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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 일보직전의 파키스탄

이 글은 〈Socialist Worker〉 2070호에 실린 크리스 하먼의 글 ‘Pakistan on the edge of turmoil’을 번역한 것이다.

10월 6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 결과와 관계없이, 파키스탄의 격변은 불가피해 보인다.

1999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은 자신의 오랜 정적인 베나지르 부토와 회담을 추진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베나지르 부토는 두 명의 전 총리들 중 한 명으로, 무샤라프 정권 아래서 ‘자발적’ 망명길에 올랐다.

많은 논평가들은 무샤라프와 부토가 몇 가지 합의에 이를 것이라 예상한다. 즉, 부토의 부패 혐의를 모두 취하하고, 헌법을 개정해서 부토의 총리 복귀를 허용하는 한편, 무샤라프는 계속 대통령직을 유지하는 것이다.

나와즈 샤리프(무샤라프의 쿠데타로 쫓겨난 또 다른 전 총리)의 화려한 복귀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됐다.

무샤라프가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부토와 그녀가 속한 파키스탄인민당(PPP)과 제휴하자, 최근 몇 달 사이 두 가지 상이한 방향에서 무샤라프 반대 분위기가 고양되고 있다.

한편으로 많은 중간계급들이 무샤라프가 대법원장을 해임하려 하자 격분해 반기를 들었고, 결국 그의 시도는 좌절됐다.
다른 한편으로 우익 이슬람주의 정당들의 압력이 증대하고 있다. 이들은 무샤라프가 조지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을 확고부동하게 지지하는 데 분노해 있다.

파키스탄 안의 친탈레반 마을들, 특히 아프가니스탄 국경과 근접한 와지리스탄 지역에 대한 군사 공격의 빈도도 증가하고 있다.

중간계급이 정권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것은 무샤라프와 미국의 후원자들 모두에게 큰 근심거리다.

1999년에 무샤라프는 대중이 샤리프와 부토에게 크게 실망한 덕분에 손쉽게 권력을 쥘 수 있었다.

부토·샤리프 정부의 부패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이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실제로 그 어떤 종파적인 정치·종교·인종 조직과도 거래할 준비가 돼 있었다.

부패

결국 대다수 중간계급과 이슬람주의 정당들은 무샤라프의 쿠데타를 열렬히 환영했다. 무샤라프는 다른 정치인들의 배신이 낳은 정치적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지 그 지도자들의 탐욕만으로 이전 정부들의 부패의 원인을 설명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파키스탄 사회 깊은 곳에 자리한 균열에서 비롯했다. 바로 이 균열들이 다시금 드러나며 무샤라프 정권을 괴롭히고 있다.

파키스탄은 60년 전 인도 아대륙(亞大陸)에서 분리해 세워진 국가다.

이 새로운 국가는 ‘무슬림 국가’가 존재한다는 관념에 바탕을 두고 세워졌다. 그러나 사실 이 국가는 서로 다른 언어·전통·관습을 가진 6개의 집단들로 구성됐다.

새로운 국가에 가장 열광한 집단은 ‘무하지르’였다. 이들은 분리가 이뤄진 시기에 인도 영토로 분류된 펀자브 지역 출신의 이주자들이었다.

무하지르가 국가 기구를 장악하면서 이들에 대한 분노가 광범하게 퍼졌다.

한편, 나머지 종족 집단들 사이에 분리주의적 압력이 재발했다.

남서 지방의 발루치족은 처음부터 강제로 국가에 편입됐다.

북서 국경 지역의 다수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족이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열망했다.

인도 영토를 사이에 두고 [파키스탄과] 1천6백여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동파키스탄 지역의 벵골 지역은 1971년에 분리해 국가를 수립했고, 그것이 오늘날 방글라데시가 됐다.

파키스탄이 탄생한 뒤 수십 년 동안 대중의 생활수준이 향상됐다면, 이런 종족 간 긴장은 불거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향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옛 지주 계급들은 소유지 대부분에서 거의 봉건적 권력을 계속 누릴 수 있었다.
국가 경제가 인구 대다수의 빈곤을 심화시키며 급격히 성장할 때, 신흥 계급인 산업 자본가들이 지주들과 나란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할 조처가 취해지는 듯했던 1970년대 초반에는 잠시 희망이 있었다.

봉건 가문의 자손인 줄피카르 알리 부토(베나지르 부토의 아버지)는 사회주의와 몇몇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공언하며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노동자·농민 지지자들을 배신했다. 그의 심복 중 하나였던 무함마드 지아 울 하크 장군은 힘이 충분해졌다는 판단이 들자, 정부를 전복하고 부토를 처형했다.

나와즈 샤리프는 지아 독재 치하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그는 펀자브 지역에서 군사 정부의 총리를 역임했다.

그 뒤 잇달아 등극한 지배자들이 이질적인 집단들을 함께 묶어두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종족의 차이, 이슬람 해석의 차이, 신앙이 깊은 사람과 세속적인 사람의 차이 등을 이용해 서로 싸우게 하는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하층 중간계급의 일부는 국가 기구 요직을 차지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결집했다. 그런 투쟁은 종종 유혈낭자한 종족적·종교적 폭력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위협

이런 산발적인 투쟁들은 수많은 평범한 파키스탄 사람들의 삶에 큰 위협이었다. 반면 부자들은 별 어려움 없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지아 장군 하에서 이런 상태는 계속됐다. 1988년 비행기 사고로 그가 죽자, 베나지르 부토와 나와즈 샤리프가 차례로 총리로 등극했다. 이들은 1980년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러시아를 패퇴시키려고 파키스탄을 군사기지로 사용하는 것을 용인했다.

부토와 샤리프는 모두 1990년대에 아프가니스탄에 친파키스탄 정부를 세우고자 탈레반을 지원했다. 이를 통해 파키스탄 내 소수민족인 파슈툰족을 달래고 중앙아시아 국가로 연결되는 무역로를 개척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은 카슈미르 분쟁 지역을 둘러싼 민족적 열망을 부추겨 인도와 맞서 싸울 이슬람주의 지원병들을 모집할 수 있었다.
그동안 파키스탄의 대도시들, 특히 카라치 시는 점점 무기들로 넘쳐났다. 경쟁하는 종족 집단들·종파들 사이의 폭력은 대도시를 마비시켰다.

무샤라프의 지배는 이런 체제의 연장선상에서 발전해 왔다. 그러나 매우 골치 아픈 문제가 하나 추가됐다.

2001년에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자, 무샤라프는 파슈툰족 등 옛 동맹들에게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가 어렵게 구축한 정치적 동맹이 흔들리게 됐다.

무샤라프는 권력 유지를 위해 갈수록 위험한 줄타기를 해야 했다.

그는 부토와 샤리프 정당들의 지지자들을 억누르기 위해 탈레반에 호의적인 이슬람주의 정당들을 이용하면서도, 미국에게 자신이 파키스탄 내 탈레반 지지자들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란 점을 내세웠다.

그러나 지난해 그는 발을 헛디뎠다. 많은 파슈툰족들이 나토의 끝날 줄 모르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자신들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특히 미국이 파키스탄 군대에게 아프가니스탄 국경에서 전투를 벌이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분명해 보인다.

결국 이슬람주의 정당들은 무샤라프 반대 선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느끼고 있다. 그러나 20퍼센트도 안 되는 득표율 때문에, 만일 군사 정부가 몰락하면 그들도 부토와 샤리프에게 밀려나는 것이 아닌지 두려워하고 있다.

발루치스탄 지역에 많은 양의 가스가 매장돼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지자, 애초에 파키스탄에 속하기를 원치 않았던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다시금 독립을 요구하는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현재 이것은 민란 수준으로 발전했다.

또, 옛 정치 엘리트와 매한가지로 부패한 군대 장교들에 대한 중간계급의 불만도 점증하고 있다. 이런 불만은 최근 초두리 대법원장 방어 시위로 표현됐다.

미국은 파키스탄에게 자신의 새로운 동맹인 인도와 평화 상태를 유지하라고 지속적으로 압박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샤라프가 카슈미르 지역에 대한 전쟁 위협이라는 검증된 [지배] 전술로 대중의 민족적 감정을 자극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

이것이 무샤라프가 폭력적 통치를 시작하게 된 배경이다.

무샤라프는 자신의 동맹 집단인 카라치 시의 무장 종족 집단 무타히다민족운동(MQM)이 대법원장 지지 시위대를 공격하는 것을 허용해 수십 명을 죽게 했다. 한편, 군대는 이슬라마바드의 ‘붉은 사원’을 점거한 이슬람주의자들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폭력에 의지하는 것은 무샤라프의 강력함보다는 취약함을 보여 주는 징표다. 그래서 그는 부토와 거래를 하려 한다.

이 거래는 “테러와의 전쟁”에 훨씬 더 민주적인 외양을 덧씌울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의 환대를 받았지만, 많은 논평가들은 이 거래가 무샤라프와 부토에 대한 불신감만 더 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부토가 약간의 권력이라도 얻으려고 파키스탄 민주화 운동을 팔아먹었다고 여긴다. 원수와 동맹을 맺으려 한 무샤라프의 어설픈 시도는 분명 초조함의 산물이다.

무샤라프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카드는 자신이 낙마했을 때 파키스탄에서 일어날지 모를 일에 대한 중간계급과 백악관 다수 인사들의 우려[를 활용하는 것]이다.

군사 지배가 약해지고, 군사 지배 종식 요구가 제기되면, 파키스탄이 폭발적으로 분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고 우익 이슬람주의자들이 주된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사 지배의 약화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능력이 있는 집단이 행동하는 것을 가로막아온 장애물들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최근 여론 조사를 보면, 파키스탄 인구의 75퍼센트가 무샤라프 정부 하에서 빈곤이 증대했다고 믿는다.

여론 조사에 응한 압도 다수는 군비 지출 축소, 인도와 화평 정책 유지, 사유화 중단을 희망한다고 답변했다.

이것은 군사 정부만이 아니라 부토와 샤리프, 또 우익 이슬람주의 정당들과도 완전히 다른 입장이다.

따라서 관건은 오늘날 정치 위기 속에서 그런 과제들을 떠안을 대중운동이 부상하느냐 마느냐다.

카라치 시에는 강력한 투쟁 전통이 있는 거대한 노동계급이 있다.

군사 통치가 했던 한 가지 구실은 그런 전통의 부활을 막는 것이었다. 군부는 파키스탄이 다른 나라들과 교역할 때 주요 연결 고리가 될 뿐 아니라 북부 도시들과 연결되는 철로가 있는 카라치 시의 부두를 통제했다.

방글라데시가 분리한 직후인 1971년, 군부 통치는 엄청난 위기에 직면했고, 이 위기는 거대한 투쟁 물결을 불러왔다. 건국 이래 처음으로 압도 다수의 파키스탄 민중에게 진정한 희망이 제시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무샤라프의 몰락이 1971년과 같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부토의 지지 여부에 상관없이, 만일 무샤라프가 권력을 계속 유지한다면, 파키스탄의 억압받는 소수민족들·노동자·농민이 직면한 문제들 중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익 이슬람주의 정당들이 차지할 정치적 공간은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

번역 : 조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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