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차 비정규직 파업은 정말로 무엇을 남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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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 〈맞불〉의 전지윤 동지 기사 ‘9일 간의 영웅적인 점거 파업이 남긴 것’은 기아차 정규직 노조 지도자들과 활동가들에게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단결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상기시키고 있다. 비록 글 끝 부분에서 “기아차의 정규직·비정규직 투사들은 이번 투쟁에서 쓰라린 교훈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글의 어디에도 비정규직 활동가들에게 제시하는 교훈은 없다.
이는 기아차 회원 동지들과 전지윤 동지 등이 이번 투쟁을 분석하는 데서 초전투적 비정규직 활동가들에게 지나치게 타협한 소치이다. ‘초전투적’이라 함은 전투성의 도가 지나쳐 현장조합원 선진 부분의 정서와도 접점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원칙이나 강령과 달리 전술은 대중의 후진적 부분에 영합하는 기회주의로 빠져서도 안 되지만, 대중의 선진 부분보다 앞질러 나아가서도 안 되는 것이다. 전술은 더도 덜도 말고 대중의 선진 부분과 보조를 같이해야 한다.
공감 얻기
역설이게도, 활동가들은 이번 점거 파업의 경제적 효과가 예상 밖으로 성공을 거두자 원래 이틀로 예정했던 파업을 연장했고, 전투성에 도취돼 정규직 조합원의 선진적 부분과도 정서적으로 유리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그동안 비정규직 활동가들이 암묵적·명시적으로 갖고 있던 정규직 조합원들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작용했던 듯하다. 그 결과 파업 참가자들은 고립됐고, 고용 안정화와 차별 시정 요구들을 성취하지 못했다. 특히 아흐레 동안 공장을 멈추게 한 파업치고는 너무도 얻은 게 없다.
회사측이 너무나 단호해서 얻은 게 없다고 우리 스스로 위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규직 노조원의 극소수인 ‘금속 노동자의 힘’(이하 금속힘) 등 전투적 노동자 단체들의 용감하고 헌신적인 지지를 넘어 정규직 노조원 다수의 동정과 그 선진 대중의 실질적 지지를 받았다면 회사측은 큰 압력을 느꼈을 것이다.
이것이 회사측의 양보를 보증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양보의 가능성을 크게 높였을 것임은 틀림없다. 특히 구사대(5백여 명 규모로, 사무직과 중하급 관리자가 70퍼센트를 차지했다)에 대한 보수적 노동자들의 지지를 약화시켜 구사대의 준동과 광분을 막거나 미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점거의 효과를 없애기 위한 회사측과 구사대의 ‘라인 직접 연결 시도’도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가정을 너무 진전시키는 것은 탁상공론이 될 것이다. 확실한 것은, 정규직 노조원 다수의 공감을 얻었다면 이번 파업은 노동자의 단결이라는 노동자 투쟁의 최대 수확을 거뒀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이번 투쟁이 의식과 조직이라는 성과를 남겼는가 하는 물음으로 우리를 이끈다. 의식과 조직은 노동자 투쟁을 평가할 때 요구 성취 여부 외의 다른 중요한 기준, 어쩌면 더 중요한 기준이다.
이 문제에서도 답변은 부정적이지 않을 수 없다. 파업 중단은 경찰 진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구사대의 위협에 기가 질려 제풀에 꺾인 결과처럼 보인다. 이는 노동자들(파업 참가자든 아니든)의 자신감과 사기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듯하다.
조직상의 성과로 말하자면, 비정규직지회 상근간부들은 비정규직지회의 독자성을 인정받고, 전에 정규직 노조로 직가입했던 5백여 명을 반환받기로 한 것을 내세울지 모른다. 하지만 자의에 따라 이적한 사람들을 ‘반환’받는다는 것도 우습지만, 비정규직지회의 ‘독자성’을 ‘성과’로 보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독자성이 강조되면 강조될수록 정규직 노조와 통합한 효과는 그만큼 감소되는 법이다.
조직 통합과 단결의 효과
비정규직지회가 노조 안에서 독자적 조직(지회냐 분회냐는 중요하지 않다)으로 남는다면 정규직과 비정규직 단결의 효과는 반감한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의 문제들을 비정규직지회가 알아서 처리할 문제들로 치부할 것이다. ‘너희 일은 너희 지회가 알아서 해’ 하는 답변이 돌아오기 십상일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조 지도자들에게 압력을 가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정규직 노조의 개량주의적 지도자들에게 얼마나 편한 일인가.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들을 정규직 지회가 알아서 처리할 문제들로 치부할 것이다. 노동조합 본래의 부문주의는 극복되기는커녕 더 강화되는 것이다.
대체로 기아차 비정규직지회 활동가들은 정규직 노조와 비정규직 노조가 조직 통합을 하면 정규직 노조 지도부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단속할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는 정규직 노조원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은 데서 비롯한 것이다.
무릇 노동조합이란 사용자의 착취를 완화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단결을 구현하는가 하면 전투적 조합원들을 단속하는 구실을 하기도 한다. 구체적 상황에서 이 두 가지 서로 모순된 측면 가운데 어느 측면이 더 우세한가에 따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독자적 조직이 정당화되거나 그렇지 못할 것이다. 대체로 말해,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멸시하고 배척하는 경우에는 정당화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정당화될 수 없다. 올해 기아차의 경우는 후자였다.
기아차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 노조와 통합하겠다고 발표했었고, 이에 대해 비정규직지회 소속 조합원들은 80퍼센트라는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했다. 그런데도 비정규직지회 간부들은 통합 실행을 꺼렸다.(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에 맞서 정규직 노조 지도부가 비정규직지회 소속 조합원 직가입시키기라는 방식을 채택한 것은 비정규직지회의 감정을 악화시켜 노동자의 단결을 가로막는 짓이었다.
엘리트 의식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정규직지회 활동가들이 정규직 노조로 이적하는 노동자들을 “맨날 파업하는 게 싫어 옮기는 자들”로 매도하고 비방한 것도 노동자의 단결을 해치는 처사였다. 그래 놓고는 그들을 ‘반환’받는 것을 성과로 치켜세우는 것도 모순이지만, 비정규직지회 활동가들이 보아 넘긴 점은 “맨날 파업하는 게 싫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노조원이길 택하는 사람은 효과를 내는 파업을 원하고, 파업에 참가해도 보호받기를 원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점이었다. 실제로, 그들 이적자들은 이번 비이적자 동료들의 파업에 대체로 동정적이었다.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비정규직 활동가들 다수의 도덕주의적 태도와 이질감으로 말미암아 이번 점거 파업은 이미 전투적인 활동가와 조합원의 전투성을 보여 준 것을 넘어 훨씬 더 광범한 노동자들의 지지와 연대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파업 중에 정규직 노조 지도부가 소속 조합원들을 퇴근시켜, 조업 중단이 ‘사고’로 처리되고 정규직 조합원들의 임금 손실이 발생해, 이들의 여론이 악화하기 시작할 때도 비정규직 활동가들은 정규직 노조 지도부 탓만 했지, 정규직 조합원 다수의 정서를 헤아려 보려 애쓰지는 않았다.
물론 정규직 조합원들을 불신하는 비정규직 활동가들도 금속힘 등에 속한 정규직 활동가들은 ‘예외’로 볼 것이다. 한편, 비정규직 동료들에 대한 금속힘 등 정규직 활동가들의 태도에도 온정주의적 요소가 적잖은 부분 있었던 걸로 보이는 대목이 있다. 전술상의 주요한 결정은 점거 농성자들이 직접 또는 대표자를 뽑아 토론을 통해 할 수 있었고 또 그래야 했는데도 대부분 정규직·비정규직 활동가들 차원에서 이뤄졌다.(농성자들은 몇백 명밖에 안 돼, 총회 형식으로 직접 의사결정을 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대리주의적 방식은 활동가들의 엘리트 의식을 반영하는 듯하다. 하지만 투쟁하는 노동자 대중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그렇기에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이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엘리트 의식은 때때로 종파적 태도로 나타날 위험성이 있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좌파’를 자처하는 활동가들은 자주파나 국민파에 속하는 정규직 노조 지도부에 대해 그저 비난조로만 대하는 경우가 적잖이 있다. 하지만 그들을 그렇게 대하는 것은 그들을 직접 선출한 정규직 현장조합원들의 다수를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점에서 〈맞불〉의 관련 기사도, 필자 자신도 그런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곤 했음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근본적 사회 변혁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종파주의나 심지어 초좌파주의로 미끄러질 위험성이 언제나 있다. 때로 외부 세계가 자신에게 너무 엄혹하게 느껴지곤 하기 때문이다. 이런 유혹이 들 때면 언제나 우리는 대중이 정치적 경험을 통해 스스로 각성하고 스스로 조직할 잠재력이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전략과 전술
또한 정치 전략과 전술을 연마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공동전선이 중요한데, 흔히 좌파들은 공동전선을 좌파들만의 결집체로 이해하기 쉽다. 이번 연좌파업 투쟁에서 이것은 정규직 노조에 대한 태도뿐 아니라 8월 31일의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 문제에서도 드러났다.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는 그 명칭에 걸맞지 않게 너무 소규모였다. 그런 거창한 집회를 좌파 단체 상근자들과 좌파적 학생들뿐 아니라 개량주의적 지도부 하의 노동자들도 광범하게 참가할 수 있도록 계획하지 않고 금요일 이른 오후에 열기로, 그것도 화요일에야 비로소 결정했다는 사실은 기아차 활동가들이 공장 밖으로부터의 연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음을 반영하는 듯하다.
정치는 하나의 옵션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다. 특히 경제 위기와 신자유주의적 공세의 시기에는 노동조합 운동가에게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기아차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은 사용자측의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용감함과 의지력, 투지를 보여 주었다. 특히 그들의 대다수가 오륙십대 아주머니들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더 희망을 일깨운다.
하지만 정규직 노조 지도부가 미덥지 못하다는 이유로 정규직 동료들과 함께 같은 노조에서 일하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이들에 대한 도덕주의적 의심과 불신, 위화감 등을 갖는 비전략적·비전술적 방식으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이간질을 통한 각개격파라는 사용자들의 전략·전술을 분쇄할 수 없음도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