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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식 기업 모델의 파산

미국식 기업 모델의 파산

강철구

“세계 어느 나라보다 투명한 것으로 알려진 주식회사 미국은 알고 보니 기업들의 가짜 보고서 천국이었다.” 미국의 대기업들이 저지른 추잡한 부패 행위가 연일 도마 위에 오르자 많은 사람들이 미국 기업의 깨끗하고 투명한 이미지에 대한 환상을 내던지고 있다. 1997년 동아시아에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국제통화기금(IMF)은 미국 ‘기업의 투명성’을 본받으라고 지겹도록 설교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이 부패를 없앨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그들이 설파한 미국식 기업 모델이 이제는 증오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작년 말에 터진 엔론 부패 스캔들은 미국 기업 관행에서 일탈한 현상이 아니었다. 엔론은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는 부패 추문의 첫 주자였을 뿐이다. 웬만한 미국 기업들은 탈세, 횡령, 주가 조작, 매출 조작, 분식 회계 등 고전 수법을 써먹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미국에서 장거리 전화업체 2위인 월드컴은 네트워크 장비 보수에 들어간 38억 달러(4조 5천6백만 원)를 지출 항목이 아니라 자본 투자 항목에 넣어 회계 조작했다. 월드컴이 2001년 14억 달러, 올해 1분기 1억 3천만 달러의 순익을 올렸다고 발표한 것은 순전히 사기였다. 부통령 딕 체니가 홍보 비디오에 출연해 열렬히 칭찬한 회계법인 아더 앤더슨이 월드컴 회계를 감사했다. 아더 앤더슨은 엔론 부패에도 연관돼 있다. 월드컴이 조작한 회계 액수는 엔론의 6배다. 사상 최대 규모다. 그러나 이 불명예 기록도 곧 깨질 판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복사기 제조업체 제록스가 60억 달러가 넘는 매출액을 분식 회계했을지 모른다고 보도했다. 지난 1월 파산 신청을 한 광섬유 네트워크 업체 글로벌크로싱은 다른 통신업체들과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매출을 부풀렸다. 현재 20개 기업이 회계 사기 혐의로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다. 이 외에도 K마트, IBM, GE, AOL 타임워너, GM 등 미국 간판급 스타 기업들이 회계 사기 혐의를 받고 있다.

사기와 부패의 체제

작년 〈비즈니스 위크〉가 훌륭한 최고경영자(CEO)라고 추켜세운 타이코 인터내셔널 전 회장 데니스 코르로우스키는 회사 자금을 유용해 호화 저택을 구입했다. 또 1천3백만 달러짜리 고가 미술품을 구입하면서 1백만 달러를 탈세했다. 월드컴 최고 경영진 12명이 월드컴 전체 주식의 50퍼센트 가량을 소유하고 있다. 이 파렴치범들은 월드컴 주식이 폭락할 것을 알면서도 뻔뻔스럽게 노동자들에게 퇴직 후를 고려해 자사 주식을 사라고 부추겼다. 전체 연금 기금의 55퍼센트인 2억 1천8백만 달러가 자사 주식에 투자됐다. 최고 경영진들은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 그들은 악재를 발표하기 전에 주식을 미리 팔아 손실을 최소화했다. 경영진들이 역겹게 미소지으며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때 순식간에 연금을 날려버린 노동자들은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미국 경제 시스템의 우월성을 자랑하던 제너럴일렉트릭(GE)의 전 CEO 잭 웰치도 분식 회계 혐의를 받고 있다. 한국 CEO의 대표 인물 김정태 국민은행장이 잭 웰치 자서전 2만 권을 구입해 국민은행 직원들에게 읽게 했을 정도로 잭 웰치는 전 세계 기업주들에게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CEO의 아버지라던 잭 웰치, 너마저…”라며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조지 W 부시는 “일부 못된 망나니 때문에 미국의 자유기업 시스템이 흔들린다”며 잘못을 저지른 기업주들을 엄단하겠다고 밝혔다. 바로 그 못된 망나니들이 백악관 안에서 설치고 있다. 부시 행정부 인사들이야말로 분식 회계와 기업 부정 행위의 원조다. 부통령 딕 체니는 1995∼2000년 7월 사이에 세계 2위의 거대 석유회사 핼리버튼의 회장 겸 경영자로 있을 당시 4억 5천만 달러의 수익을 부풀렸다. “회계를 조작하는 기업인들을 실형에 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폴 오닐 재무장관도 알코아 회장이었을 때에 회계를 조작했다. 질레드 사이언스 회장이던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도 구설수에 올라 있다. 최고의 망나니 조지 W 부시도 하켄에너지 이사 재직시 주식 내부자 거래를 했다. 부시는 하켄에너지에게서 18만 3백75달러를 저리로 융자받아 이 회사의 주식을 매입했다. 부시는 악화하는 경제 위기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부패 추문으로 정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최근 실시한 미국 내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 3분의 1가량만이 “부시가 경제와 기업에 대한 태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있다”고 답했다.

일련의 분식 회계 사건들은 체제가 더 깊은 위기로 빠져드는 징후다. 작년 미국에서 기업이 2백57개 파산했다. 분식 회계는 투자자들이 기대한 것과 실제 이윤 사이의 격차를 메우기 위한 시도였다. 투자의 광란이 과잉생산과 이윤율 저하로 이어진 정보 통신, 에너지 거래업체, 바이오테크 등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린 분야에서 분식 회계 규모가 컸다. 경제 위기의 대가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에게 떠넘겨진다. 미국 여론 조사 기관 퓨는 2001년 말 미국 최고 CEO의 평균 연봉이 1천45만 달러(약 1백25억 원)라고 밝혔다. 1985년에 비하면 무려 8백66퍼센트나 오른 셈이다.

반면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은 계속 하락해 왔다. 미국 최고 CEO의 평균 연봉은 일반 노동자들 임금의 4백10배고, 육체 노동자의 5백31배다! 미국 최고 경영진들은 노동자들이 가져가야 할 몫을 강탈해서 거대한 부를 쌓았다. 그런데 이제 자신들이 추구한 이윤 경쟁으로 회사가 위기에 처하자 애꿎은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월드컴 경영진들은 회사가 위기에 처하자 전체 직원의 20퍼센트인 1만 7천 명을 감원하겠다고 선포했다. 미국 인터넷 업계에서만 지난 2년간 15만 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었다.

자본주의 체제는 이윤 경쟁에 기초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는 이윤 지상주의를 조장하고 정당화한다. 체제를 운영하는 자들이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온갖 사기 행각을 벌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부패와 사기가 ‘후진국병’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풍토병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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