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IST

다시 듣는 맑시즘 2007 ④: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편집자] 맑시즘 2007에서 존 리즈와 린지 저먼이 했던 연설들을 기획 연재하고 있다. 이 글은 마지막 순서로 린지 저먼이 연설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녹취한 것이다.
린지저먼은 영국 ‘전쟁저지연합’ 사무총장이며 영국 급진정당 ‘리스펙트’ 런던시장 후보이다.

① 사회 변혁의 전략과 전술 (존 리즈)
② 사랑, 결혼, 그리고 가족 (린지 저먼)
③ 현대 제국주의의 정치와 경제 (존 리즈)
④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린지 저먼)

오늘날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의 반대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회주의라면 민주주의를 가장 핵심적인 가치로 삼아야 합니다. 실제로 모든 위대한 사회주의자들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들은 언제나 민주적 변화를 바라는 광범한 운동의 일부였습니다. 오늘날 사회주의의 대선배로 여겨지는 칼 마르크스와 그의 가까운 협력자인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혁명적 사회주의자로서 1848년 독일 혁명 당시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참가했던 혁명이 안타깝게도 실패했기 때문에, 또 독일 정부가 그들을 매우 위험한 혁명가들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은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망명해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참여했던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왕정과 교회로 이뤄진 구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습니다.

사실 마르크스는 자신을 독일 민주주의 투쟁의 극좌파로 여겼습니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7~19세기 동안 유럽을 휩쓴 이른바 부르주아 대혁명, 혹은 자본주의 대혁명의 전통을 계승했습니다.

자본가들이 전 세계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기 전에 민주주의는 자본가 강령의 핵심이었습니다. 오직 민주주의를 통해서만이 귀족제도와 가톨릭교회가 지배하는 옛 봉건질서를 허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7세기 영국 혁명, 18세기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 19세기 미국 남북전쟁 ― 미국 혁명의 완성으로 불리며 노예제 폐지를 이끌어냈다 ― 같은 위대한 운동들이 모두 해방·자유·민주주의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자본가 계급이 성장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면서 오랜 적인 봉건 구질서, 왕정, 귀족제도뿐 아니라 새로운 적인 노동계급과도 직면하게 됐습니다.

유럽 전역을 휩쓴 1848년 혁명을 기점으로 자본가 계급은 구질서보다도 노동계급을 더 두려워하게 됐습니다. 이후 자본가 계급은 구질서와 화해하고 노동계급을 탄압했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았습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48년 혁명을 일컬어 “사형 집행인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고 말했는데, 실제로 당시 성장하고 있던 노동계급은 결국 자본가 계급과 충돌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엥겔스가 말했듯이 사형 집행인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자본가 계급의 해결책은 그 문을 닫는 것이었습니다. 즉, 한 때 자본가 계급이 열정적으로 추구했던 민주주의 혁명의 문을 닫는 것이었습니다.

충돌

이렇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에서 첫 번째 큰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갈수록 많은 국가들에서 국회가 생기고, 보통선거를 요구하는 장기간의 투쟁이 ― 영국에서 참정권론자들이 선거권을 획득할 때까지 1백 년(1830~1928년)이 걸렸습니다 ―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선거권을 얻고 더 많은 의회가 생겨날수록 의회가 행사하는 실질적 권한은 축소됐습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두 종류의 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졌습니다. 하나는 정치적 권력, 즉 투표할 권리와 비록 소수 집단에 해당하더라도 의회와 제헌의회를 구성할 수 있는 권리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경제적 권력도 존재합니다. 당신이 공장이나 방송국 등을 소유하면 투표권을 가지거나 국회의원이 되거나 심지어 총리가 되는 것보다 더 큰 힘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총리들은 방송국·공장·대기업 소유주들의 지시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민주주의 투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단지 정치 권력뿐 아니라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경제 권력에도 도전해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공장의 폐쇄 결정은 보통 의회나 정부가 내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본가 개인이나 소수의 자본가 집단이 결정하며 의회는 공장이 폐쇄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어떠한 민주적 수단도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계급은 철저하게 무기력합니다. 노동계급이 투표에 참가해도 그들의 표는 대기업과 부자 들이 지배하는 ― 집을 잃거나 실직하는 것이 시장의 결과가 아니라 [불가항력의] 자연재해처럼 느껴지는 ― 세상에서는 거의 영향력이 없습니다.

물론 노동계급은 아주 강력한 경제적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부를 생산하며, 그들이 생산하는 부로부터 자본가 계급의 이윤이 창출됩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을 벌여 역사의 진행 과정을 바꾸고 그들을 착취하는 자본가들의 권력에 도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순간에 노동계급은 자신이 사회의 부를 생산하며 자신 없이 자본주의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매우 명확히 보여 줬습니다.

이것이 20세기에 일어난 혁명들, 특히 러시아 혁명이 이전의 혁명들과 성격이 다른 이유였습니다. 단지 이미 일부 나라에서 인구의 다수를 점하게 된 노동계급이 주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혁명이 정부와 의회에 대한 지배권 같은 정치 권력뿐 아니라 자본가들의 경제 권력에도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혁명에서 대안 권력의 힘이 최초로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먼저, 1917년 혁명의 예행연습으로 알려진 1905년 혁명에서, 그리고 1917년 혁명에서 소비에트 ― 러시아 말로 ‘소비에트’는 평의회를 뜻합니다 ― 형태의 노동자 평의회가 설립됐는데, 이것은 노동계급이 만들 수 있는 대안 권력의 모습을 보여 줬습니다.

대안 권력

소비에트는 노동계급의 권력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차르 체제에 대해, 나중에는 민주주의 정부로 일컬어진 임시정부에 대해 대안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차르 체제의 정치적 외피만 변화시켰기 때문에 러시아가 직면한 위기를 해결할 수 없었고, ‘빵·평화·토지’ 등 러시아 노동계급과 농민의 간단한 소망도 실현할 수 없었습니다. 이 세 가지 요구는 오직 기존 경제 권력에 도전했을 때 실현 가능했습니다.

불행히도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 권력을 건설한다는 본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러시아 혁명은 짧은 기간 동안 노동자 권력을 탄생시킬 수 있었고, 그 사이 많은 것들을 성취할 수 있었지만, 성공한 노동계급 혁명을 탄탄한 기반 위에 놓을 수 있는 혁명의 국제적 확산이 실패함에 따라 갈수록 고립되고 왜곡됐습니다.

모든 나라들에서 민주주의가 왜곡되거나 그것의 도입이 연기됐습니다. 러시아에서는 민주주의와 정반대인 국가자본주의 독재 체제가 탄생했습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심하게 착취 받는 노동자 집단 중 하나로 전락했습니다.

스탈린주의의 역사적 유산 때문에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회주의가 민주주의의 반대말이자 독재이고, 개인들을 통제하고 획일적 삶을 강요하는 체제를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는 사회주의가 진정으로 지향하는 민주주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스탈린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사라졌고, 1989년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가장 극적인 형태로 붕괴했습니다. 스탈린주의 국가가 붕괴한 이유는 세계시장의 경쟁 압력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여전히 중국 지배자들이 이 모델에 집착하지만, 현실의 중국은 세계시장에 개방돼 매우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고, 중국 노동자들은 혹독하게 착취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보통 이것을 사회주의의 종말로 묘사하곤 합니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의 종말’을 손쉽게 선언했던 것처럼, 이제 자본주의는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하면서, 오직 자유시장에서만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1989년 이후로 민주주의의 의미는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 됐습니다. 과연 민주주의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민주주의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부시가 주장했던 것처럼 폭탄으로 전파될 수 있는 것일까요?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자본주의적 착취가 더 원활히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일까요?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의 결합을 뜻합니다. 이것은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와 진정한 민주적 토론이 결합됐을 때만 가능합니다.

이것은 독재로부터 이제 막 빠져 나온 나라들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나라들의 경우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투표 등 민주적 제도들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싶어했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분리주의 체제] 종결 직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선거가 진행됐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 처음으로 투표에 참가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섰습니다.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은 당연히 그것을 환영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남아공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를 존속시킨 채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만 무너뜨린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했습니다.

남아공은 세계에서 가장 범죄율이 높은 나라 중 하나로 매우 폭력적인 사회이며, HIV·AIDS 문제도 매우 심각합니다. 또, 최근에는 흑인 노동자들이 착취 증가에 맞서 흑인이 다수를 점하는 정부를 상대로 파업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을 포함해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반복해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지만, 자본주의 아래 민주주의는 한계가 너무나 컸습니다. 독재에 반대해 민주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평범한 노동계급 대중의 관점에서 보자면, 단순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자본가 계급이 착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줄 뿐 노동계급의 해방 가능성을 열어 주지는 않습니다.

지금 신자유주의는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를 열어 주기는커녕 국제적으로 갈수록 비자유주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국민 자본가 집단이나 국회 같은 일국적 수준의 민주적 기구들뿐 아니라, 선출되지 않은 기업 집단과 그 우두머리들의 모임도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일부 선출된 대통령과 총리 들은 G8 같은 국제 정상회담에서 기업 우두머리들과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자국민들을 더 잘 착취하고 통제할 것인가를 논의합니다.

민주주의의 결과

그리고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들, 예컨대 기후변화, 자유무역, 전쟁 등 중요한 문제에 관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극소수의 사람들입니다. 토니 블레어의 전(前) 공보 담당자는 블레어가 단지 반전 시위를 벌인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의사를 거슬러 이라크 침략을 강행했던 것이 아니라, 많은 의원들과 블레어의 거의 모든 보좌관과 장관의 의사를 거슬러 이라크 침략을 강행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런 결정이 얼마나 비민주적으로 내려지는지 잘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결여를 보여 주는 두 번째 지표는 이른바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수가 매우 적다는 것입니다. 지난 영국 총선 때는 고작 22퍼센트의 유권자만이 현 정부에게 표를 던졌습니다. 현 신노동당 정부는 영국 역사상 가장 정당성이 취약한 정부입니다.

그러면 정치인들은 사람들이 너무 게으르거나 정치에 무관심해서 투표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반전 운동과 온갖 캠페인들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다만 사람들은 의회 정치가 자기 삶과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옳습니다. 사람들은 의회를 통해서 자기 삶에 중요한 것들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굳이 국회의원 선거 때 투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는 이른바 ‘민주’ 정치인들과 노동 대중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이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합리적 사회라면 정치인들은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관심을 파악하고 그들의 필요에 맞춰 정책을 바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합리적 사회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 정치인들은 갈수록 보통 사람들과 멀어지고 있을 뿐 아니라, 국가 기구와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이용해 자신이 대변해야 하는 사람들로부터 필사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G8 정상회담이나 다른 정상회담 반대 시위에 참가해 본 사람들은 정치인들이 시위대와 접촉을 피해 호사스런 호텔이나 성(城)이나 오지(奧地)에 숨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갈수록 자본주의 대혁명 이전의 옛 귀족과 왕족 들의 행태를 닮아 가고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가 떠오르네요. 앙투와네트는 사람들이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죠.

그리고 정치인들은 그렇게 거리를 두기 위해 온갖 법률들을 사용합니다. 저는 한국에 와서 국가보안법에 관해 들었습니다.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노동조합 활동이나 시위를 제한하는 법률들이 제정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테러 위협’을 빌미로 의회 1마일 내에서 집회를 여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됐습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시민적 자유에 대한 공격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제2차세계대전 동안 가구의 3분의 1이 폭격으로 집이 파손됐다. 독일군은 영국 해협 바로 앞까지 진출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영국 정부는 현 정부가 이른바 ‘이슬람주의 테러’를 빌미로 도입한 법들을 도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정치인들이 그런 법들을 통과시키는 것은 사람들이 결코 동의하지 않을 신자유주의·제국주의적 의제를 강요하려면 시민권의 제한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첫째,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결코 민주주의의 진정한 목표를 달성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지금 원하는 민주적 목표는 고사하고, 2~3백 년 전에 세운 목표도 달성하지 못합니다.

민주주의를 확산하고 확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 우리 삶을 조종하는 경제 권력을 우리 손으로 통제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입니다.

모든 작은 투쟁, 모든 파업, 모든 캠페인, 모든 점거 등 자본주의 아래서 사람들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벌이는 모든 활동들이 대안적 민주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투쟁 과정에서 사람들은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사리사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직장 동료와 동료 시민 들을 위해 투쟁하게 됩니다.

민주주의를 공장·작업장·사무실·대학교 등에 대한 통제의 문제로 확대할 때만이 진정한 대안적 민주주의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그런 투쟁은 결국 노동 대중의 민주적 소망을 억누르기 위해 존재하는 자본주의 국가에 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사회주의 혁명인 것입니다.

녹취·번역 이예송

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