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서방의 도구로 변모한 파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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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4일 하마스가 파타 산하의 무장세력들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축출한 뒤, 서방과 이스라엘,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대통령의 하마스 고사 작전이 계속되고 있다. 6월 31일에도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를 공습해 7명을 죽였다. 지난 〈맞불〉 49호와 50호는 이런 위기의 배경에 압바스 대통령이 이끄는 파타의 하마스 정부 전복 시도가 있다고 주장했다.
아랍계 사회주의자로 영국의 혁명적 반자본주의 주간지 〈소셜리스트 워커〉의 중동 문제 전문 기자인 시몬 아사프가 한때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을 이끌었던 파타의 성장과 타락을 역사적·정치적 맥락에서 살펴본다. 이 글은 〈소셜리스트 워커〉 2056호(6월 23일자)에 실린 글을 번역한 것이다.
파타는 1960년대에 강국 이스라엘에 맞선 팔레스타인 혁명 과정에서 등장했다. 이스라엘은 1948년에 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쫓아내며 건국했다.
파타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공언한 시기에 팔레스타인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핵심이었다. 1960∼70년대의 격렬한 게릴라 투쟁에 이어서 1987년 점령지 ― 1967년 이스라엘이 강탈한 ― 에서 제1차 인티파다(민중항쟁)가 일어났다.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에 맞서 PLO가 패배한 뒤 이 인티파다를 계기로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이 부활했다.
인티파다는 투쟁이 계속될 것임을 입증했다. 그러나 인티파다는 또한 1988년 PLO가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역사적 팔레스타인에 유대인과 아랍인의 세속적·민주적 국가를 건설한다는 자신의 요구를 포기하는 길로 나아가게 만들기도 했다.
PLO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는 “두 국가 방안”을 받아들이고 1994년 오슬로 협정에 서명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동예루살렘과 헤브론 같은 도시들에서 조직적으로 인종청소를 자행하고, 요르단강 서안지방 팔레스타인 마을들의 숨통을 조이고, 팔레스타인인들의 토지를 빼앗고 새로운 정착촌을 건설하는 등 전혀 거리낌없이 행동했다.
PLO가 자신의 원칙을 포기할 때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는 오히려 인티파다를 겪으며 급진화했다.
1988년에 그들은 하마스(이슬람 저항 운동)를 출범시키며 군사적 투쟁을 지속했다.
두 갈래길
이제 팔레스타인의 운동은 두 갈래 길로 나아갔다. 파타는 자신을 팔레스타인 국가로 수립하고 이스라엘과 협상했다. 하마스를 비롯한 다른 팔레스타인 단체들은 군사적 저항을 지속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파타의 순응을 약점으로 여겼고, 파타가 통제할 수 없는 정치 협상 과정으로 파타를 더 깊숙이 끌고 들어갔다.
오슬로 협정은 아라파트와 파타에게 굴욕이었다. 그러나 최후의 타격을 가한 것은 이스라엘의 전범(戰犯) 아리엘 샤론이었다. 2000년 샤론은 예루살렘의 한복판에 있는 하람 알-셰리프, 즉 황금돔 사원으로 행진했다.
그동안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쌓여 온 모든 분노와 좌절감이 제2차 인티파다로 폭발했다.
샤론은 2001년에 이스라엘 총리로 선출됐다. 그는 이스라엘 탱크를 다시 요르단강 서안지방으로 진격시켰다.
양보 전략에 모든 것을 걸었던 아라파트는 라말라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청사가 이스라엘군에 포위당해 있을 때 사망했다.
그러나 아라파트의 뒤를 이은 파타 지도부는 2003년 이른바 “중동 평화 로드맵“의 일환으로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도록 해 주겠다는 조지 부시의 약속에 매달렸다.
이스라엘은 파타에게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을 단속하라고 요구했다. 이스라엘은 또, 팔레스타인 저항세력 전사들을 겨냥한 “표적 살해” 작전을 계속해서 특히 하마스의 정신적 지도자인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을 암살했다.
하마스가 10년 간 휴전을 거듭 제안했음에도 이스라엘의 “표적 살해” 작전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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