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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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카드 제국》 - 로버트 D 매닝, 참솔
김덕엽
신용카드 발급이 1억 장을 넘어섰다. 15세 이상 경제활동인구 한 사람당 신용카드 4.69장을 갖고 있는 셈이다. 신용카드 회사들은 자신들이 1억 장이 넘는 카드를 발급하기까지 “내게 힘을 주는 카드”,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가치” 등 현란한 광고를 내세워 신용카드 사용을 부추겼다. 정부 역시 신용카드 사용이 투명한 경제의 척도인양 신용카드 사용을 권장했다. 그러나 신용카드 빚 때문에 일어나는 범죄가 연일 신문·방송에 오르내리자 선진 시민의 결제 수단이던 신용카드가 허영과 탐욕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돼 버렸다. 신용카드 회사들도 광고에서 절제를 모르고 신나게 카드를 긁어대던 연예인을 갑자기 신용카드 사용을 절제하라고 점잖게 충고하는 사람으로 둔갑시켰다. 언론은 신용카드 회사들의 카드 발급 조건을 선진국 수준에 맞춰야 한다는 나름의 해결책을 내 놓았다. 그렇다면 발급된 신용카드가 15억 장이 넘는 나라, 한 사람당 신용카드 10장을 갖고 있는 나라 미국은 신용카드 문제에서 자유로울까? 경제사회학자 로버트 D. 매링은 미국 내에서 15년 동안 수백 명과 한 인터뷰와 1980년대 경제 상황을 분석해 ‘최초의 신용카드 분석서’인 《신용카드 제국》을 펴냈다. 매링은 이 책에서 신용카드 빚 때문에 자살한 자녀를 둔 부모와 신용카드 빚을 갚지 못해 파산한 개인을 단순히 과소비꾼으로 몰아 부도덕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언론과 정부의 위선을 폭로했다.
저자는 신용카드 때문에 쌓인 빚이 개인의 낭비벽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궁핍을 개인의 문제로만 보는 것이고, 사회·경제 상황과 조건 때문에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점을 무시한 것임을 잘 지적했다. 매링은 이런 논리가 “신용카드 빚을 제때 갚지 못하고 만기를 연장하는 회전결제 채무자에게 ‘징계 차원에서’ 높은 수수료를 물리고, 신용카드로 일시불 구매를 즐기는 부유층을 보상하는 신용카드회사를 옹호해주는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한다. 신용카드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 가정 가운데 저소득층의 비중이 1983∼1995년 사이에 2배 이상 늘어났다. 이 시기 대기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했다. 정부의 친기업 정책은 유급 휴가· 건강 보험·퇴직 연금 등을 삭감해 노동조건을 최악으로 만들었다. 매닝은 이런 조건에서 노동자들의 신용카드 부채를 설명한다. 단순히 이윤에 눈먼 신용카드 회사만이 문제가 아니라 정부와 사장들도 신용카드 문제의 주범이라는 것을 밝히는 2·3·4장은 신선한 분석틀을 제공한다.
이 책이 나오자마자 서둘러 서평한 공병호는 저자의 시각이 “빈자와 부자의 대결과 갈등 구조로 세상을 바라 본다.” 하고 비판하고는 “소비자들이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을 찾으라고 충고한다.
또, 높은 연회비·수수료를 거부하고 카드 빚을 탕감시키려는 운동을 반세계화 운동과 연관지으려는 저자의 노력을 대안 부족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대안이 없어 보이는 쪽은 이윤 논리를 내세워 우리 삶을 파괴하는 자들이다.
《제국은 없다》 - 조지 오웰, 서지원
이종길
《제국은 없다》(원제 : 《버마시절》)는 조지 오웰이 1922∼1927년에 ‘인도 제국 경찰’로 재직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시간적 배경은 1920년대 중반이며, 무대는 영국 식민지인 버마의 한 읍 카우타다다.
카우타다에는 영국인들이 조직한 ‘백인클럽’이 있다. 이 클럽에 속해 있는 인물들은 주인공 플로리를 제외하고는 하나같이 인종적 편견과 문화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버마인들을 매우 열등한 인종으로 여긴다. 클럽 회원 엘리스가 “역사가 시작한 이래로 줄곧 노예인 저 저주받은 검둥이 돼지들을 지배하기 위해 우리는 이 곳에 왔소.” 하고 정말 혐오스럽게 말했는데도 어느 누구하나 반발하지 않는다.
주인공 플로리는 이들의 인종주의에 심하게 반발한다. 그는 버마인 친구 베라스와미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만약 우리가 문명을 주는 세력이라면 그것은 대규모로 강탈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오.” 그러나 그는 제국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못한 채 소외감에 빠져 혼자만의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영국의 문예 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플로리를 두고 사악한 사회 제도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또 그것과 결별하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인간’이라고 평가한다.
주목할 만한 다른 한 인물은 버마인 하급 치안 판사 우 포 킨이다. 그는 영국에 기생해서 권력을 휘두르는 부패한 원주민 관료의 전형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입신 출세한 그는 베라스와미가 “음흉한 악어”라고 부를 정도로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소설의 커다란 줄거리는 버마인으로서 최고 명예인 백인클럽 회원이 되기 위해 우 포 킨이 베라스와미와 플로리를 점차 파멸시키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플로리는 우 포 킨의 음모와 계략에 휘말려 사랑하는 여인 엘리자베스에게 버림받고, 결국 큰 절망에 빠져 자살을 선택한다. 물론, 플로리의 사랑을 허물어뜨린 당사자는 우 포 킨이지만 우 포 킨 같은 인물을 낳은 건 바로 제국주의다. 작가는 독자에게 사랑을 파괴한 진정한 원흉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를 권고한다.
이 소설은 쉽고 명징한 문체로 이루어진 오웰의 《동물농장》과는 전혀 달리 화려하고, 유창하고, 섬세하다. 그는 《나는 왜 쓰는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거대한 자연주의적 소설 ― 불행한 결말로 끝나고 미세한 묘사와 인상적인 직유로 가득 찬, 그리고 말이 소리 그 자체를 위해 사용하기도 하는 화려한 문장들 투성이의 자연주의적 소설을 쓰고 싶었다. 사실 나의 첫 장편 《버마시절》은 다소 그런 종류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특히, 이 소설 내용의 독특함은 제국주의가 피지배자들뿐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에 속한 인간 개개인의 삶도 타락시키고 파멸시킨다는 점을 보여 준다는 데 있다.
오웰이 작품을 쓰던 시기(1933∼1934년)에 스탈린의 문화 자객 츠다노프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교리를 공표했다. ‘사회주의’ 문학은 관료, 노동, 자기 희생에 대한 찬미를 주된 내용으로 해야 한다는 선언이었다. 오웰은 스탈린주의에 반대한 독립적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전 세계 좌파 작가들의 문학적 상상력을 송두리째 억압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치 소설은 필연적으로 선전주의적 편향에 빠져 문학성을 잃게 된다는 순수 예술지상주의자들의 생각과 달리, 오웰은 독특한 개성과 문체가 묻어나는 작품을 독자들에게 내놓았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 디 브라운, 나무심는사람
김용석
디 브라운의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는 주로 1860∼1890년대까지 미국 인디언들에게 일어난 일을 그리고 있다. 백인들에게 이 시기는 서부의 위대한 신화 ― 보안관, 총잡이, 기병대, 카우보이 ― 가 쏟아져 나온 시기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는 이러한 신화 이면에 담긴 진실을 말하는 가장 뛰어난 책이다.
1860년 3월 12일 미국 의회는 서부 지역의 주민에게 무상으로 땅을 제공하는 선점권 법안을 통과시켰다. 톰 크루즈가 주연한 영화 〈파 앤드 어웨이〉의 마지막 장면은 서부의 광활한 대지에 자신의 깃발을 먼저 세워 땅을 차지하는 서부 개척 정신을 잘 보여 준다. 백인들은 용감한 개척 정신을 가진 사람이 땅을 차지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과연 그 땅은 누구나 차지할 수 있는 아무도 살지 않던 땅이었을까?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몰려들기 전까지 그 곳의 주인은 인디언이었다. 그들을 제일 먼저 만난 백인은 콜럼버스였다. 그는 인디언을 보고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며, 말은 부드럽고 상냥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 이들의 태도는 예절 바르고 훌륭합니다.” 하고 묘사했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에게 식량을 나눠줬을 뿐 아니라 옥수수 경작법을 가르쳐 그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나 백인들이 인디언들의 땅과 금을 노리고 달려들면서부터 학살이 시작됐다. 백인들은 인디언들에게 “평화 협정”을 맺자고 때로는 감언이설로 속이고 때로는 무력으로 강요했다. 그 협정은 인디언이 자기 땅을 백인들에게 양보하고, 대신 백인들이 정한 보호 구역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협정에 반대한 인디언들은 평화를 해치는 위험한 인디언이라는 이유로 백인들에게 끔찍하게 학살당했다.
협정을 맺은 인디언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비참했지만 “바위가 녹아 내릴 때까지라도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했다. 협정을 어긴 쪽은 항상 백인들이었다. 백인들은 인디언 구역에 들어가지 않기로 하고 인디언들을 보호 구역으로 밀어넣었다. 하지만 협정을 맺자마자 그 곳에는 백인들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 백인들이 약속한 보호 구역은 점점 좁아졌고 인디언들은 더욱 척박한 땅으로 밀려났다. 나바호족이 ‘보호’받던 곳은 “물은 검고 소금기가 있어 마실 수 없고 수용되어 있는 4분의 1이 질병으로 죽어”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나바호족은 미국 인디언 중에서 가장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비참한 상황을 견디다 못해 보호 구역에서 탈출한 인디언들은 협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사냥당했다. 백인들에게는 “죽은 인디언이 좋은 인디언”이었다.
운디드니는 미국 인디언들에게 학살의 상징이자 저항의 성지다. 1890년 12월 29일 인디언들이 자신들의 삶이 개선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춘 망령의 춤(고스트 댄스)을 막기 위해 군대가 파견돼 운디드니 강 근처에서 항복해 무장 해제된 수우족 인디언 3백여 명을 학살했다. 여기에는 어린아이와 여자 들도 포함돼 있었다. 이것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패배를 결정지은 사건이었다. 미국 인디언들이 사용한 아름다운 땅의 이름들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 이름을 처음 사용한 부족들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없다. 아파치족은 불과 몇 사람만이 살아남았지만 그들의 이름은 미국의 학살 무기 이름으로 계속 사용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인디언들이 역마차를 습격하고 머리가죽을 벗기는 사람들로 기억한다. 그러나 백인들이 외면한 굶주리고 남루한 백인 아이들에게 자신의 돈을 나누어준 대추장 타탕가 요탕카(앉은소)의 이야기는 알지 못한다.
인디언 추장의 딸 포카혼타스와 백인 존 롤프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를 들어본 사람은 많다. 그러나 8천여 명이던 포카혼타스의 부족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백인들에게 학살당해 1천 명 미만으로 줄어든 사실은 알지 못한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는 미국의 개척 정신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미국 인디언의 피를 묻히고 탄생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승녕
학교 다닐 때 배운 프랑스 혁명은 귀족들이 당한 수난의 이야기다. 우리는 학교나 책에서 수 천 개의 방이 있는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매일 밤 무도회가 열렸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정작 혁명을 일으킨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무시됐다. 1780년대 앙트와네트가 매일 사치스런 도박을 즐길 때 도시 노동 대중과 시골 농민들은 빈곤과 공포 속에서 살았다.
빵 값은 1789년에는 1파운드(약 4백50그램)에 4.5수까지 올랐다. 도시 노동 대중의 임금은 기껏 30∼40수였다. 농민들은 더 힘들었는데 일당이 10수 이하인 경우도 많았다. 겨울에는 그 나마도 5∼6수밖에 벌지 못했다.
더구나 제3신분은 20분의 1세, 타유세, 십일조 등 갖가지 명목의 세금을 내야 했다. 소금세 같은 간접세를 합하면 그 부담은 훨씬 끔찍했다. 민중의 빈곤은 그야말로 공포였다.
대다수 민중은 부랑자가 되었다. 그들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식량을 구걸했다. 부랑자 가운데 일부는 비적이 되어 농민들의 곡식을 약탈하기도 했다. 농민들은 비적들을 두려워했다. 1789년에 이 공포는 프랑스 전역을 뒤덮는다. 이것이 1789년의 대공포다. 이 공포는 비적들에 대한 두려움이었고 언제 굶어 죽을지 모르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1789년 농민들은 귀족들이 언제 음모를 꾸며 자기들을 학살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 프랑스 특권 계급의 요청으로 언제 외국 군대가 프랑스에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앙트와네트는 오빠인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군대 5만 명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공포는 빠리나 뤼페크 같은 거점에서 출발해 발달한 통신 수단을 통해 프랑스 전역으로 퍼졌다. 대공포로 말미암아 프랑스는 통제불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대공포 이면에는 특권 계급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민중은 가난할수록 세금을 많이 내는 구 체제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귀족들이 세금 한 푼 안 내고 숲에서 사냥을 즐기는 것에 민중은 불만을 가졌다.
특권 계급은 놀기만 할 뿐 사회에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그들은 사회를 지배했지만, 비적들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 국가권력은 추락할 대로 추락했다.
민중은 더는 특권 계급을 존경하지 않았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이 일어난 지역에서는 귀족들의 집이 불탔고 귀족들의 곳간이 민중의 손에 넘어갔다.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는 봉건 사회 자체를 위협했다. 바코네 지방에서는 농민들이 교회에 내는 십일조를 거부했으며 그 외 봉건적 세금 모두를 거부했다. 교회와 귀족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대공포는 특권 계급에 대해 사람들이 품고 있던 증오심을 심화하고 혁명 운동을 강화했다. 또한 민중이 경계심을 갖게 해 스스로 민병대를 조직하게 했다.
《1789년의 대공포》에는 파리 이외의 지방에서 일어난 일이 생생히 기록돼 있다. 르페브르는 프랑스 혁명에서 농민이 한 역할을 주로 연구한 학자답게 지방에서 농민이 한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본다. 대공포라는 사건 하나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프랑스 혁명 전반에 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프랑스 혁명 당시 파리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이나 각 신분과 계급간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알베르 소불의 《프랑스 대혁명사》(두레출판사)를 읽어본다면 이 책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알베르 소불의 책에는 상퀼로트(혁명 당시 도시의 노동 대중) 운동이 잘 나타나 있다. 두 사람의 책을 같이 읽으면 프랑스 혁명 때 계급 관계들을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수많은 봉기를 일으키고,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노동자와 농민들도 동참한 혁명이었다.
이 책을 통해 프랑스 혁명 당시 민중의 힘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