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꼬빌 동지를 떠나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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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빌 동지가 12년 7개월간의 한국 생활을 접고 고향인 방글라데시로 돌아갔다. 마숨, 까지만, 라쥬 동지 추방 이후, 유난히 힘들어하던 꼬빌은 그 즈음부터 몇 차례 출국 준비를 했다. 고향행 티켓까지 끊어 놓았던 꼬빌은 이주노조 농성 투쟁 때문에 차마 공항으로 발길을 옮기지 못하고, 출국 날짜를 연기해 왔다.
몇 차례 송별회를 하면서도 결국 가지 못하고 농성장에 들르면 제일 반갑게 맞곤 했다. 나는 출국 하루 전에 소식을 접하고선 알리지도 않고 갈 생각이었나 싶어 어찌나 야속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전화통에 대고 소리부터 질러댔더니, 평소와 달리 ‘미안하다’며 고분고분한 목소리가 더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출국 당일 점심때 만나 같이 식사를 했다. 방글라데시에 놀러오면 24시간 소고기를 구워주겠다며, 대신 김치랑 소주를 반드시 갖고 오라고 했다.
사람에게 ‘불법’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짐승처럼 줄줄이 엮어 가둬 놓고 태워 죽이는 이 끔찍한 나라의 음식을 꼬빌은 가기도 전에 벌써 그리워했다. 꼬빌은 20대 중반에 코리안드림을 품고 한국으로 왔다. 그리고 30대가 되기도 전에 오른손 검지를 잃었다.
평소처럼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옛날 얘길 하던 꼬빌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리곤 쌍꺼풀 진한 큰 눈이 껌뻑이는가 싶더니, 이내 울고 있었다. 얼마간 말없이 함께 울었다.
내일모레 마흔인 이 노총각이 그토록 눈물나게 보고싶다던 엄마와 친구들을 이제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비자 쟁취해서 제주도로 놀러가자”던 그의 소박한 소망을 이 나라 정부는 끝까지 들어 주지 않았다.
언젠가 꼬빌이 그랬다. 이 나라는 나한테 손가락도 뺏어가고, 인권도 뺏어가고, 자유도 뺏어갔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동지를 줬고, 새로운 꿈을 줬다고.
꼬빌은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돌아가서도 열심히 투쟁할 거라고 했다. 한국 이주노동자 투쟁의 역사를 일궈 온 꼬빌에 이어 제2, 제3의 꼬빌이 수도 없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들 모두와 “노동비자 쟁취해서 제주도로 놀러가는” 그날까지 함께 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한다.