌어졌다. 대중파업 기간에 벌어진 쟁의 가운데 97퍼센트가 불법 파업이었다. 노동자들은 쟁의 발생 신고나 냉각 기간을 무시하고 일단 파업을 해서 힘을 과시한 뒤에야 협상에 임했다. 당시 전경련 전무가 “이번 노동쟁의는 노동관계법은 물론 기본 질서를 완전히 무시한 혁명적 색채가 농후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은 자주적 단결에 기초한 새로운 노동조합을 건설하거나 기존의 어용노조를 민주화했다. 파업을 전개한 작업장 가운데 70퍼센트 이상이 노동조합 건설과 노조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

노동자들은 “해고·강제 사표·부당한 부서 이동·차별 대우 등에 대한 불만과 저임금·장시간 노동·작업 강도 강화·열악한 작업 환경 등”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단결과 민주노조 건설이 사활적이라고 생각했다.

한국노총은 이미 이러한 기능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밝히 드러났다. 한국노총은 파업이 한참 진행중이던 8월 27일 “노총과 각급 상하조직을 고립화 내지 붕괴시키려는 일체의 행위에 대해 전 조직력을 동원해 단호히 응징[하고] 필요한 경우 1천 명의 각목 부대를 동원”하겠다고 협박했다.

투쟁을 통해 건설된 노동조합들은 현장 조합원 대중 조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작업장에 기초한 대표들을 직접 선출하고 통제했다. 노동자들은 파업 농성장에서 임시 총회를 열어 노동조합의 비민주적 제도를 바꾸고 어용 집행부를 교체했다.

6월항쟁의 성과를 굳히다

1987년 6월항쟁은 4·19, 부마항쟁, 5·18과는 달리 결정적인 반전을 겪지 않았다. 뒤이은 7∼9월 대중파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6월항쟁으로 한 발 물러선 군부독재는 위력적인 7∼9월 대중파업에 깜짝 놀랐다.

전두환 정권은 노동자 투쟁을 섣불리 건드렸다가 더 큰 투쟁에 직면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7월 10일 노동부장관은 “합법적이고 건전한 노동운동은 계속 육성, 활성화시켜 나가야 하며 경영자들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투쟁이 절정에 올라 정치적 성격을 띨 조짐을 보이던 8월 20일 ‘중앙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탄압을 준비했다. 8월 21일 치안본부(지금의 경찰청)는 ‘좌경척결 3대방안’을 발표하고 “위장취업자와 외부세력 개입을 색출”하겠다고 발표했다.

8월 22일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엿새 뒤 경찰은 열사의 장례 행렬을 가로막고 시신을 탈취했다. 그리고 전국에서 벌어진 추모 집회를 공격해 9백33명을 연행했다.

아직 경험이 일천하고 정치적으로 미숙했던 노동자 운동은 정권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8월 28일을 기점으로 노동자 투쟁은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8월 28일까지 하루 1백 건 이상을 기록했던 쟁의는 8월 29일 이후 50건 내외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각각 나름의 ‘선거혁명론’을 내세우며 선거를 통해 군부독재를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한 선거주의도 투쟁의 전진을 막은 장애물이었다. 야당에 정치를 의존하고 있던 국민운동본부는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 혁명과 민선민간정부의 수립’을 주장했다.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도 김대중이 주장한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요구했다. 선거와 야당에 의존하고 있던 국민운동본부와 서대협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적극 지지하여 투쟁을 확대하거나 정부의 공격에 반대해 투쟁을 조직하는 일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6월항쟁과 7∼9월 대중파업을 통해 급속히 성장한 노동계급의 진출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1987년 11월 노동법이 개정돼 7∼9월 대중파업으로 탄생한 민주노조가 공식 인정됐다. 남한 노동자 운동이 거대한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교훈

1987년 7∼9월 대중파업의 씨앗은 6월항쟁이었다. 6월항쟁이 전개되면서 갈수록 노동자들의 참여가 늘어났다. 6월항쟁은 부분적으로 노동자 투쟁의 성격을 띠었다. 노동자들은 거리에서 얻은 자신감을 작업장으로 가지고 갔다.

다른 한편, 7∼9월 대중파업은 6월항쟁과는 달리 노동자들의 독자적인 요구를 내걸고 싸운 투쟁이었다. 부르주아 야당은 궁극적으로 사장들의 이익을 대변했다. 그래서 6월항쟁에서 군부독재에 반대한 부르주아 야당은 “한꺼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며 노동자들에게 투쟁 자제를 호소했다.

중간계급 사람들이 간부들인 국민운동본부는 선거주의와 민중주의 정치에 기반했기 때문에 노동자 투쟁에 적극 참여하지 못했다.

노동자들의 고유한 요구를 민주주의 요구로 뭉뚱그리게 되면 노동자 계급과 다른 계급의 차이를 못 보게 된다. 군부독재에 맞서 일관되게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 노동 계급임을 이해할 수 없다.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대부분 기업 단위로 이루어진 경제 투쟁이었다. 한 공장의 투쟁은 금세 공장의 담을 넘어 지역 연대로 발전했다. 그 결과 현대그룹노조협의회 같은 노조 연합 조직이 등장했다. 그 이후에는 지역 노동조합들과 전국 조직이 탄생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거리에서 경찰과 충돌하기도 하고 시청과 관공서를 공격하는 형태로도 나타났다. 권위주의 국가에서 노동자들의 경제 투쟁은 국가의 개입과 탄압 때문에 쉽게 정치 투쟁으로 발전한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 흔히 국가와 대결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1987년 7∼9월 대중파업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대중파업》에서 주장한 것이 그대로 적용된 사례다.

정치 투쟁은 경제 투쟁에 강한 자극을 주고 경제 투쟁을 위한 기름진 퇴적물을 남겼다. 투쟁의 선두에 선 부분은 뒤져 있는 부분에게 자극을 주고 뒤져 있던 부위가 다시 전면에 나서 거대한 투쟁으로 어우러지는 ‘선진과 후진의 변증법’이 펼쳐졌다.

7∼9월 대중파업은 노동조합이 투쟁 속에서 건설되고 강화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또, 현장 조합원 대중에 기반할 때 노동조합이 더욱 거대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