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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조정과 노동자 운동

거의 모든 언론이 숨가쁜 소용돌이로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지금, 신문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표현 두 가지가 있다. "사상 초유"와 "최대 위기"가 그것이다. 작년 "김대중 정부 최대의 위기"였던 호화 옷 로비 추문에 이어 올해에는 박지원의 한빛은행 대출 압력 의혹 사건, 그리고 동방금고·금융감독원 뇌물 추문이 "최대 위기"의 기록을 깼다. 7월 초 "사상 초유"의 금융 노동자 총력 파업에 이어 11월에는 "사상 초유"의 전력 노동자 파업 예고가 전국을 뒤흔들고 있다. "사상 초유"로 고속도로를 점거하면서 부채 탕감을 요구한 10만 농민들의 시위도 있었다.

"사상 초유"와 "최대 위기"를 대표하는 주요 쟁점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위기와 구조조정, 대형 부패 추문으로 나타나는 정치 위기, 경제 위기 시기의 노동자 투쟁.

뒷심이 딸린 경기 회복과 제2의 환란

집권 3년째에 김대중은 자신의 최대 업적을 "경제 회복"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IMF 구제금융 3년째가 된 날, 9시 TV 뉴스의 앵커들의 첫 마디는 1997년 공황과 지금의 공통점에 관한 것들이었다. 일간지는 제2의 환란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걱정은 아마도 현실이 될 것 같다.

김대중 정부는 환율 비상이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애써 눈감으려 한다. 김대중 정부의 관료들은 1997년에 비해 겉으로 드러나는 경제 지표 ― 3년 연속 경상수지 흑자, 930억 달러의 외환보유액(당시 38억 달러), 10퍼센트의 경제성장률 ― 를 무시하지 말라고 외친다. 얼마 전 김대중은 "경제에 대한 국민들의 걱정이 너무 과장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1차 대환란 당시의 현상들이 재연되고 있다. 주가는 올해 초와 비교하면 거의 반토막났다. 외국인 투자가들은 2000년 들어 국내 주식을 지난 8월까지 11조 8천억 원이나 사들였지만 문을 닫는 벤처 기업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반도체 가격이 내려가고 포드가 대우차 인수를 포기했던 9월 중순부터 '큰 손'들은 주식시장에서 대거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큰 손'들은 한국의 대표주라고 알려진 삼성반도체의 주식을 팔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우량 은행주와 공기업의 주식들을 집중적으로 팔고 있다.

제1차 금융 구조조정 이후 금융 부실은 오히려 더 커졌다. 홍콩의 한 신문에 따르면 IMF는 2주 전 보고서에서 "원리금이 상환되지 않는 부실채권을 지닌 수백의 허약한 금융기관이 지난 3년 사이에 퇴출당했지만 한국 기업의 대다수가 거액의 채무를 지고 있다."고 인정해야 했다.

제2의 대환란은 1997년 때보다 더 깊은 공황을 몰고올 가능성이 있다. 현대그룹의 위기와 대우차 부도의 파장이 "대마불사의 신화"를 산산조각냈다. 1997년에 기아는 7위의 재벌이었다. 그러나 대우그룹이 작년 8월 800억 달러의 부채로 무너졌을 때 그것은 세계 최대의 파산 규모였다(〈파이낸셜 타임스〉 11월 20일치). 대우차는 내수 규모만 1백만 대이고 협력업체까지 포함해 67만 명의 고용과 직결돼 있다. 현대 건설 부도는 한국 경제에서 매출액 1위인 현대그룹을 벼랑 끝 위기로 몰고가고 있다.

김대중은 "대기업이라고 해서 퇴출 대상에서 제외될 수는 없다."고 큰소리쳤지만 막상 현대건설 지원을 위해 정몽구를 설득하는 데 안간힘을 써야 했다. 현대건설 파산을 막기 위해 11억 달러 규모의 자산 보충에 나섰지만, "해외 언론은 현대그룹 주력 회사의 도산 시기를 연장하는 것"일 뿐이라고 입을 모았다(〈국정신문〉 11월 23일치).

"실물경제는 건실"하다는 말과 달리 올해 들어 적자 기업은 2분기와 3분기를 비교해 62퍼센트나 늘어났다. 실업자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지금, 평범한 사람들의 소비는 꽁꽁 얼어 붙어 경제성장률 마이너스 5.9퍼센트를 기록했던 1998년 말 수준으로 후퇴했다.

해외 여건이 제2의 환란의 여건을 조성하고 있다. 장기 불황에 시달려 온 일본 경제가 다시 둔화되고 있다. 한국의 주요 수출 시장이자 유럽과 일본 등의 부자들이 주로 투자해 온 미국의 주식시장은 하락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남미와 동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국가 부도 위험에 처해 있다. 아르헨티나가 국가 부도 후보 1위라면 브라질·에콰도르·타이·필리핀·인도네시아 등이 그 뒤의 후보로 줄을 서 있다.

"정보통신 혁명의 승리", "신경제의 기적"은 이제 "신경제라는 신기루", "무너진 대박의 꿈"이라는 말로 바뀌었다. 한국 벤처 기업들의 몰락은 미국의 나스닥 주식 시장을 이끌었던 닷컴 회사들의 폐업이 급속하게 늘고 있는 세계적 현상의 일부다. 그래서 칭송받았던 기술주에 대한 투자는 어느덧 "금광을 찾아 질주하는 미친 말들의 무리"(〈르 몽드〉)로 묘사되고 있다.

〈르 몽드〉 지는 심지어 "지금 파산의 위기라는 1929년 대공황의 유령이 어슬렁거리고 있다."고 언급했다.

구조조정 지연은 필연

공황의 망령이 위협하는 지금, 김대중 정부는 "철저한 구조조정만이 살 길이다."이라는 주문을 또 다시 처절하게 외치고 있다. 그러면서 "구조조정의 발목 잡는 노조"라며 노동자들에게 위기의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그러나 "구조조정이 지연"되는 것은 애초에 두 가지 이유에서 예정돼 있었다.

첫째, 19세기 중엽에는 통할 수도 있었던 구조조정은 현대 자본주의의 위기 탈출 방식이 되기 힘들다. 한 기업의 부도가 연쇄 부도를 부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대우차 부도는 130여 개의 협력업체를 부도 위기로 몰아넣었다. 김대중은 대우차 노동자들에게 노조동의서 협박을 하며 "퇴출시킬 기업은 과감히 퇴출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협력업체들의 무더기 부도 사태가 번지자 황급히 경제관련 장관회의를 소집해서 "협력업체 살리기"를 지시해야만 했다.

11월 3일 발표된 퇴출 기업 명단을 보자. 정리 대상 기업은 총 52개였지만 실제로 청산 조치를 내린 기업은 18개였고 그 가운데 삼성자동차(1800명)와 삼성상용차(1300명)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대기업은 끼어 있지 않았다. 현대건설 처리 과정은 가장 두드러진 사례다. 정부는 퇴출 기업 명단에 현대건설을 넣겠다고 경고했지만, 이근영 금감위원장은 현대의 늙고 무능하고 탐욕스런 왕자들(정몽구와 정몽헌)이 자구계획안을 발표하기 전 날 정몽구를 직접 만나 땀을 뻘뻘 흘리며 현대차와 현대중공업의 자금 지원을 설득해야 했다.

둘째, 정경유착이라는 한국 자본주의에 더 깊게 아로새겨진 구조 때문에 구조조정은 지연될 수밖에 없다. 퇴출 대상 기업 소유주들이 구조조정을 지휘하고 감독하려는 자들에 연줄을 대서 자신의 뒤를 봐달라고 부탁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퇴출 위기에 놓인 부실 회사들의 로비 향연이 "금융강도원" 부패 추문의 본질이다. 제2의 동방금고 사건인 '열린 금고'를 열어 보면 금융강도원과 정·관계 인사들의 로비 관계가 드러날 것이다. '열린 금고'로부터 1천억 원 이상을 빼낸 진승현측의 로비를 받았다는 정·관계 인사들의 이름이 이미 거론되고 있다. 올해 초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 공개 내역에 따르면 재산 증식의 주된 이유는 "예금이자율 상승과 주식 가격 상승" 등이었고 "고위 공직자의 투자 성공률은 개인 투자자의 6배 이상"이었다. 이것은 정현준 스캔들이 입증하듯 벤처와 정부 관료 사이의 유착 덕분이다.

무엇보다 김대중은 어마어마한 구조조정 비용(공적자금)의 내역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공적 자금 내역은 은행과 기업과 정치권 간의 대형 비리를 보여 주는 판도라 상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우차가 "세계 경영"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을 열심히 쥐어짜 번 돈들은 정치권의 로비 자금으로 무수히 새어 나갔다. 김우중이 런던 법인을 통해 비밀 계좌로 숨겨 놓았다는 20조 원의 내역이 밝혀지는 것을 여야의 정치인들이 원할 리 없다.

"구조조정 지연"은 부실을 털어 낼 수 없게 만드는 자본주의 고유의 특징들에서 비롯한 예정된 결과였을 뿐이다.

해외 매각

현대건설과 대우차 부도가 터지자 IMF의 모범생 김대중은 "가차없는 구조조정"만이 한국 경제를 구할 수 있다고 했다. 노동자들까지 구조조정을 위해 희생하지 않는다면 한국 경제는 끝장나고 말 것이라는 주문이 또다시 반복되고 있다.

가령 김대중 정부는 대우차를 해외 매각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말한다. 정부·채권단·회사측은 "대우차 임단협에 5년 동안 구조조정을 할 수 없는 것으로 돼 있는데 그럴 경우 GM과의 매각 협상이 차질을 빚게 된다."(산업은행 총재 엄낙용, 〈조선일보〉 11월 8일자)라며 악랄한 노조동의서 협박 총공세를 퍼부었다. 그동안 힘겹게 동의서를 거부해 왔던 김일섭 노조위원장 측은 급기야 대우차 정상화를 전제로 인원 감축 동의서를 제출하고야 말았다. 이참에 정부·채권단·회사는 더욱 해외 매각을 밀어붙이려 할 것이다.

정부·채권단·회사측은 긍정적 효과를 낸 해외매각의 사례로 닛산의 예를 들고 있다. 세 개의 공장을 폐쇄하고 8천8백 명의 노동자를 감원했더니 흑자로 전환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닛산 경영진 내에서조차 "단기적 이익을 내기 위해 계열부품업체 매각에만 급급할 경우 장기적으로는 기업 경쟁력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우려"(〈한겨레〉 11월 21일)가 나오고 있다. 비용 삭감에 주력한 결과 올 상반기(4월에서 9월까지) 닛산의 일본 내 판매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9.4퍼센트 줄었고 등록차 시장점유율도 최저수준인 17.4퍼센트로 줄었다. 되레 닛산은 해외매각이 대안이 아님을 보여 주는 사례다.

정부와 채권단·회사측은 또다시 국민에게 부담을 주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고양이 쥐 생각해 주는 식의 역겹기 그지 없는 주장이다. 해외매각이야말로 국민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방식의 최악의 해결책이다.

예를 들어, 최근 GM과 피아트는 대우차의 창원과 군산공장만 선별 인수하겠다며 1조 원을 인수 가격으로 제시했다. 4조 8천억 원에서 2조 3천억 원으로, 다시 1조 원으로 인수 가격은 뚝뚝 떨어졌다. 자산가치 12조 원 이상이 되는 대우차를 부평 땅 값(1조 2천억 원)도 채 안 되는 돈에 사들이겠다는 것이다. 더구나 해외 매각되면 인수 기업은 18조 원의 대우차 부채를 단 한 푼도 인수하지 않는다. 이미 올해 초 GM과 포드·르노 등은 대우차 부채를 떠안지 않을 때만 협상이 가능하다고 분명히 해 놓은 상태였다. GM 본사가 있는 지역의 〈디트로이트 뉴스〉라는 신문(11월 17일치)은 "GM이 대우차 부채를 인수할 아무런 제약 조건이 없다."는 기사를 실었다. 결국 12조 원 자산 가운데 11조 원이라는 손실과 18조 원이라는 부채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부담으로 남는다.

GM으로 매각되면 공대생 가운데 1만여 명이 실업자가 돼야 한다는 금속연맹의 통계도 있다. 그 만큼 자동차 산업은 엄청난 고용 효과를 갖고 있다. 그래서 자동차 산업을 해외에 판 영국이나 스페인, 브라질, 체코 같은 나라들의 지배자들은 해외매각 이후에 후회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도 김대중 정부는 우선 현금을 만지고 보자는 식이다. 해외매각은 경제를 살리는 대안이 아니다.

공기업 민영화

김대중 정부는 민영화를 추진하기 위한 법안들을 국회에서 통과시켜 내년 초까지 모든 민영화 계획을 마무리해 놓겠다고 공표했다. 김대중은 공기업을 사기업화시키면 만신창이의 경제가 살아 돌아올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해외 대기업이나 국내 재벌들 가운데 "주인을 찾아 주면" 경제 상황이 더 나아지리라는 보장은 어디에서도 발견하기 힘들다. 사기업화가 공기업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것은 일종의 미신과도 같다. 민영화된 기업이 수익성을 늘린 방식은 민영화를 준비하기 위해 정부 지원금을 쏟아 붓는다든가, 주식을 헐값에 팔았다가 다시 주식 가격이 올랐다든가, 가격을 대폭 올리거나 수익이 적은 서비스의 공급을 중단시킨 결과였다. 영국통신(BT)의 경우 민영화 전에는 이윤에서 차지하는 연구개발 투자비의 비율이 12퍼센트였는데 민영화 2년 뒤에는 오히려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노동자들을 들들 볶아서 수익성이 잠시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의 민영화 과정은 감원과 노동강도 강화에 의존하는 수익성 증대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민영화되고 2∼3년 뒤 수익성 수준은 민영화 전으로 다시 돌아갔다. 민영화 후 잠시 동안의 수익성 향상은 노동자들의 희생뿐 아니라 어마어마한 환경 파괴라는 희생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래서 민영화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고 있는 타이석유공사 노조는 많은 나라의 사기업화된 전력 산업의 기업주들이 당장 전체 투자 규모의 50퍼센트를 차지하는 황 제거 시설(FGD) 투자를 꺼리고 있다고 폭로했다.

기업 인수를 위한 온갖 로비 작전으로 이어지곤 한다는 점에서도 사기업화는 전혀 효율적이지 않다. 한국비료와 데이콤 민영화 과정에서 삼성과 동부그룹 사이에, 엘지와 동양그룹 사이에 벌어졌던 온갖 추잡스런 헐뜯기와 불법과 위장을 동원한 인수 전쟁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소비 감소

구조조정은 소비를 둔화시켜 자본가들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한국의 소득구조는 국민 소득 중 62퍼센트가 노동 소득이다. 노동자들을 가난하게 해 그들의 호주머니를 꽁꽁 얼어붙게 하면 물건이 팔리지 않는다. 대우차 구조조정은 대우차 노동자들뿐 아니라 몇 천 개의 협력업체에 고용된 64만 명, 가족까지 합해 250만 명의 생계와 소비에 직결돼 있다. 동아·대동·일성·신화·우성·우방·청구·동보·서한·미주·삼익·(주)한양 등 건설사 무더기 퇴출로 2만여 명의 건설 노동자와 420여 개에 이르는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18만 명의 건설 현장 노동자들의 생존권 박탈은 더 한층의 소비 축소로 이어질 것이다.

지배계급이 생산성을 높이려고 노동시장을 유연화시키는 ― 즉 더 적은 노동자로 더 많은 일을 시키는 ― 전략을 쓸수록 내수는 계속 침체를 벗어나기 못하고, 따라서 경제 회생은 더욱 곤란을 겪게 된다.

바로 이 때문에 채무국의 빚 상환을 위해 감원, 노동강도 강화, 임금 삭감 등의 긴축정책을 밀어 붙였던 볼리비아 같은 나라의 경제는 IMF의 구조조정 이후 완전히 쑥대밭이 됐다. 그 과정을 주도했던 제프리 삭스 같은 자들조차 IMF의 계획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많은 연구가 있었지만 지난 10여 년 동안의 구조조정이 효과가 있었는지 여부를 분명히 말하기가 힘듭니다. 오히려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성장률 하락과 연관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결국 구조조정은 잘 진행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설사 진행된다 하더라도 경제를 더 만신창이로 만들 것이다. 김대중을 비롯한 지배 계급은 출구가 존재하는지조차 분명치 않은 위험한 미지의 세계로 가자고 우리를 윽박지르고 있다. 그 암흑 같은 터널에 왜 우리의 삶을 집어 던져야 하는가.

부패와 정치 위기

그 날 그 날의 급한 불을 정신 없이 끄고 다니는 데에 몰두해 있는 김대중 정부와 여권 인사들의 머리 속에는 지금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현대건설 처리 과정과 검찰의 탄핵소추 문제 등은 대표적인 사례일 뿐이다.

경제 위기는 정치 위기라는 문제로 우리를 인도한다. 집권 여당 내에서조차 "남미형 정치 불안에 일본형 장기 침체가 겹친 혼합 위기가 오고 있다."는 진단이 흘러 나오고 있다.

지금 정치 위기의 뇌관 노릇을 하는 사건은 단연 '열린 금고'와 금감원 추문 같은 제도적 부패다. 1997년 공황 때는 한보 스캔들이었다면 지금은 '열린 금고'와 금감원 추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경유착형 부패는 국가가 기업 투자의 우선 순위를 정해 주고 여신을 통해 국가 손실을 메워 주는 방식으로 경제 성장을 했던 동아시아 경제 성장의 핵심적 모순들 중 하나다.

김대중 정권 하의 대형 부패 사건들은 정권의 신뢰도와 정당성에 근본적 물음을 던지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다그치는 자들이 바로 1억 5천만 원 어치의 옷을 주고 받았다. 관치금융 없다고 잡아떼던 자가 몇 백억 원의 돈을 빌려 주라는 압력을 넣었다. 공적자금이 잘 쓰이는지를 관리하겠다며 금융 감독을 자처한 자들이 벤처 사기꾼의 주가 조작과 투자자금 모집의 뒤를 봐 주었다. 이 모든 사건에 검찰과 김대중의 측근들이 있다. 최근 사정 작업은 김대중의 면피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정치 위기는 지배 계급을 갈갈이 찢어 놓고 있다. "정권 재창출 실패 땐 피바람이 올 것"(김영배 민주당 고문)이라는 말은 칼 같은 긴장을 보여 주는 단편적인 표현일 뿐이다. 이러한 분열과 위기는 가장 교묘한 통치 기구까지도 뒤흔들어 놓고 있다. 동방금고와 금감원 추문 때문에 탄핵 위기에 놓인 검찰을 보자. 검찰 내에서는 지금 "정상적인 업무수행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정현준의 로비 자금을 정치인들에게 건네 줬고, 주한미군 경비대장 출신으로 전라도의 조직폭력배의 대부이고, C씨라고 알려진 김대중 친인척과 줄이 닿아 있는 오기준이 출국하기 전에 검찰은 이미 그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할 정도로 그의 신병을 완전히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출국을 전혀 막지 않았다.)

뜨거운 겨울

김대중 정부에게 분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노동비용을 줄여서 위기를 극복해 보자는 것이다. 30퍼센트 가까운 임금 삭감 효과를 목표로 하고 있는 '노동법 개악'도 그 예가 될 것이다. 얼마 전 대법원은 "퇴출기업 명예퇴직금은 배임죄"라는 판결을 내렸다. 김대중 정부는 1998년 퇴출은행 노동자들의 파업에 참여했던 장은증권 노조위원장에게 회사로부터 퇴직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했다. 이 선고는 회사가 위기에 빠졌다면 퇴직금 같은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말라는 악랄한 경고장이다.(당시에 퇴출은행측은 노동자들이 저리로 꾼 대출금을 갚게 해서 자기자본 비율을 조금이라고 높이려고 일부러 퇴직금을 지급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노동자들은 '구조조정을 위한 제물'이라는 경고장을 정부에 대한 경고로 되돌려 줄 차례라고 벼르고 있다. 노동자들은 35년 만의 정권교체의 결과가 무엇인지, 경제 회복에 관한 화려한 미사여구가 일자리 축소와 임금 삭감으로 둔갑하는 것을 3년 동안 똑똑히 지켜 보았다.

그러는 사이 전에 투쟁 경험이 없었던 노동자들도 새로운 노동운동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롯데 호텔 노동자들뿐 아니라 한국노총 산하 대형 노조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한국전력 노동자들과 도시철도 노조와 철도 노조 등이 파업을 결의하고 있다.

전국전력 노동자들은 부천과 안양의 열병합발전소가 엘지 파워콤에 매각되는 과정에서 40퍼센트가 감원됐고 남은 동료들을 "마른 수건 짜듯" 들들 볶는 것이 바로 민영화의 본질임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일자리뿐 아니라 전기료를 두 배에서 다섯 배로 올리고 이윤을 늘리려고 제한 송전할 것이 뻔한 민영화라는 미친 계획에 반대한다.

도시철도 노동자들의 경우, 도시 철도를 3년간 국가고객만족지수 1등으로 올려 놓는 동안 도시철도 노동자들의 점심시간은 1시간에서 20분으로 줄어들고 1km당 근무 인원 수는 파리 철도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도시철도 노동자들은 1656명 인원 감축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곱씹고 있다. 한 도시철도 노동자는 인원 부족이 낳을 대형사고를 걱정하면서 적정인력 확보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정부야말로 "시민의 생명을 볼모로 하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숨죽이고 있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연대를 요구하고 있다. 퇴출기업 노동자들이 그냥 당하지만은 않겠다고 벼르고 있다. 삼성 상용차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퇴출에 반대해 즉각 노조를 만들었다.

엘지 그룹의 "투자 동결과 비용 인력 감축 반대"를 요구하며 데이콤 노동자들은 14일째 파업을 벌이고 있다. 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1월에 6건에 불과했던 노동분쟁이 10월에는 220건으로 늘어났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1997년 파업 때처럼 연대를 모색했다. 세계의 거의 모든 언론이 "한국의 노조가 심상치 않다."(월 스트리트 저널)며 촉수를 곤두세우고 있다. 올해 말과 내년 초는 "뜨거운 겨울"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경제 공황이 저절로 노동자 투쟁을 부르는 것은 아니다. 경제 위기와 노동자 투쟁의 관계는 결코 기계적이지 않다. 사기 저하 상태에 있는 노동자 계급에 닥쳐온 경제 위기는 노동자들의 의기소침과 패배감을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나라의 노동자 운동은 바로 고양기의 분위기 속에서 경제 불황을 맞이하고 있다. 이 사실은 앞으로의 계급투쟁이 급격한 사회 변화를 향한 중요한 전진을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대안은 무엇인가

이런 때일수록 명쾌한 주장과 대안이 필요하다. 지금의 위기는 노동자들이 뭔가를 잘못해서 벌어진 것이 아니다. 한 해 동안 두 배 이상 자본 지출을 더 늘리는 바람에 반도체 가격이 떨어졌는데, 그것도 노동자들 탓인가? 미국의 정보기술산업조사 자문회사(일명 가트너 그룹)가 "시설 투자 붐"이라고 부르고 메릴린치 증권회사가 "공급 과잉"이라 부르는, 수요 이상의 생산 시설 확장이 노동자들 책임인가? 노동자들을 다그치면서 생산 목표 대수를 무조건 늘리기만 했던 김우중의 경영이 노동자 책임인가? 현대차·기아차 생산 대수(288만 대)의 7배나 더 많이 수요보다 생산되는 바람에 세계 자동차 산업에 찾아든 위기가 노동자들의 책임인가? 자본주의의 위기는 기업주들의 경쟁적 축적이 낳은 결과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과연 대안은 있는가?' 하고 물을 수 있다. 대안은 있다.

부평 공장의 대우차 노동자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GM으로의 매각 때문에 왜 노동자들이 피땀 흘려 만든 멀쩡한 공장을 폐쇄시켜야 하는가? 채권단과 GM을 위해 희생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노동자를 살리는 방법은 바로 공기업화다. 공기업화는 국민들에게 또 부담을 주는 대안 아니냐고 김대중이 말한다면 "재원은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고 답할 수많은 근거들이 있다.

이자 소득 4천만 원 이상을 버는 인구의 단 0.1퍼센트만을 위해 금융소득종합과세를 유보하지 않는다면 당장 11조 원의 세금을 거둘 수 있다. 이 돈은 공기업화를 하고도 남을 만한 충분한 돈이다. 감사원이 조사한 바대로 일부 고소득자의 탈세 소득만 제거해도 10조∼20조 원의 돈을 마련할 수 있다(〈매경 ECONOMY〉 200년 9월 27일자). 만약 "유가 인상"을 핑계 댄다면? 석유제품 수출입 가격보다 국내 공급 가격을 터무니없이 비싸게 책정해서 지난해 2조 원의 폭리를 더 취한 5개 정유회사들한테서 세금을 더 거두라고 하자. 이 모든 주장에 대한 확신은 투쟁을 더 확대해서 승리로 가기 위한 결정적 비결이다.

그러나 경제 위기 시기에는 정부와 사장들을 설득이나 대화를 통해 물리칠 수는 없다. 양보하는 것이 양보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낫겠다는 판단이 들도록 만들려면 강력한 대중 투쟁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것이 유일한 승리의 비결이다. 11월 11월 11일 KBS 심야토론에서 경총의 김영배는 "노동조합을 참여시켜 성심을 다한 대화를 한 후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고 한 한국노동연구원장의 말에 "아름다운 시"일 뿐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이 비웃음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경제 위기 시기일수록 노동자들이 단호한 태도를 보여야만 승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브라질의 민주노총격인 CUT 노조는 1999년 12월 14일부터 약 두 달 동안 브라질 내의 볼보 공장을 인수한 포드의 인원 감축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당시 브라질의 실업률은 20퍼센트였고 경제는 최악이었다. 바로 그러한 때 포드는 볼보 공장 노동자들 9천여 명 가운데 2천여 명에게 해고 통지서를 보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해고 통지서를 받은 노동자들은 즉각 이에 저항하면서 지역 공동대책위를 꾸려 가면서 열심히 싸웠다. 자발적으로 퇴사한 3백여 명을 제외하고는 단 한 명의 노동자도 해고되지 않았다.

경제 위기와 정치 위기가 깊어지는 가운데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윤이라는 자본주의의 신성불가침한 원리에 근본적 물음을 던지기 시작하고 있다. 진정한 사회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고양기인 지금의 상황을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조직은 단명에 그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여기에 자신들의 과제를 일치시키는 결단력 있고 생기 있는 조직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저당 잡힌 미래를 되찾는 투쟁에서 자격 있는 수혜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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