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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와 선교 논란:
기독교 선교, 어떻게 볼 것인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됐던 한국인 선교단이 천만다행이게도 9월 2일 무사귀환했다. 반전운동은 배형규·심성민 씨의 불가피하지 않았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노무현 정부의 무책임한 처사에 분노하는 것만큼이나 속에서 우러나는 참된 마음으로 무사귀환 피랍자들을 환영한다.

인천공항에서 계란을 던지려 하는 등 피랍자들을 비난하는 일부 사람들의 목소리는 ‘테러에 너무 유화적으로 대처하는 것 아니냐’, ‘혈세 낭비’ 따위를 운운하는 우파적인 목소리일 뿐이다. 정부의 존재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다.

피랍자를 비난하는 자들은 무엇보다 미군 등 나토군과 한국군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이 없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 완전히 침묵하거나 간과하고 있다.

필자를 포함한 모든 〈맞불〉 기고자들과 반전 운동 자체는 언제나 이 점을 분명히 해 왔다. 우리는 종교가 아니라 제국주의(그리고 그 아류)가 진정한 문제이고 진정한 쟁점이라고 그동안 거듭 강조했다.

그럼에도 부차적인 문제 ― 종교 문제, 특히 기독교 선교 문제 ― 에 대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는 입장 밝히기를 요구받고 있다.

먼저, 우리는 국제주의자로서 당연히 제국주의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자 쟁점이라는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므로, 제국주의적 점령이나 침략을 한국이 돕는 지역에서 기독교 선교(봉사 선교일지라도) 활동이든 NGO 구호 활동이든 해서는 안 된다.

선교든 구호든 모두 제국주의 점령자들과 현지 꼭두각시의 지배를 결과적으로 돕는 효과를 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의 소위 ‘인도주의적’ 제국주의는 점령지에서 생색내기 차원에서 구호 활동을 후원한다. 가령 〈경향신문〉 8월 30일치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정부는 동의·다산부대의 철수와 별개로 미국이 요청하는 NGO 등의 지방재건활동 참여 문제를 고민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 미국은 지난 5월 아프가니스탄의 지방재건팀(PRT), 지역재건팀(RRT) 참여 등을 요청해 왔다.”

점령 당국의 처지에서 볼 때 구호는 거대한 대중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를 최악의 빈곤을 다소 완화함으로써 점령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유용하고 자신의 지배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를 제공한다. 반면에, 점령지 주민인 수혜자는 이런 구호가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느낀다.

공동 운동

파병 한국군이 점령자의 일부인 나라에서 선교 봉사 활동하는 것을 반대한다고 해서 이번에 무사귀환한 피랍자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바람직하지 않은 일을 하다가 죽을 뻔한 친구를 반기기보다 야단치는 일부터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번 피랍자들은 노동계급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나머지 소수인 보통 사람들로, 그저 선량한 마음과 신심만으로 오지에 갔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군 점령지에서의 선교 반대라는 일반적인 입장이 구체적인 이번 피랍 무사귀환자들에 대한 책임 추궁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특히, 이번 무사귀환자들에 대한 비난이 미국과 한국 정부들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흐리게 하는 구실을 하고 있으므로 더욱 그래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한국이 소제국주의적 가해자가 아닌 나라에서는 기독교(정확히 말하면 개신교)가 공세적 선교 활동을 해도 좋을까? 가령 중국 선교는 어떤가?

비록 옛 소련과 북한 등지의 극악무도한 스탈린주의로 말미암아 진정한 마르크스주의가 부당한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는 국가가 종교 활동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한 예를 들면, 1917년 10월 혁명 이후 1927년 스탈린 반혁명 때까지 러시아에서 침례회나 오순절회 등 복음주의 계열의 기독교는 신도 수가 10만 명에서 1백만 명 이상으로 크게 번창했다. 특히, 1918년 10월 내전 상황인데도 트로츠키 주도로 혁명 정부가 종교적 병역 거부를 인정하고 의료분야 대체복무도 인정하면서 병역 기피를 위해 많은 청년들이 복음주의 기독교에 입교했다.*

원칙을 존중하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우리는 한국이 보조 점령자 노릇을 하는 나라가 아닌 곳에서도 선교 활동하는 것을 금지하라고 정부에 요구할 수 없다.
그러나 선교 금지를 정부에 촉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공세적 선교 방식과 그런 선교 개념을 찬동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문화’라는 학술 용어가 있을 정도로 세계의 수많은 인종들 속에서 종교와 문화는 서로 융합돼 있고, 또 이 종교문화가 오늘날 새로운 형태의 인종차별의 근거가 돼 있다. 가령 이슬람 공포증과 무슬림에 대한 편견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런 인종들에 대한 제국주의적 차별에 반대해 문화 다원주의를 지지하는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는 종교 다원주의도 지지하는 것이 일관된 정책일 것이다.

따라서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유일무이함과 우월함을 강조하는 선전 중심의 활동을 하기보다는 교육·의료·복지·환경 등의 분야에서 비기독교인들과 공동 활동을 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진실성과 자신의 방식의 효과성을 입증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토착 문화에 대한 존중이 출발점이 돼야 함은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개신교 자유주의자들의 선교 개념(‘하나님의 선교’라는)과 방식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은 ‘복음’(기독교 고유의 메시지)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지난 10년간 우리 나라의 경험이 보여 주듯이 종교적 자유주의자들이 정치적 자유주의자들과 유착해 신자유주의와 제국주의에 미온적이고 타협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 문제였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바람직한 선교 방식은 다른 문화와 종교를 존중하고, 그들과 협력적 봉사 활동을 할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서도 이들과 공동 운동을 건설해 나가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필자 최일붕은 대학원에서 종교사회학을 공부했다.

* P. Steeves, Keeping the Faiths: Religion and Ideology in the Soviet Union, 1991, pp. 85-86; P. Brock and T. P. Socknat, eds., Challenge to Mars: Essays on Pacifism from 1918 to 1945, 1999, pp.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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