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 오스카 라퐁텐, 더불어숲:
신자유주의에 대한 경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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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독일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오스카 라퐁텐의 책이 출간됐다.
라퐁텐의 책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는 독일에서 출간된 지 하루만에 프랑크푸르트·뮌헨·베를린 등 주요 도시에서 동이 났고, 베를린 시내 책방에서는 시간당 200부씩 팔리기도 했다.
이 책은 독일 총리 슈뢰더의 신자유주의 노선을 공격하는 내용인데, 슈뢰더 정부가 지방 선거에서 패배를 거듭하던 때에 출간돼 더욱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라퐁텐이 말했듯이 이 책은 “회고록이 아니다. 이 책은 사민당 내의 근본적인 노선 싸움에 관한 책이다.” 그는 머리말에서 “사민당은 제 영혼을 팔아서는 안 된다”며 “더 이상 신자유주의의 미로에 들어서지 않도록 하는 데에 기여”하기 위해 책을 썼다고 말한다.
라퐁텐은 1943년에 빵집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고 1960년대 후반 유럽 학생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활동했다. 1976년 32세에 자르브뤼켄의 최연소 시장으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1985년에는 자를란트 주지사에 당선됐다. 1990년 독일사회민주당(SPD) 총리 후보로 선거에 나갔으나 헬무트 콜 전(前) 총리에게 졌다. 유세 도중에 정신질환자인 여자가 휘두른 칼에 목을 찔려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1995년 사민당 당수로 선출됐고 1998년 총선에서는 사민당이 집권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1998년 10월부터 재무부장관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라퐁텐은 1999년 3월 11일, 사민당이 정권을 잡은 지 5개월만에 사민당 당수직과 재무장관직을 사임해 전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라퐁텐은 부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적은 세금과 복지 혜택을 주는 정책을 폈기 때문에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로 불렸다. 라퐁텐의 정책은 재무장관에 임명될 때부터 기민·기사련 등 보수 야당과 재계는 물론 사민당 내 우파한테서도 공격의 대상이었다. 특히 사장들은 라퐁텐의 조세개혁과 사회보장 정책이 기업의 부담을 가중시켜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런 압력 때문에 라퐁텐이 사임하자 유럽 금융시장은 유로화 상승으로 그 소식을 반겼다. 출범 이후에 계속 하락하던 유로화는 이날 최대 상승폭을 보였다. 로비스트들과 경제연합들은 라퐁텐의 퇴장을 승리로 생각했다. “오늘은 내가 이 자리에 있었던 이후로 가장 좋은 날이다”라고 보험기업체사용자연합 회장인 한스 슈라이버는 기쁘게 외쳤다.
하지만 라퐁텐은 독일사회민주당 내 청년사회주의자 조직과 노동조합 진영한테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대중의 급진화
1998년 9월 27일 독일 총선 결과는 경제 위기로 인한 대중의 급진화에서 독일도 예외일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좌파 정당이 마치 유행처럼 집권하는 상황이었다. 노동 시장의 유연화를 주장하며 복지 삭감과 더 많은 해고를 가져온 보수 정당들에게 환멸을 느낀 대중은 좌파 정당에게 그들의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
독일 총선에서도 독일사회민주당은 16년 동안의 콜 정부의 집권을 몰아내고 41%의 지지율로 의회에서 최대 정당이 됐다. 그리고 6.5%를 얻은 녹색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했다. 사민당은 노동 계급 지역에서 더 많은 표를 얻었고 독일 산업의 심장 지대인 루르의 대부분 지역에서 60%가 넘는 표를 얻었다. 옛 동독 지역에서도 많은 표를 얻었다.
사회민주당의 전통적인 경향을 대표하는 좌파 성향의 당수 오스카 라퐁텐이 선거 운동에서 탁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일자리 창출, 치료비 보조 복원 등을 약속했다. 라퐁텐은 노동 계급에게 유리한 정책을 펼침으로써 사민당이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했다.
“사장들의 친구”라 불리며 독일의 “클린턴, 블레어”로 자처하는 슈뢰더는 친기업적인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겉으로라도 급진적인 말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현대화
더 구체적으로 라퐁텐이 주도했던 경제·사회 정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세 정책에서 사장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매기고 노동자들의 세금을 감면하도록 했다. 연금 수령자와 실업자 지원금을 삭감하지 않도록 했다. 라퐁텐은 집권 후 정책 프로그램에 “우리는 평생을 힘들게 일해온 사람들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사민당이 이끄는 연방정부는 기민·기사련과 자민당이 만든 연금법을 즉각 수정할 것이다.”는 구절을 넣었다.
둘째, 병이 들었을 때 임금을 지불하는 정책을 부활하고, 부당해고 방치책을 유지하고, 날씨가 나빠 일을 하지 못할 때에도 수당을 주는 것을 재도입하는 등 각종 노동 관련 정책을 수정했다. 그는 “인간은 상품이 아니다”라며 “사람들의 임금과 노동 조건의 문제는 경쟁을 최우선으로 삼는 관점에서 논의돼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민주의적 정치신조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고 말한다.
셋째, 청소년 실업을 줄이기 위한 조치를 마련했다. ‘청소년 실업 대신 직업 교육과 일자리를!’이라는 구호를 정식화했다. 라퐁텐은 교육의 문제는 “경제적 합리성의 문제가 아니고 사회적 성격의 문제”라고 말한다.
넷째, 보건 정책도 수정했다. 그는 “‘행운을 빈다. 특히 건강하길 빈다’는 흔히 하는 인사말이 단순히 그냥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고 말하면서 법적으로 규정된 약값 지불을 증액하는 것을 다시 도입하는 조항을 담고 청소년들이 의치를 할 경우 재정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조항도 넣었다.
다섯째,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에너지를 개발하고 원자력 발전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라퐁텐은 “노동자의 권익을 깎아 없애고, 임금 동결을 설교하며, 사회보장을 감축하는 문제에서라면, 사민당이 아무리 애를 써도 자유당과 기민·기사련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라며 사민당이 지지를 얻는 방법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친노동자적인 정책을 쓰는 것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 나라에서 ‘경쟁력 강화’나 ‘신자유주의’가 전혀 낯선 말이 아니듯이 독일에서도 신자유주의 경제 이론은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주 친숙하게도 독일의 지배자들은 독일이 국가 경쟁력을 잃었다고들 말하면서 노동 계급을 공격하기 위한 정책들을 정당화하고 있다.
독일 언론에서는 신자유주의 이념을 신봉하는 사람들을 ‘현대화주의자’라고 부른다고 한다. ‘현대화’나 ‘현대’라는 유행어가 얼마나 반(反)노동자적인지를 라퐁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현대화주의자들’이 ‘현대’라는 말로써 무엇을 의미하는지 핵심만 걸러내어 말한다면, 그것은 소위 세계화의 압박이라는 것에 경제적·사회적으로 적응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현대’라는 개념은 경제학적 범주로 축소된다. 앵글로색슨 인들은 부당해고 방지법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도 현대적이므로 부당해고 방지법을 폐지한다는 식이다. 많은 나라에서 사회보장제도가 축소되고 있다. 우리는 현대적이다. 그러므로 사회보장을 삭감한다[는 식이다].”
반면에, “사민주의적 의미에서 현대성이란 개인들의 자유를 신장하는, 말하자면 개인들의 예속성을 없애고 주체적 결정의 여지를 새로 열어주는 일체의 개혁을 의미한다.” 그래서 “만약 사민당이 궁극적으로 순응주의와 정치적 창조활동의 포기를 가리키는, 그런 현대성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사민당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게 될 것”이라고 라퐁텐은 경고한다.
정의를 위한 정책들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라퐁텐은 당 내부의 ‘현대적인’ 개혁을 위해 노력했는데 이것은 우리 민주노동당도 매우 배울만한 점이다.
젊은 당원
라퐁텐은 시대에 뒤지고 개혁을 원치 않는 정당이라는 당의 낡은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사민당 청년 당원들과 젊은이들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민당은 이전에 사민당 청년 당원들을 등한히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당수들은 젊은이들의 정치 집회에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젊은이들이 없다면 선거에 이길 수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그 대중정당의 지도부들도 알고 있었으리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취임 직후 나는 사민당 청년 당원들과 대화의 자리를 마련했다.”
그는 전당대회 분위기도 바꾸려고 노력했다. 전당대회에서 사민당 청년조직인 ‘젊은 사회주의자’의 의장 안드레아 날레스가 사민당 당수와 함께 기조 연설을 하고,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전당대회 무대 장식을 꾸미게 했다. 그런 일은 사민당 역사에서 유례 없는 일이었지만 큰 호응을 얻었다. (그는 대회 전날 밤 젊은이들과 테크노 댄스 바 무대 위에서 춤을 추기도 했다.)
단지 형식만이 아니라 내용에서도 청년 당원들의 의견을 반영했다. 전당대회에서는 직업교육을 위한 공과금 문제를 놓고 매우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청년 당원들은 그 동안 “직업교육을 실시하지 않는 자들에게 공과금을!”이라는 모토로 청년 실업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슈뢰더는 이 공과금의 도입에 반대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압도적 다수의 찬성을 받았다.
“젊은 당원들이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했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라퐁텐이 개혁적인 정책들을 취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회민주당은 점점 자신을 뽑아 주었던 노동자들에게 멀어져가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그들을 공격하려 했다.
그리고 라퐁텐이 사임한 후에 슈뢰더는 더 노골적으로 친 기업적인 정책으로 선회했다.
코소보 전쟁
슈뢰더는 이윤에 대한 세금(법인세)을 45%에서 35%로 낮추고 최상위 소득자들의 소득세를 53%에서 49%로 낮추려 했다. 그리고 원자력 발전소를 단계적으로 폐쇄하는 방침을 철회하는 것을 시사하는 등 재계의 손을 들어주는 발언을 잇따라 내놓았다. 그리고 ‘인종’을 잣대로 삼고 있는 독일의 국적법을 개정하려는 계획을 폐기했다.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는 작년에 있었던 코소보 전쟁이었다. 라퐁텐이 직위에서 물러난 지 12일 째 되던 날인 1999년 3월 23일에 나토는 밀로세비치가 코소보에서 행하는 살인과 타민족 추방을 종식시키기 위해 세르비아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슈뢰더 정부는 나토의 군사 개입을 적극 지원했다.
하지만 라퐁텐은 폭격을 즉각 중단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는 1999년 5월 1일 자르브뤼켄에서 열린 자르 지역 독일노조연맹의 5월 집회에서 나토의 폭격에 반대하는 연설을 해서 엄청난 환호를 받았다. 그의 연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오늘 제가 유고슬라비아의 전쟁을 언급할 때 이런 사실들을 기억해 보고자 합니다. 유고슬라비아 같은 다 민족 국가에서 단지 한 특정 민족만이 추방으로 인해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견해는 잘못된 것입니다. 세르비아인들 역시 추방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습니다. … 요즘 나는 나토가 자신의 명예를 지켜야만 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즉 나토는 어쩔 수 없이 지금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 이 승리는 도대체 누구의 승리인가라고 저는 이제 묻습니다. 이 전쟁 때문에 고통을 받는 인간들의 비참함에 대해 도대체 명예를 지키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녹색당의 지도자이자 연립 정부의 외무부 장관인 요슈카 피셔는 코소보 전쟁 중에 “나는 다시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것뿐 아니라 다시는 아우슈비치가 없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폭격은 소위 말해서 ‘세르비아SS’를 막기 위해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나토가 코소보 전쟁을 인권 전쟁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라퐁텐은 “만약 우리가 코소보에서 행해진 것과 같은 밀로세비치가 행했던 인권손상을 처벌하고자 한다면 아마 우리는 세계 절반 정도에 폭탄을 퍼부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위선을 꼬집는다.
전쟁은 인명 피해를 줄이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희생자들을 더 많이 만들어냈다. “코소보 전쟁은 방위를 위한 전쟁은 분명 아니었다. 무고한 인간을 살해하는 등 인권이 수호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인권을 수호해야 한다는 논거는 여기서 이미 적용이 되지 않는다”는 라퐁텐의 지적은 옳다.
나토는 87일 동안 밤낮으로 유고슬라비아에 폭격을 가하고 공군 전투기 3만 6천 대를 투입했는데, 남은 것은 파괴된 땅과 즐비한 시체뿐이었다.
라퐁텐은 “자신의 강령과 전통을 통해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에 찬성하는 일을 사명으로 삼았던 거대한 두 조직체, 즉 사민당과 노동조합이 슈뢰더 정부에게 돌연 등을 돌리려 하지 않았던 것”을 비판한다. 그리고 그는 “평화는 무기 없이 창출된다”는 슬로건을 “평화는 모든 폭력을 통해 창출된다”로 바꾼 녹색당도 비판한다.
“녹색당은 전쟁당”
라퐁텐은 “나는 에너지 정책, 교통 정책 분야 및 특히 평화 정책의 측면에서 녹색당이 사회복지적·생태주의적 개혁 정치를 펼 수 있게 보장해 준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녹색당을 파트너 상대로 삼고자 했다. 연방 정부에서 내가 사임한 이유가 되었던 것 중의 하나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녹색당이 제 방향을 잃었다는 것을 너무나 빨리 확인했다는 것이다”고 말한다.
녹색당원들은 이전에 사민당 당원이었던 사람들이다. 사민당에 환경 정책이 있었지만, 당내의 상당수가 환경 보호가 일자리를 위협한다는 견해를 계속 폈기 때문에 녹색당이 창당됐다. 녹색당은 70년대와 80년대에 반전·반핵 항의 시위의 한복판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녹색당은 변하고 있었다. 녹색당은 부자들에 대한 세금 감면과 그에 따르는 재정 결손을 노동자들에게 부담시키기, 노동 유연화 등을 주장하기도 했다.
라퐁텐은 녹색당이 “아무리 늦게 잡아도 1998년 5월 코소보 전쟁에 관련한 빌레펠트 특별 전당대회에서 이미 평화주의와 작별을 고했다”고 말한다. 이 당대회에서 녹색당 지도자들과 당원들 사이에 전쟁 문제에 관한 심각한 충돌이 있었다. “폭격은 누구도 구하지 못한다”는 말이 적힌 배너를 든 8백 명이 넘는 시위대가 당대회장 입구를 봉쇄했다. 한 시위자는 요슈카 피셔의 얼굴에 붉은 페인트 가방을 던지기도 했다. 요슈카 피셔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행진에 참여했고, 1973년 피노체트 정권의 쿠테타에 반대하는 행진에도 참여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이제 피셔는 나토의 폭격을 촉구했고 독일의 전투기가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요슈카 피셔는 이제 녹색당이 경제 자유주의적 입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라퐁텐은 “환경친화 운동으로 출발하여 성장의 한계를 얘기하던 그 당이 과연 경제 자유방임주의에서 미래를 찾을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녹색당은 이제 자기들이 획득해야 할 유권자 층이 보수 정당인 자민당과 겹친다고 믿는다.
1999년 6월에 젊은 녹색당 정치인들은 당 강령 중에 거추장스런 부분들을 치워버리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이렇게 썼다. “녹색당의 강령은 마치 다락방과 같다. 전에는 누군가의 맘에 들었겠지만 이미 오래 전에 고물이 되어버려 대체 어디에 필요한지 모를 것들이 그 안에 다 들어있다.”
녹색당의 여 대변인 중 한 명인 안체 라드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정체성은 사라졌다.”
“제3의 길은 그릇된 길이다.”
라퐁텐은 제3의 길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제3의 길이란 실패한 고전적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앤서니 기든스가 말했던 것이다. 영국 총리 블레어와 독일 총리 슈뢰더가 특히 신봉하는 이론이다.
하지만 ‘제3의 길’은 그 내용에서 신자유주의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라퐁텐은 “제3의 길에서 설명된 것처럼 소위 경제적인 강제에 정치를 순응시키는 것은 그릇된 길일 것이다”고 말한다.
그는 “기업은 이윤이 없는 한 확장될 수 없고 더 많은 노동력을 고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진리이다. 그러나 또 다른 진리가 있다. 한 기업은 피고용인을 해고하는 중에 자신의 이윤을 상승시킬 수 있”기 때문에 “큰 투자 회사들의 재산 관리자와 펀드 매니저의 이해관계는 노동자와 실업자의 이해 관계와 일치하지 않는다. 재산가의 이해관계는 종업원의 이해관계와 다르다. ‘제3의 길’이라는 말로 이 사실을 속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제3의 길’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강제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아예 그것에 적응하자는 생각”이며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노동임금의 동결, 사회복지의 축소, 15%에서 50% 이상으로 증가한 자본 이득 등이 나타난다. 이러한 차원의 ‘제3의 길’은 19세기로 후퇴”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과학적으로 은폐되어 있으며 매체들의 후원을 받은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이라는 명제 하에 적절하게 나타난 일종의 보수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신자유주의나 제3의 길에서 주장하는 세계화는 노동자들에게 다른 나라 노동자들과 더 경쟁할 것을 강요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고통을 안겨 주었다. “20세기 말 정치의 잘못된 발전은 노동시장의 유동성이라는 말이 가장 특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이미 ‘노동시장’이라는 말이, 노동력 즉 인간은 시장에서 팔리기 위해 내 놓여진 것이고 그 시장에서 구매의사가 있는 사람, 즉 기업가가 이런 인간을 고용한다는 추측으로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물건이 아니다. 본래 사물에만 사용 가능한 단어를 인간과 연관지어 사용한다는 것은, 정치에서 인간성의 상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반면, “좌파라는 것은 21세기에도 인간과 인간에 대한 관심을 정치적·경제적 결정의 중심에 올려놓는 것을 의미”하기에 라퐁텐은 신자유주의 주류에 저항하기 위해 노력했다.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
라퐁텐의 말대로 “적녹 연립 정권은 결국 기민·기사련과 자민당 연정을 물러나게 했던 바로 그 실수들을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었다. 슈뢰더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채택해 기업가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1999년 3월 10일 내각회의에서 해당 업무에 관한 계획이 토론됐다. 슈뢰더는 “경제를 무시하고서는 국가를 통치할 수 없으며 자신은 경제에 반하는 정책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회의를 끝맺었다.
라퐁텐은 사임 이유를 “좋지 않은 팀워크” 때문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라퐁텐의 사임은 사실상 해임과 마찬가지다. 슈뢰더는 라퐁텐의 사임 후 토니 블레어에 더욱 가깝게 이동했다. 그러므로 “라퐁텐의 몰락은 유럽 사회민주주의 역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라퐁텐은 케인스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케인스처럼 국가를 이용해 자본주의를 조절하고 규제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실업을 줄이기 위한 국가 개입을 주장해 왔고, 금리를 내리지 않는 유럽 중앙은행을 비난했다. 그는 실업률을 줄이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3%대의 금리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금융자본을 규제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대기업의 반발을 샀다. 대기업들은 법인세를 높이는 계획을 법제화하면 자산을 해외로 이동하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재계의 논거는 빈약하다. 90년대 중반에 독일은 국내 총생산에서 법인소득세 수입이 차지하는 비율이 선진 7개국 가운데 가장 낮았다.
〈조선일보〉는 라퐁텐의 사임은 “재계의 실질적인 승리”라고 말했다. 라퐁텐이 사임하자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독일을 통치하는 건 누구인가. 선출된 정부인가 아니면 사장들인가.”
국가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국가는 경제를 쥐고 있는 자본의 이해관계를 소중히 생각한다. 자기들의 이익을 정부가 침해한다고 판단하면 대기업은 그 정부가 어떤 정부가 됐든 정부의 의지를 좌절시키기 위해 단결한다.
대기업들이 개혁에 저항할 때 유일한 대안은 노동자 계급의 지지와 힘을 결집하는 것인데, 라퐁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라퐁텐이 대기업에게 압력을 받았을 때 그는 독일의 매우 강력하고 전투적인 노동자 집단이 금속 노동자들에게 자신을 지지해 파업에 돌입해 달라고 호소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 라퐁텐의 한계였다. 만일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내 좌파와 녹색당 지도자들이 시위를 호소했더라면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슈뢰더는, 정부가 여전히 사회정의에 관심 있다고 노동자들과 노조 지도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라퐁텐이 정부에 없는 상태에서 노동자들과 직접 충돌해야 한다.
라퐁텐의 경고는 매우 귀기울일 만하다. “시민들이 신자유주의의 사회적 냉담함을 거부했기 때문에 유럽의 좌익 정부는 권력을 획득한 것이다. 정치가 시민들의 ‘도움 요청’을 못 들은 척하고 어떤 개선도 도입하지 않는다면, 저항은 다른 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유럽의 사회 민주주의적 정부들이 사회 민주주의적 사회 모델을 극적인 통화 및 재정위기에 빠졌던 신자유주의에 대립시킬 유일한 기회를 잃어버린다면, 급진적인 정당들이 크게 번창할 것이다.”
라퐁텐의 말대로 “이익은 사유화되는 반면에 손실은 사회화되는 사회는 공평한 사회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는 유럽을 통합하는 것으로, 또는 단지 좋은 정책을 정부가 수립하는 것만으로는 끝장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의 주인인 노동자들이 스스로 투쟁에 나서서 사회를 변화시킬 때에만 가능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노동자 투쟁의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는 정당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심장은 아직 증권거래소에서 매매되지 않는다. 그러나 심장은 하나의 확실한 원칙을 갖고 있다. 심장은 왼쪽에서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