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계몽주의 종교 비판의 한계를 보여 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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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유전자 중심의 세계관을 설파한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하다. 실제로, 이 책은 일부분에서 “DNA 마니아(탐닉)”(어느 과학사학자의 표현)를 그 나름으로 비판하고 있어도 전체적으로 그것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성과 유색인종에 대한 사이비 과학과 우익의 편견을 분쇄한 걸작 《인간에 대한 오해》의 저자인 고(故) 스티븐 제이 굴드는 도킨스의 유전자 환원론을 비판했다. 동성애 유전자니, 반사회성 유전자니 하면서 각각의 특성마다 그에 상응하는 고유한 유전자가 있다는 생각을 배격하면서 굴드는 유전자가 아니라 유기체 수준에서 자연선택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사회생물학을 비판한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의 지은이 스티븐 로우즈 런던대 교수는 도킨스를 정설파 다윈주의자나 다윈 근본주의자라고 부르기보다는 “초다윈주의자”라고 부르기를 선호한다.(‘초ultra-’는 도가 지나쳐 아예 어떤 범위나 수준을 넘는 경우를 묘사할 때 쓰는 접두어다.)
로즈는 도킨스가 유전자와 유기체(유전자를 운반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도킨스는 본다)의 분리를 상정해, 진화 과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궁색한 입장에 빠지게 된다고 비판한다.
도킨스의 생물학 이론에 대한 더 자세한 얘기는 이 글을 쓰는 필자의 능력 밖이다. 다만, 그의 유전자 환원론은 마르크스가 “기계적 유물론”이라고 부른 속된 유물론의 최신판 중 하나라는 점만 지적하고자 한다. 그는 종교 신앙이라는 현상조차 유전자와 비슷한 개념인 ‘밈’(meme)으로 설명하려 한다!
기계적 유물론의 전형은 18세기 프랑스 계몽철학자들과, 마르크스와 거의 동시대의 포이어바흐였다. 최근 한국에서 계몽철학자들이나 그 후예들의 종교 비판서가 부쩍 많이 출판됐다. 도킨스의 이 책과 《악마의 사도》, “스피노자의 정신”이라는 필명의 저자가 쓴 《세 명의 사기꾼》, 미셸 옹프레의 무신학의 탄생, 샘 해리스의 《종교의 종말》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샘 해리스의 책은 정치적으로 반동적인 입장 때문에 사거나 읽기에 돈이나 시간이 아까운 책이다.
기계적 유물론
이 순간 한국인들의 최대 관심사인 아프가니스탄 선교봉사단 피랍사건과 관련해서도 인터넷에는 피랍자들의 선교 활동을 비난하거나 복음주의 기독교와 이슬람을 싸잡아 종교 자체를 매도하는 글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피랍 한국인들이 특별히 기독교인들이라서 납치당한 게 아니다. 〈뉴스위크〉가 파헤친 피랍 당시 정황은 납치범들이 외국인이라는 사실 말고는 피랍자들의 정확한 신분을 몰랐음을 보여 준다.
“미국이나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돕기 위해 여기에 오는 외국인들은 누구든 납치할 것”이라는 가즈니 지역 탈레반 사령관 압둘라 잔의 말도 이 점을 확증해 준다(〈경향신문〉 8월 11일치).
이라크에서 오무전기 노동자가 살해됐던 일도 종교와 관계 있는 게 아니었다.
피랍자들을 비판하는 주장들은 미국과 한국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반동적인 기능을 하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점령이라는 핵심 문제를 불명료하게 하고 지엽말단으로 빠지게 하는 부적절한 주장들일 뿐이다.
작금의 사태와 관련해 종교 비판에 열중하는 견해는 “신에 대한 망상”이 원제인 도킨스의 이 책에서 큰 원군을 만난 느낌일 것이다. 도킨스는 종교가 비이성적이고, 과학적 증거를 거부하고, 불관용을 고무하고, 아동학대를 자행하고, 감수성이 강한 나이의 청소년들에게 혼란스런 세계관을 주입시킨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도킨스가 비판하는 종교는 무언가 현실의 종교 같지 않고 추상적인 한 다발의 교리 뭉치이다. 그는 경전, 종교 지도자들의 말과 행동, 평신도들의 일상의 실천과 관념, 상이한 교파들 사이의 상이한 신조와 상이한 행동 등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로 뭉뚱그리고 있다. 역사유물론에 전혀 못 미치는 강단 종교사회학의 눈으로 봐도 그의 종교관은 실로 추상적이다 못해 공허하고, 공허하다 못해 바보 같고, 사실상 무지하다. 가령 그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과 미국 탈레반[미국의 기독교 근본주의]은 사람들이 경전을 글자 그대로, 또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잘 보여 주는 사례”라고 말한다.
도킨스가 이슬람주의와 이슬람을 구별하지 않고 동일시한다는 문제점은 잠시 유보하더라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근본주의(이슬람주의라는 용어가 좀 더 낫다)와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를 일률적으로 다루는 것은 그 이데올로기들의 행위주체가 각각 행사하는 권력의 범위와 정도가 결코 동등하지 않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비과학적 인식의 발로이다. 과학은 질뿐 아니라 양도 똑같이 중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아무리 배타적인 기독교 분파도 예컨대 이교도를 가차없이 대량 학살하라는 히브리어 경전(“구약성서”)의 일부 구절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도킨스는 우익 기독교계 산하의 반이슬람 쇼비니즘 진흥 기관인 ‘이슬람 및 기독교 연구소’의 소장이라는 자의 말을 인용해 무슬림은 모두 원리주의자인 양, 즉 이슬람과 이슬람주의를 구별할 필요가 없는 양 말한다. 종교의 사회적 토대에 관심이 없는 것에서 비롯한 결과이다. 그저 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면 언제 어느 곳의 사람이든 조롱하듯이 비난하기만 한다. 그러다 보니 지난해 초 덴마크 신문의 이슬람 조롱 만평 사태에 대해 “언론 자유” 운운하는 우익의 위선적 변호론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어리석은 작태도 보인다.
압제
역사를 훑어보듯 일견해도 대규모 항쟁에는 언제나 종교인들이 참가했다. 1894년 농민 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1987년 6월항쟁도, 심지어 1917년 러시아 혁명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도킨스는 권력 있는 종교인만 염두에 두거나 아니면 이들과 천대받는 종교인을 구별하지 않는다. 압제를 받는 민족의 해방 운동도 종교적으로 고취된 것이면 그저 맹신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기각한다.
도킨스가 고스란히 재연하다시피 하는 계몽주의적 종교 비판은 대중이 종교 지도자들의 교리 주입에 순응하기 때문에 종교가 계속 존속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도킨스가 이해하지 못하고 관심도 보이지 않는 점은 사람들이 왜 그런 걸 쉽사리 믿게 되느냐는 점이다.
아도르노는 “이른바 ‘정상적인’ 정신 상태인 사람들도 [점성술 같은] 망상의 체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자신들의 실제 삶이 처한 똑같이 가차없고 똑같이 아리송한 체계를 그런 체계와 구별하는 게 너무도 어렵기 때문이다” 하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난 30여 년의 세계 경제 부진 상황에서 선진 공업국 중 유독 미국만이 실질임금 수준과 복지 수준의 절대적 감축을 겪었는데, 바로 이런 가장 냉혹하고 비정한 형태의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개인들의 영혼에 입힌 상처 때문에 미국에선 종교가 오히려 부흥했다.
아스피린
미국은 터키보다도 덜 세속적인 나라다. 2003년의 한 여론조사에 대한 답변을 보면, 80퍼센트의 미국인이 모종의 내세를 믿는다고 하고, 76퍼센트가 천국의 존재를 믿는다(64퍼센트는 자신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는다)고 하고, 71퍼센트가 지옥의 존재를 믿는다(자신이 지옥에 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하고, 18퍼센트가 영혼재래설(가령 부활이나 환생 같은)을 믿는다고 한다.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추방하자는 운동이 어느 정도 지지를 받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
하지만 중국도 종교가 급성장하고 있다. 한 세대(생물학적 세대) 만에 세계 최빈국 중 하나가 부국 대열로 올라서기까지 발생한 갖가지 사회 문제들, 특히 극단적인 빈부격차와 도농격차, 극단적으로 나쁜 노동조건, 극단적인 환경파괴, 세계 최고 수준의 사형집행이 보여 주는 혹독한 억압 등으로 해마다 2백만 명이 복음주의 기독교에 입교했고, 그래서 조만간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의 5분의 1인 3억 명이 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도킨스의 일면적인 종교 비난이 “종교는 대중(the people)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 시대에 아편은 합법이었고, 가장 효과적인 진통제였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말을 현대식으로 의역하면 “종교는 대중의 아스피린”이라는 표현쯤이 될 것이다. 특히, 이 문구 앞뒤의 문맥을 살펴보면 마르크스가 종교에 대한 경멸적 비난이 아니라 종교의 사회적 토대 천명에 더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이 참된 실재를 획득하지 못했으므로 종교는 … 인간 본질의 판타지적 현실화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반대하는 투쟁은 간접으로는, 그 영혼의 향기가 종교인 세계에 반대하는 투쟁이다. 종교적 고통은 실제의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자 실제의 고통에 대한 항의이기도 한 것이다. 종교는 천대받는 사람들의 탄식이요, 인정 없는 세계의 인정이요,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 그것은 대중의 아편이다. 대중에게 행복에 대한 착각을 주는 종교를 폐지한다는 것은 대중의 실제 행복을 요구하는 것이다. 대중에게 그들의 조건에 대한 착각들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착각이 필요한 조건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종교가 그 후광인 현세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이렇게 마르크스는, 설득력 있는 논증으로 종교에 맞선 투쟁을 하려는(도킨스처럼) 것은 헛수고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종교 신앙의 근원이 실제 인간 고통이라면 후자를 근원적으로 제거하지 않고 전자를 추방하겠다는 도킨스식 생각이야말로 망상이 아닐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런 망상을 공유한다면 그것은 단지 망상에 그치지 않고 중대한 정치적 오류가 될 것이다. 사회 하층민들이 가장 많이 고통을 겪을 가능성이 크므로 그들이 종교를 수용할 가능성도 가장 크다. 우리와 함께하려면 신앙을 버리라고 이 사람들에게 요구함으로써 이들과 우리 사이에 장벽을 세우는 것은 정치적 자살 행위일 것이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단체라면 무신론이나 무신앙을 회원 자격에 포함시켜서는 절대 안 된다.
필자 최일붕은 대학원에서 종교사회학을 공부했다.
관련 도서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홍영남 옮김, 2006년 을유문화사 출판)
리처드 르원틴, 《DNA 독트린》
(김동광 옮김, 2001년 궁리 출판)
스티븐 로우즈 외,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
(이상원 옮김, 1993년 한울 출판)
스티븐 제이 굴드, 《인간에 대한 오해》
(김동광 옮김, 2003년 사회평론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