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주의가 패권주의의 해결책이 될 순 없다
〈노동자 연대〉 구독
비대위는 “당직 공직 선거에서의 세팅선거, 위장전입, 집단주소이전, 당비대납, 대리투표, 흑색선전 등” 같은 “정파 패권주의와 민주주의 왜곡 사태에 대한 엄중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실제, 민주노동당의 내부 분란은 패권주의와 그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협력적인 당 운영을 위협하는 패권주의는 반드시 극복돼야 한다.
패권주의는 기계적 다수성을 고집한다는 뜻이다. 민주노동당에서 자주파가 다수파이므로 다수결만을 고집하면 거의 언제나 자주파가 승리하게 돼 있다. 수적 열세에 있는 평등파는 이를 자주파의 패권주의라며 강하게 반발해 왔다.
실제, 패권주의의 주된 책임이 다수파인 자주파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주파 내에서도 이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고 이것이 평등파가 옳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평등파도 당권파 시절에는 만만찮은 패권적 행태를 드러냈다. 한 예로, ‘다함께’를 당 밖 그룹으로 몰아세우며 통제하려 한 바 있다. 지금도 평등파가 당권을 잡고 있는 지역에서는 이런 행태가 나타나고 있다.
두 정파의 행태는 외관상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대립은 역설적이게도 두 정파 모두 공유하는 ‘당’ 모델에서 비롯한 것이다. 자주파나 평등파 모두 당을 다원적이고 느슨한 다정파 연합체로 운영하기보다는 대부분의 쟁점들에 대한 동의를 동맹자에게 요구하는 ‘당’ 모델을 선호한다.
그리 되면 당 운영에 자기 목소리를 반영할 수 없는 소수파는 불만을 갖게 될 것이고, 감정 대립과 갈등은 불가피해진다. 그러므로 민주노동당을 ‘당’이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느슨한 다정파 연합체(공동전선)처럼 운영해야 한다.
그러나 우려스럽게도, 비대위의 패권주의 진단과 해결책은 이와 정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먼저, 비대위는 패권주의와 무관한 사례를 무리하게 포함시켰다. 2002년 대선 때 공동선거본부 내 일부 자주파 인사들의 노무현 지지 선언을 패권주의라고 규정한 것이 그 경우이다. 이 경우는 몇몇 개인들의 정치적 오류라고 비판해야 하는 것이지 자주파 전체의 패권주의인 것처럼 규정할 수는 없다.
자기 모순
둘째, 비대위가 든 패권주의 사례는 불비례적이고 불공평하다. 비대위는 패권주의의 책임을 사실상 자주파에게만 묻고 있다. “사실 관계가 일부 확인된” “패권주의와 당내 민주주의 훼손 사례”는 전부 자주파의 것들이다. 그나마 평등파의 성북갑 부정선거 사례는 “당내 논란이 되었거나 되고 있는 기타 사건”으로 간단히 처리했다.
비대위가 협력적 당 운영을 통해 패권주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패권주의 문제를 자주파에 대한 정치 공세용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대목이다.
셋째, 비대위는 “향후 유사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관계기관에 수사 의뢰”하겠다고 밝혔다. 임시당대회 안건 설명회에서 길기수 비대위원은 “당의 자정 능력이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 기관의 힘을 빌어 당내 민주주의를 확립하겠다는 것이다.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발상이다. 그러나 진정한 당내 민주주의 확립은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토론을 활성화할 때만 이뤄질 수 있다.
국가 기관을 당내 문제에 끌어들일 수 있다는 비대위의 거리낌 없는 발상은 종파적인 당권 투쟁의 논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또, 비대위가 당을 체제 순응적으로 만들려 한다는 의혹을 증폭시켜, 불길하기 짝이 없다.
비대위의 자가당착도 꼬집지 않을 수 없다. 비대위는 “세팅선거”를 패권주의의 한 사례로 언급했다. 그런데 비대위의 비례대표 전략명부도 전형적인 “세팅”이다. 10명의 비례후보(1~8번, 19~20번)를 “세팅”해 찬반투표를 묻겠다는 것이 비대위의 방침이다. 자주파의 “세팅”은 패권주의이고 비대위의 “세팅”은 “효과적인 총선 전략”(임시당대회 안건 설명회에서 비대위의 총선준비기획위원회 김경수 팀장)인 이유에 대해 비대위는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야 한다.
사실, “세팅선거”를 문제 삼는 것 자체가 자기모순에 빠질 수 있는 주장이다. 당직·공직 선거에서 견해가 비슷한 사람들이 짝을 이뤄 출마하는 것은 하나의 옵션이다. 그래서 “세팅선거”를 집요하게 문제 삼아 왔던 평등파도 사실은 “세팅선거”를 했던 것이다. 굳이 “세팅선거”를 문제 삼을 요량이라면 그 비판 잣대를 자신들에게도 적용해야 공평한 태도일 것이다.
비대위의 전략명부는 이처럼 자가당착이기도 하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문도 포함돼 있다. 비대위는 10명의 전략명부 후보들을 한 묶음으로 해 찬반투표를 하겠다고 한다. 가뜩이나 지도부의 사실상 ‘공천권’ 행사 때문에 피선거권이 제약된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판에, 비대위는 당원들의 선거권도 제약하는 안을 내놓은 것이다. 한두 명의 후보가 성에 차지 않을지라도 총선에 비례후보를 출마시키고 싶으면 “통”으로 찍으라는 ‘벼랑끝 전술’이다.
비대위의 패권주의 진단과 해결책을 보노라면, 패권주의에 맞선 또 다른 패권주의 - 공동전선 모델에 따른 다원주의가 아니라 당 모델에 따른 일방주의를 자주파와 평등파가 공유하는 데서 비롯한다 - 를 보는 것 같아, 그래서 비대위를 지지했던 당원들이 바랐던 당 혁신의 방향과 모습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 영 뒷맛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